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60
0
어머니의 첫 기일이다. 산소는 다행히 별문제 없다. 장마에 일부 쓸려 내린 부분은 지난 추석 성묘 때 손을 봐 둔 터였다. 잔디도 제법 잘 살아 있다.
고향 집 담장 옆에 서 있는 감나무는 잎을 거의 다 떨구었다. 까치밥으로 남긴 감이 가지 끝을 잡고 바람에 흔들린다. 어머니는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우리 육 남매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자식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 잠시도 쉴 틈 없이 일했던 어머니. 그러면서도 일찍 아버지를 여읜 우리가 잘못될까 봐 늘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가슴 한쪽에 묻어 둔 남편 잃은 설움 따위는 꺼내 볼 엄두조차 못 냈다. 어머니가 드리는 기도의 가장 큰 염원은 우리 육 남매의 무사였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힘겨운 삶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설이 다가오면 보름 전부터 온 동네가 만두와 두부를 만들며 명절 준비를 했다. 방앗간이 없는 깊은 시골이었다. 가래떡을 하는 날짜가 잡히면 떡을 뽑는 기계가 멀리서 찾아왔다. 금방 시루에 찐 쌀에서는 구수한 김이 올라온다. 경운기 모터에 벨트를 걸어 돌리는 기계는 익은 쌀을 먹기 바쁘게 떡가래를 뱉어내기 시작한다. 주변에서 놀다가 떡 먹을 때를 정확하게 알고 달려온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엄지손가락만 하게 떡을 잘라주었다. 가난했던 산골에서 떡 뽑는 날은 특별한 날이다. 어른들은 일 년 중 몇 안되는 풍요로운 하루를 보내고, 아이들에게는 가장 신나는 날이었던 이날. 어머니는 여전히 고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머니는 방앗간 주인을 도와 허드렛일을 했다. 지금은 흔한 고무장갑도 끼지 못한 맨손으로 가래떡을 받아낸 광주리나 고무대야를 닦았다. 그렇게 온종일 방앗간 일을 돕는 것으로 가래떡 뽑은 삯을 대신했다.
뒤뜰의 야트막한 돌계단 위로 장독대가 있다. 산비탈 아래 터를 잡은 집이기에, 뒤뜰이라고 해봐야 뒤꼍과 산자락이 서로 자리다툼으로 한발씩 밀고 당겨 나오며 만들어 놓은 좁은 공간이다. 저녁밥 짓는 아궁이의 솔가지 타는 연기가 산으로 오르기 전에 먼저 들리는 곳이다. 한끼 거르는 것쯤은 일상이 되어 버린 그때, 자식들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어머니는 이곳을 분주하게 오르내렸다. 장독대는 어머니가 속마음을 내보이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고단한 삶에 지칠 때면 장독대에 올라 빈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오늘같이 하늘이 푸릇한 날이면 시린 햇살을 이고 장독대 항아리를 닦았다.
어머니는 헛간 옆에 작은 광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사흘 삯일을 해주고 나서야 장도리꾼 품앗을 얻었다. 광은 헛간과 부엌 사이 일년내 감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부엌 쪽 흙벽에 기둥을 덧대고 옹이가 박힌 널빤지를 겹으로 이어 바람을 막은 다소 보잘것없는 모양새였으나, 물건을 놓을 수 있게 시렁도 올리고 선반도 걸었다. 옹색한 찬장을 벗어난 부엌세간들과 마늘, 고추, 호박 등 요긴한 먹거리들이 가득 차길 바라는 맘으로 광을 만들었다. 각종 살림살이가 정리되어 있고 다음 해에 뿌릴 씨앗과 종자도 보관할 수 있는, 안살림의 중심이 되는 듬직한 곳간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광에 곡식이 채워 진 적은 거의 없었다. 도둑이 들지 않도록 광 단속을 하기 위해 사다 놓은 자물통은 단 한 번도 채워 보지 못했다. 변변한 살림살이가 없다 보니 광으로 들어올 것이 많지 않았다.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무색하게 시렁 아래에는 떡쌀을 받아본 지가 언제인지 모를,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시루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로 엎어져 있었다. 고사리와 홑잎 등 봄철에 말린 나물들이 섞인 채로 반쯤 부서져 소쿠리에 담겨 선반에 올려 있고, 새끼줄에 엮인 시래기는 허옇게 곰팡이가 피었다. 마시다 남은 됫병 짜리 선양 소주병이 김이 빠지지 않도록 비닐로 주둥이만 막힌 채 빈 궤짝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이른 봄에 심었어야 할 감자는 싸리채가 삐져나온 광주리 위에서 늙은 주인 손등보다 더 쭈그러든 채로 썩어갔다. 헛간에는 호미 몇 자루와 낫, 괭이 등 연장이 흙벽에 나란히 걸려 있다. 평생 밭에서 농사일하였던 어머니의 분신들이다.
자라면서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이 너무 많았다. 아니, 어른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한 적이 거의 없다. 내 삶에서 어머니는 늘 뒷순위였다. 언제 한 번 바깥에서 밥을 먹자고 몇 번씩이나 말해 놓고 그 약속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시골에 한 번 내려갈게요’ 하는 전화는 어머니를 마냥 기다림에 묶어 두었다. 대부분 바쁘다는 핑계로 내려가지 못한 것이다. 회사에 일이 많아지거나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기기 일쑤였다. 어머니와의 약속은 그리도 지키기 어려웠던 것인지. 그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있어도 차마 말하지 못했다. 멋쩍어 머뭇거리다 마음을 전할 기회를 자꾸 놓치게 된 것이다. 내 삶에 간절한 바람이었던 어머니의 건강이 무너질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왜 그토록 어머니에게는 말을 아끼고 살았는지. 그렇게 하지 못한 말들은 이제는 영원히 할 수 없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말을 아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말이 적어 잘 못 되는 것보다 말이 많아 탈이 나는 경우가 많다지만 할 말은 하며 살아야 한다. 꼭 해야 할 말을 아껴두거나 다음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때를 놓치면 그 말을 평생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아끼지 말아야 하는 말들이다.
'어마님가티 괴시리 업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