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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과 국밥

한국문인협회 로고 주미경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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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전통시장의 활기찬 모습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발을 멈춰 서게 했다. 입담 좋은 생선가게 아저씨가 정겹고, 깨 볶는 기름가게의 고소한 참기름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국수 한 그릇에 허기를 달래기 위해 줄지어 선 사람들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국수가게 앞에서 간판을 보며, 국수 먹을 생각을 접었다. 배는 고팠지만, 다른 곳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시장 곳곳을 둘러보면 마주하게 되는 상인들의 몸짓과 표정이 긴 세월의 흔적을 남겼다. 주름진 얼굴과 굽은 손가락에 남은 흔적들은 보는 나의 마음을 짠하게 하였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외길 인생을 살아온 할머니의 손이 눈에 띄었다. 닳아 뭉툭해진 칼날에 도라지가 허물을 벗고, 새하얀 자태를 드러냈다. 깨끗이 다듬어 깐 도라지 한 바구니가 시장통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검정 봉지에 도라지를 넉넉히 담아주는 할머니의 마음이 친정어머니 모습 같아서 마음이 뭉클하였다. 양손 가득 할머니의 정을 담아 장을 보고 돌아서려니, 소머리국밥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내 기억 속에 가물가물 남아 있는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참 마음 따뜻했던 할머니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굽은 허리와 손가락 마디는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마음이 두근거렸다. 나는 마음이 공허하고 힘들 때, 강남에 있는 고속버스터미널을 간다.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매표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표정도 보았다. 평일이지만 터미널은 늘 많은 인파로 복잡했다. 매표소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의 뒤에 나도 줄을 서서 어디로 갈지 생각했다. 줄이 점점 줄어들 때마다 고민이 되었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순서가 되자 얼떨결에 충북 제천표를 구매하고 탑승구를 향해 갔다. 그리고 제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연고지는 없지만, 지금은 성인이 된 아들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천에서 생활하며,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이 고향인 나는 아들 덕에 지방을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두 시간 반을 달려 제천 터미널에 도착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터미널에서 나와 큰길을 따라 걷던 중,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할머니와 마주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머리 위에 이고 있는 큰 짐과 양손에 든 짐이 매우 무거워 보였다. 할머니의 쪽진 은빛 머리가 누런 보자기 짐에 짓눌려 납작하게 보였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 앞으로 다가선 나는 양손에 들고 있는 짐을 받아 도와드리려고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낯선 내가 부담스러운지 손사래를 쳤다. 나의 고집과 오지랖은 끝까지 할머니 뒤를 따라가며 설득했다. 귀찮게 따라오는 나를 외면 못 하고, 할머니는 가던 발길을 멈추었다. 할머니 양팔에 무겁게 매달려 가던 두 개의 보따리는 내 차지가 되었다. 가장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할머니는 앞서서 걸음을 재촉하였다. 굽은 허리와 굵어진 손가락 마디를 보니, 할머니의 고단한 삶이 느껴졌다. 굽은 허리는 무거운 짐에 눌려 더 휘어져 보였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 걸어가니 많은 사람이 보였다. 할머니와 함께 도착한 장소는 제천 중앙시장에 크게 열리는 오일장이었다. 많은 사람이 북적였다. 각종 싱싱한 채소와 과일, 생선 등 볼거리, 먹을거리가 다양했다. 물건을 진열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손놀림이 매우 바빠 보였다. 중간쯤 갔을 때, 할머니 짐을 풀 적당한 장소가 남아 있었다. 나는 할머니 짐을 바닥에 조심조심 내려놓고, 짐을 푸는 할머니께 인사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이 물건을 고르고, 바구니에 담느라 좁은 길이 걷기조차 힘들었다. 곳곳에 물건을 사는 손님과 상인의 흥정하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남은 채소를 헐값에 주며, 호박 한 덩어리 덤을 주는 모습이 왜 그리 정겹던지 나도 빙그레 웃음 지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손님의 미소가 참 아름다웠다. 인생의 소풍길이 이런 모습일까?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의 물건은 모두가 정이 가득 차 있어서 몇 배로 싱싱해 보였다. 복잡한 시장을 천천히 구경하며, 사람들 뒤를 따라 걸었다. 사고 싶은 싱싱한 채소, 과일도 많았지만, 경기도 부천의 우리 집으로 가져갈 수 없어서 구경만 하였다. 한참 돌아다니다 짐을 내려드린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팔려는 욕심에 열심히 큰 소리로 물건을 사라고 외치지만 막상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낡은 종이에 가격만 덩그러니 써서 물건 위에 놓았다. 채소를 진열한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할머니의 채소는 바구니 가득 담겨 있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의 오지랖은 할머니 곁에 쭈그리고 앉아 큰 소리로 “우리 어머니께서 정성껏 키운 싱싱한 채소를 구경하고 가세요. 값도 싸고 아주 싱싱합니다.” 외쳤다.
할머니는 내심 놀란 듯, 말없이 소리치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에 지나치는 아저씨, 아주머니는 오이며, 당근 각종 채소를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아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갔다. 이유는 가격을 깎아 주기도 했지만, 할머니 허락을 받아 덤을 주기도 하였다. 흥정 속에 후한 인심이 오히려 주변으로 퍼져 할머니의 그 많던 채소가 순식간에 다 팔렸다. 빈 보자기를 탁탁 터는 할머니 곁에서 나도 함께 주변 정리를 하였다. 정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속버스터미널을 향해 가려는데, 할머니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오일장 음식 중 맛있다고 소문난 장터 국밥집이었다. 국밥집은 많은 사람으로 빈자리가 별로 없었다. 다행히 나와 할머니는 가게 안 구석진 자리에 앉게 되었다. 뜨끈한 국밥이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속이 시원했다. 내 앞에 국밥 그릇을 먼저 밀어주던 할머니의 굽은 손가락이 뇌리에 남아 추억이 되었다. 그때 먹은 국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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