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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눈길을 걸으며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노춘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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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제주도로 떠나는 날, 서울은 맑고 쾌청했지만 얼음장처럼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달포 전에 비행기티켓을 예약했었는데 갑작스런 기상이변으로 비행기가 뜨지 싶어 집을 출발하기 전에 공항에 확인했다. 공항은 더 이상 기상이 악화되지 않으면 정상 운항된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봉은사역에서 9호선 급행전철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활주로에는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 체크인하고 차 한 잔 마시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폭음소리를 내며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을 향해 이륙했다. 여행의 시작이다. 기대와 설렘이 시작된 것이다. 여행은 비행기 티켓과 호텔을 예약하면서 시작되지만, 가방에 짐을 싸면서 현실이 된다. 나는 비행기가 폭음소리와 함께 활주로를 비상할 때 비로소 일상을 떠나 새로운 일탈이 시작됐음을 실감한다.

육지와 달리 바다건너 제주도는 온통 순백의 설국이다. 공항 건물 한라산도 눈부시다. 공항에서 서귀포로 가는 산야와 길은 폭설에 묻혀 하얀 평야다. 한 시간이면 가는 리무진버스는 세 시간이나 엉금엉금 기어갔다. 갓길에는 미끄러진 차가 곳곳마다 즐비했다. 사람들

이 차에서 내려 차 뒤를 밀어보지만 헛바퀴만 돌뿐 옆길로 힘없이 미끄러진다. 폭설에는 별도리가 없다. 차를 운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눈길에는 대형버스나 기차를 타는 것이 그나마 차선이다.

어둑어둑해서야 호텔에 겨우 도착했다. 서귀포 하늘은 뻥 뚫려 밤새 폭설이 내렸다. 호텔 앞을 훤히 밝히는 가로등불빛에 여름밤 모여드는 하루살이처럼 눈발이 사방팔방에서 날아들었다. 눈은 하늘에서만 내리는 것이 아니다. 땅에서 솟구치는 눈도 있다.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회오리바람인지, 서귀포앞바다에서 솟구치는 바람 탓인지 알 수 없다. 경이롭고 신비롭다. 제주에 도착 전까지 폭설이 내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뜻밖에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버스에서 펑펑 쏟아지는 폭설을, 밤에는 가로등에 날아드는 하루살이처럼 방향 없이 날아드는 눈을 마음껏 보고 즐겼다.

여행은 계획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이다. 낯설고 물선 곳을 찾아가는 여행이 계획대로 된다면 우연이고 어쩌다 한두 번이다. 하루에도 햇볕 나다 눈비 내리고 비바람 부는 변덕스런 날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여행은 늘 흥미롭다. 여행을 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뜻밖의 만남과 인연이 되고, 특별한 경험과 견문을 통해 상상도 못할 꿈을 꾸기도 한다. 오늘이 그랬다. 예기치 못한 폭설로 상상도 못했던 백설을 눈부시도록 보고 즐겼다. 그렇다! 누군가에게 폭설은 힘듦과 고통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쁨과 행복을 거저 준다. 그래서 여행은 반전에 반전인 것이다.

둘째 날

서귀포 칠십 리 앞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눈바람 맞으며 올레 7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었다. 서귀포신도시 호텔에서 월드컵경기장 돔이 있는 아기자기한 마을 골목길을 한 시간쯤 걷다가 법환마을 근처 음식점에서 도세기국밥으로 이른 점심을 먹었다. 국밥 한 그릇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올레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눈바람은 등을 밀어줘 걷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간밤에 내린 폭설과 내리는 눈으로 올레길은 질퍽거렸고 미끄러웠다. 법환마을에서 서귀포여고를 지나 외돌개로 가는 바닷가와 마을길을 1시간쯤 눈길을 걷고 나니 신발과 양말이 흠뻑 물에 젖어 발목까지 시근거렸다. 외돌개 바로 직전에 있는 카페 ‘60beans’에 들렀다. 이 코스를 걸을 때마다 우리는 커피도 마시고 음악도 듣곤 했는데 오늘은 눈 내리는 풍경까지 덤으로 보게 되었다. 소나무장작이 훨훨 타는 벽난로에 젖은 양말과 신발을 말리며, 얼었던 몸을 녹이며 가까운 이들에게 카톡으로 제주소식을 전했다. 서귀포에 내려올 때마다 이 카페를 들러서인지, 이곳 여직원과는 낯도 익고 통성명도 나눠 이제는 안부도 주고받는다. 그녀는 아직 종교는 없지만, 종교를 갖게 된다면 세례를 받아 내 아내의 대녀가 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녀의 영세명을 미리 안젤라라 정해, 그녀를 볼 때마다 “안젤라!” 하고 불렀더니 그녀도 좋아라한다. 이 길을 걸으며 또 하나 덤으로 얻은 좋은 인연이요, 신앙의 딸이다.

셋째 날

어제 폭설에 쌓인 올레길을 장시간 걸어서 피곤해, 오늘아침은 느긋하게 늦잠을 잤다. 늦은 아점 후 한라산 중산간에 있는 사려니숲길을 아내와 걸었다. 서귀포시외터미널에서 승차해 한라산 성판악 다음 정거장인 교래 입구에서 하차한 후, 눈밭에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한라산 둘레길 따라 20여 분 걸어 사려니숲길 입구에 도착했다. 숲길 정문에서부터 반대편 출구인 붉은오름 입구까지 15km의 눈길을 5시간에 걷는 일정이었다. 탐방사무실에서는 아이젠과 스틱이 준비되지 않으면 아예 숲길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는 아이젠과 스틱 외에도 여분의 운동화 1켤레와 양말 4켤레와 우비와 먹고 마실 간식도 충분히 준비했다. 숲길에는 우리가 걷는 방향에도, 맞은편에서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하얀 눈밭과 눈을 짊어진 나무와 아내와 나 두 사람뿐이었다. 가끔 나뭇가지 위에 조용히 얹어있던 눈덩어리가 무게에 못 견뎌 떨어지는 소리가 우리를 놀라게 하곤 했다.

우리 부부는 제주도 여행할 때마다 이 숲길을 찾았고 지난여름에도 땀을 흠뻑 흘리며 걸었다. 여름이면 습하고 뜨거운 바닷가 올레길보다 시원하고 그늘이 있는 숲길을 걷는다. 한라산의 울창한 숲속에서 불어 오는 시원한 원시의 바람이 더위를 시켜주기 때문이다. 숲길엔 우리 부부 둘뿐이라서, 마음껏 백설의 숲속을 향해 소리칠 수 있고 음악도 큰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짙푸른 하늘을 보며 하얀 설원에 누워 인증사진도 몇 장 찍었다. 눈길을 걷는 아내의 뒷모습이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서너 살 어린아이 같다. 눈길 10km를 무거운 몸으로 뒤뚱뒤뚱 걸었으니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겠는가. 남자인 나도 말하지 않았지만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눈길을 걷는 것은 평시 길을 걷는 것보다 몇 배의 힘이 든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에 양말까지 물에 젖어 몇 차례 양말을 바꿔 신었지만 발가락마저 통통 불었다. 하지만 사려니숲길에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순백의 폭설을 밟으며 걸었던 기억은 우리 부부가 평생 살아가면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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