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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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강당 앞에는 꽃다발을 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나도 오랜만에 대학의 입학식 대열에 함께한다. 이어 귀여운 손주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간다. 대학교에 입학하는 사십 대 이상의 신입생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이의 표정은 비슷하다. 마치 꿈과 희망을 잔뜩 품은 새싹처럼 보인다. 생동하는 그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내 기운은 왜 이렇게 바닥으로 치닫는가.
생동하는 새싹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새로운 일을 준비하며 너무 몰두하여 기운을 소진했던가 보다. 어둑한 오늘 날씨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가. 떡가루 같은 눈이 소리 없이 내려 바닥을 희뿌옇게 덮고 있다. 거실 창을 열어 손을 내미니 손바닥에 눈이 닿자마자 흔적 없이 녹아버린다. 기운이 없다는 말은 거짓인지도 모른다. 내 몸에 열기가 있어 손바닥에 떨어진 눈송이가 이렇듯 바로 녹지 않는가. 눈송이는 점점이 물기를 남기며 사라진다. 떡가루 같은 미세한 눈송이가 ‘물기’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물기를 바라보며 깨우친다. 작디작은 눈송이도 이렇듯 발자취를 남기는데, 인간의 삶의 흔적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기운의 쇠락은 무모한 열정의 대가이다. 일의 결과가 어떻든 몸속 세포들은 심신으로 대변한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세상의 일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그 어떤 일도 이뤄지지 않으리라. 인간은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일을 잘 마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일이 뜻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어느 한 사람이라도 손해를 본 듯 느껴지면,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말리라. 더욱이 함께한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다 속풀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로 남으리라. 여하튼 누구에게나 조화롭게 조건을 맞춰 일을 마무리한다는 건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그 일을 시작할 때 선의로 이뤄진 일임을 잊지 말고, 미래를 도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리라.
요즘 입말로 자주 읊조리는 문구가 있다. ‘아무 일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명구이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 일도 안 한다면 방 안에 ‘가마니’로 박혀 있어야만 한다.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일을 추진하는 건 쉽지 않은 일. 무엇보다 시행착오도 예측해야만 하리라. 실수나 실패가 두려우면, 빈틈없이 준비해야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것을 간과하고 열정만 가지고 무모하게 질주한다면 결과는 장담하지 못한다.
기운 소진은 열정을 남발한 탓도 있다. 무엇보다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유영만 작가는 ‘역경이란 내가 상상하고 준비한 환경이 아니라, 순진한 의도와 노력이 비참하게 무산되는 의외다’라고 어느 책에선가 적었다. 의외의 변수가 ‘내가 준비한 환경이 아니다’란 문장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무엇보다 ‘비참하게 무산되는 의외’란 결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터다. 애초에 생각했던 결과를 끌어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기분이 바닥까지 처진 것이다.
‘기분이 바닥이다.’ 워드(백지)에 마음의 상태를 한 자씩 느리게 적는다. 참으로 ‘종이 위는 때때로 지구보다 넓다’, SSP(신생지 펄프상사)의 2009년 포스터에 쓰인 카피와 맞물린다. 넓은 백지 위에 현재의 감정을 풀어놓고, 망망대해에 홀로 떨어진 듯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현상을 파악하듯 의문의 꼬리를 무니, 문제점도 발견하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도 된다. 문자로 기록한 글을 다시 읽으며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트이는 듯하다.
시선의 초점은 백지, A4 용지 반절의 수준이다. 백지 위에 무언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니 두 손은 자연스럽게 컴퓨터 자판을 달린다. 그 위에 많은 생각과 심정을 펼쳐 놓는다. 지금껏 나의 삶과 철학, 문화 등을 이십 년 넘도록 적었다. 이미 백지에 쓰인 문자를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내가 쓰지 못할 서사는 없다. 어디 그뿐이랴. 백지는 감성 작용에도 유용하여 인간의 마음을 달래준다. 마음의 정화 및 치유 역할을 톡톡히 한다. 어찌 보면, 백지는 문제 해결사, 품이 참으로 넓다. ‘종이 위는 때때로 지구보다 넓다.’ 아니 ‘우주’보다 넓다. 어머니의 품처럼 자비롭고 포용력이 있다.
바닥은 정녕 바닥이 아니다. 정호승 시인은 「바닥에 대하여」란 시에서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라고 읊고 있다. 지금 내 마음은 백지 위에 있다. ‘내가 과연 삼월의 싹을 올릴 수나 있을까?’라고 필사하듯 꾹꾹 눌러 적으며 의문을 거둔다. 바보 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머지않아 순리대로 동토에서 새싹을 보여주리라. 생명력이 강한 싹은 이미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무엇을 머뭇거리는가.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