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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게으름

한국문인협회 로고 백선욱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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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날의 공기는 나른하다. 창문을 열면 따스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포근하게 어깨를 감싼다. 살랑이는 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먼지 냄새와 흙내음이 뒤섞여 코끝을 간질인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찾아오는 이 느슨한 순간들, 이런 날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지는 순간이다. 몸을 소파 깊숙이 묻고 눈을 감으면, 시간은 더디게 흐르며 나를 품는다. 게으름이 이토록 달콤한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이 순간을 오래도록 머금고 싶다.
고대 철학자들은 휴식과 여유를 삶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희와 휴식 없는 삶은 인간답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 단순히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유하고 즐길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고 보았다. 로마 시대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창조적인 영감이 피어난다’고 했으며, 동양에서도 노자의 무위(無爲) 사상은 억지로 애쓰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태도의 가치를 강조했다. 결국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쉼’은 단순한 나태가 아니라 더 깊은 깨달음과 창조성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이탈리아에는 “Il dolce far niente”, 즉 ‘달콤한 무위(無爲)’라는 말이 있다. 무엇도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상태. 젊은 날엔 그저 게으름으로 보였던 이 시간이, 이제는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가장 완벽한 순간으로 다가온다. 바쁜 일상과 부지런한 날들을 지나, 어느덧 인생의 중반을 넘어 노년을 향해 가는 지금, 나는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가장 소중한 것은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늘 생산성을 강요받는다.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하고, 끊임없이 성취해야 하며, 짧은 휴식마저도 의미 있는 활동으로 채워야 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인간을 기계처럼 소진시킬 뿐,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앗아간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야말로 삶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철학자 세네카는 ‘한가한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내면을 풍요롭게 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가 숨을 고르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아닐까.
산업 혁명 이후 노동 중심의 가치가 자리 잡으며, 인간은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 속에서는 여전히 ‘쉼’의 가치를 찬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우리는 단순하게 살며 자연의 리듬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되새기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았다. 이처럼 위대한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은 쉼과 여유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을 발견해 왔다.
심리학에서도 ‘멍 때리기’가 창의력을 증진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중요한 활동임이 밝혀졌다. 신경과학자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가 활성화된다고 설명한다. 이는 오히려 무의식적인 사고를 촉진하여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끊임없는 생산성과 효율성에 맞서,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더 깊이 있는 사고와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일 수 있다.
햇살이 살며시 눈꺼풀을 어루만진다. 졸음이 스르르 밀려오고, 몸은 무거워지며 의식이 몽글몽글 풀어진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천천히, 충분히 즐긴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지나온 날들을 되새기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모든 것이 쉼 없이 변화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요한 정적 속에 머문다.
일본의 ‘이키가이(生き甲斐)’, 프랑스의 ‘조아 드 비브르(Joie de vivre)’, 그리고 한국의 ‘한가로움’ 역시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화권마다 휴식과 여유를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씩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흐르는 구름을 따라가도 좋고, 한동안 펼쳐보지 못한 책의 페이지를 넘겨도 좋다. 음악을 들으며 차 한 잔을 음미하는 것도, 그냥 조용히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괜찮다.
한가함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 한가로운 순간이 찾아오면 그것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말자. 그 순간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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