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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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이 살아 계실 때 모시고 나갔던 이북 5도청 행사에 내가 나간다. 내게 전화를 걸어 참여하라고 당부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인천상륙의 날, 흥남철수의 날, 거제도 방문의 날, 속초시민의 날, 호국보훈의 날, 총화단결의 날, 도민의 날, 유엔군 묘지 참배, 통일 전망대, 오도민 체육대회…. 변하지도 않은 얼굴들과 변하지도 않은 목소리들, 껴안고 싶은 사람들. 이런 일은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아버지는 가셨다.
“2045년은 분단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영종 박사가 건넨 말이다. 무엇으로 찔리는 통증이었다. 2045년이라는 단어와 분단 100주년이라는 단어가 가시처럼 예리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그렇지 않아도 이쪽이 옳다 저쪽이 옳다 하면서 어수선했다. 심상치 않았다.
북한학을 연구하는 것만으로 고마웠던 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앞섰다고 하네요. 세계에서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로 잘 산다고 해요.”
물건들이 좋고, 의료 시설이 좋고, 택배가 좋고, 먹거리가 좋고, 치안이 좋고, 화장실이 좋고… 비티에스, 블랙핑크, K팝, 골프, 드라마, 영화, 음식, 화장품….
가난 물리치고, 민주주의 쟁취하고, 아득한 전쟁과 혁명,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광장, 번쩍이는 전광판, 특별한 색상과 특별한 디자인의 빌딩들, 시집이 수만 권씩 출판된다. 아프리카에 우물도 파 준다.
박사님이나 필자나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밥이 없으면 라면을 끓여 먹지 왜 굶었냐? <국제시장> 영화를 본 아이들의 핀잔이다.
—따뜻했던 물이 거품을 내며 끓고 있다. 물이 끓는 줄도 모르고 눈을 감고 잠이 들면 안 돼, 이대로 가면 까무룩 끝장이 나, 실험실의 개구리가 되면 안 돼.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
그날 내게 ‘2045년’과 ‘분단 100주년’이라는 말을 터뜨려, 수선화가 부끄럽고 점심 약속을 부끄럽게 한 이영종 박사는 누구이며 그가 연구한 북한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찍어 보았다.
학과를 처음 개설한 곳은 동국대학교(1994년)였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전문 지식과, 통일을 연구하고 준비하자는 학문, 이에 동의하고 고려대학교에서도 개설했고 통일학부라고 부른다. 주체사상과 유일사상을 합법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 남북한의 교류 협력 및 통일, 안보를 연구, 궁극에는 평화 통일을 추구하는 학부. 2024년 통일안보대학원에서 정치 전문 대학원 내 북한학과를 운영한다… 존폐를 고민했다는 가슴 답답한 기록도 있었다.
필자는 북한에서 태어난 원주민이고, 1948년에 임진강을 넘어와 실향병을 앓는 탈북 1세대이다. 열한 살까지 살았던 그 땅이 하루도 가슴에서 사라진 날이 없다. 열한 살이 무얼 알까 하는 것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말이다. 완장 차고 장백산 줄기줄기를 부르며 학교에 가던 기억, 도끼와 낫을 든 젊은이들이 코가 큰 사람들을 내리치는 벽보, 기차 창문으로 별사탕을 던져 주던 로스께들, 밤하늘에 공포를 쏘며 곳간을 뒤지고 처녀들을 잡아갔던 무서운 기억들이 가슴 한구석에 얼룩으로 남아 있다. 삶아도 비벼도 빠지지 않는 감물처럼.
열한 살까지의 산과 들, 열한 살까지의 나무와 강물, 열한 살까지의 외갓집, 열한 살까지의 모든 것들, 서른한 해를 살았던 내 아버지의 형편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 한이 내게로 와 냉면도 함흥 냉면, 평양 냉면이 아니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분단 100주년. 그 말을 듣기 전에는 AI나 챗지피티만 심각한 줄 알았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분단 100주년은 실향민이나 앓는 향수병이려니 했다.
상품에도 없고 광고에도 없는 100주년이, 달려오고 있다. 신문 보고, 날씨 점검하고, 일정표 들여다보면서 오늘 점심 12시지? 커피는 어디에서? 수선화 꽃대가 올라오지 않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수선화를 알아보고 스마트폰을 또 들여다보는 일상이면 되는 줄 알았다.
사주의 이름을 몰랐던 신입 기자가 사주에게 온 전화를 마감 전이라고 끊어버렸다. 직통 전화가 오고 “지금 전화 받은 사투리 쓰는 년, 내 이름도 모르는 년, 당장 사표 쓰라고 하시오” 하는 소란이 있었다.
신입 여기자를 대신해 부장이 시말서 쓰고 반성문 쓰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고, 죽다가 살아났다. 죽을 뻔했다. 지금은 사주도 없고 사원도 없고 부장도 없는 때에 살고 있다.
“함경도 이겨라, 평안도 이겨라!”
효창공원에 나를 데리고 가셔서, 굵은 밧줄의 끝에 서서, 힘을 쓰게 한 아버지는 밤마다 술을 드시고야 잠이 드셨다. 실향민들이 앓고 있는 불면에는 핏줄과 핏줄이 맞붙어 통하는 피 외에는 약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아버지, 고향에 꼭 이장해 드리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믿고 벽제공원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혈육이라는 말, 고향이라는 말, 잃어버린 노래, 잃어버린 산과 들, 나무들…. 그 정답고 뜨거운 말이 사전에서도 사라지면 어쩌나? 아버지가 그러하셨듯 이북 5도청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껴안고 울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