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7
0
내가 운이 따라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인도네시아에서 신사복 회사를 경영하는 고향 친구의 초청으로, 그것도 왕복으로 안락한 비즈니스 좌석까지 마련해 준 2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인천공항에 폭설이 내려 7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운이 따라준 건지 비행기는 무사히 이륙했다.
7시간가량 비행해 내린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는 무더운 열대기후였다. 마중 나온 친구의 승용차를 타고 자카르타를 벗어나 친구 회사가 있는 반둥으로 달렸다. 좁은 도로가 빼곡히 메운 차가 밀리고, 위험천만한 오토바이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달려 운 좋게 사고가 없었다. 신호등이 없어 가로지를 때 수신호를 하는 ‘빡 오가’가 신기했다.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정직한 행동에 가히 놀랐다. 필름처럼 지나가는 낡은 집들과 남루한 옷차림의 풍광은 기억 속의 70년대 풍경을 반추하고 있었다. 되감기 영화를 보듯 펼쳐지는 반추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여서 머잖아 도약할 수 있는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반추는 사전에서 ‘지나간 일을 되풀이하여 기억하고 음미함’이라 정의하고 있다.
깊고 넓게 퇴적된 유년의 아릿한 기억, 정체성이 머문 애착의 장소를 자주 반추한다. 추억의 필름이 반추되어 행복한 상념에 잠길 때가 많다. 고향 집 뒷동산에 진달래가 피어 있던, 향촌의 아리랑은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서정적 몽환의 이미지가 보이기 시작하면, 황홀한 풍광에 머릿속 뉴런이 반응한다. 그런 마음의 고향 울진은 친구와 나의 영혼을 묻은 장소다. 애틋한 그곳에 삭지 않는 내 오랜 기억이 기다리고 있다.
친구와 나는 1970년대 산업화 벽두를 이루기 전에 가난의 통증에 시달리며 자랐다. 유년 언저리를 보낸 향촌인 왕피천은 어느 왕이 피난 온 전설이 있는 은둔의 땅이다. 물려온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고뇌하면서도 ‘잘살아 보자’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두메산골에서 20여 리를 통학하면서 강한 호연지기를 길렀다. 사나운 산짐승이 웅거하는 험준한 두메의 무시무시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친구는 깊은 산속에서 11명 식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 진학은 포기하고 조부로부터 3년간 배운 한문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대기만성을 위해 고향을 도망쳐 나온 친구는 양복점에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대기업 간부와 일본과 인도네시아 지사장, 일본인 투자자와 신사복 전문 회사를 설립해 최고의 경지로 성장했다.
친구의 공장이 있는 인도네시아 옛 수도였던 반둥 곳곳에는 꽃들이 그립게 피어 있었다. 바람에 몸을 맡겨 그저 흔들리고 있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 있으면 고향 집 뒷산에 만개한 진달래가 반추되어서 안기고 싶었다. 몽환적일 것만 같으나 가까이 가서 보면 잎이었다. 잎이 꽃처럼 아름답게 자라고 있으면 그게 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300여 종족이 있어 성격과 얼굴 모습도 다양하고 달라 얼굴 전시회를 여는 듯했다.
숙소의 정원에는 길손을 환영이라도 하듯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산골 아이 유년의 풍경화가 새소리와 함께 필름처럼 반추되었다. 무엇이 이리로 눈물 나게 하는 걸까. 이유를 아는지 히잡 쓴 여종업원이 나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새들이 떠난 시간이 되자 3,600여 종업원들이 무더기로 퇴근했다. 이제 분주한 공장은 어둠만 덩그렇게 남았다. 다음 날 새벽부터 숙소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공장에는 87%가 이슬람교 상징인 히잡을 쓴 종업원들이 출근하느라 혼잡을 이루었다. 행진하는 군병처럼 줄지어 선 공장에서 개미처럼 일사불란하게 바삐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70년대 번창했던 섬유회사 여공의 모습이 반추되었다.
정상, 최고급, 정성을 마중물로 개미처럼 손과 재봉틀로 바느질했다. 신사복을 지을 천 조각에 예술품을 만드는 천사의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쩌면 가난을 누르고 헌신했을 우리의 토포필리아(Topophilia) 족보를 베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에서 익힌 친구의 인문학 경영철학이 종업원들을 신바람 나게 했다. 100대 1의 인사 경쟁률과 복지경영은 세계 일류 회사의 마중물이었다. 4개 공장에서 3,600여 종업원이 만든 신사복은 일본과 한국의 유수 메이커가 전량 주문 물량이다.
식사 때가 되면 친구와 나는 나시고랭(볶음밥), 사테(꼬치구이), 렌딩(소고기 카레) 등으로 만찬을 했다. 여기에 술잔을 주고받으며 우정 놀이를 했다.
친구의 얼굴에서 반추되는 내 유년의 풍경화를 보았다. 그것은 가난의 잔해가 묻어 있는, 바지랑이를 걸어도 되는 두메산골을 더듬고 있었다. 단단해지기 위해 상처를 껴안은 채 몸부림쳤던 16살 이전의 동화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잠잠했던 우리의 우정은 나이를 먹지 않는, 변함 속에 변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머나먼 추억의 이야기를 돌고 돌아 친구가 일류 신사복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된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것은 온통 개천에서 용이 난 동화 같은 성공담이었다. 우정으로 점철된 얼굴은 푸념이 없었다. 말이 꼬여도 웃고, 말을 수선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얼버무려도 그래, 그래 거들면서 잘도 통했다. 동심으로 소통하고, 감성과 영혼의 언어로 소통하고, 경청으로 소통한 시간이었다.
귀국하는 길, 우기의 비가 내리더니 이내 개었다. 그리고 무지개가 떴다. 나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품고 있는 풍경조차도 유년의 1970년대를 반추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멀리서 보면 언뜻 아름답고 거대한 섬이지만 실제로 가 보니 가난의 시련을 겪고 있었다. 한반도의 8.6배, 인구 2억 8천으로 세계 4위, 인당 GNP 5천 달러인 인도네시아는 곧 자원과 인력을 마중물로, 우리의 경제 모델을 반추해 부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그때도 친구와 내가 나눈 우정 놀이를 계속하며 걷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