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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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내가 당신한테 말하지 않았던 게 있는데….”
산책하러 나갈 차림으로 서 있던 남편이 지금이 말해야 할 때라고 결심이라도 한 듯 차분하게 입을 뗐다. 꽤 진지한 얘기라도 하려나 싶어 조금은 긴장이 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난 십 년간 봐 왔던 삼색 고양이가 있었는데, 걔가 1월 초에 죽었어.”
역시 화제는 고양이다. 다른 일 아니고 고양이여서 안도는 됐으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라니…. 이이가 아직도 고양이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머지 얘기를 듣기도 전에 나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고양이들에 집착하는 것이며 결국 고양이들 때문에 아내도 뒷전이라는 질투 아닌 분노가 치밀었다.
무슨 감정이 내게 솟구치든 간에, 아랑곳할 것 없이 그는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듯,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결국, 고양이 두 마리에 대한 보고이다. 그가 10년간 봐 온 비교적 장수한 한 마리는 검정, 노랑, 흰색의 삼색 길고양이다. 심한 구내염으로 마지막엔 먹지도 못하다가 갔다. 남편이 동물병원에 데려가 치료해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죽은 고양이는 묻을 수도 없으니, 남편은 동물병원에 부탁하여 화장하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리고 걔와 함께 같이 돌보던 다섯 살 정도의 노랑이는 비실비실 먹지를 못하고 지난해 봄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
남편이 사랑하던 반려견,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로 인해 이렇게 갈등이 내 노후의 현재진행형 현안이 될 줄은 몰랐다. 6·25 피난 중에도 개를 데리고 피난 갔다는 그의 집안 얘기를 듣고부터 그 가족의 동물 사랑 DNA를 짐작은 했다. 그리고 그가 동물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인 것을 나는 실제로 안다. 남편은 살생이라며 낚시도 싫어하고 생선도 잘 안 먹으려 한다. 우리와 열여섯 해를 함께 살았던 시추견 ‘하니’를 훈련하지 않았던 이유가 삼청대 같은 비인간적인 훈련소에 보내기 싫어서였다고 했다. 하니가 힘겹게 눈을 감고 나자 우리는 절에서 천도재를 지내 주었다. 남편은 직접 쓴 편지를 눈물로 읽은 뒤 불사르며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축원을 해 주었다.
하니가 간 뒤 우리는 애완견을 다시 키운다는 생각은 접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동네 길고양이들에 관심을 두고 살피는 일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름대로 동네와 가까운 공원을 오가는 고양이들을 먹이고 살피게 되었다. 삼색 고양이는 다른 동네 공원에서 우리 동네 공원으로 이주해 온 고양이었다. 고양이들도 남편의 냄새와 행선지를 아는지 주차장의 우리 차 근처나 드나드는 현관 쪽에 자주 모여 있는 일이 잦았다.
그가 이번에 나 몰래 혼자 했던 일을 끝까지 숨기지 않고 내게 알려 줬다는 것이 사실 감사하기는 하였다. 인간이 동물에게 베풀 수 있는 지극한 생명 사랑에 무슨 잘못됨이 있겠는가. 하지만 홀로 사는 노인도 아닌 그가 아내를 따돌린 소행을 잘한 일이라고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고양이들과 대화를 하며 아내를 그 틈 사이에 넣지 않고 그들만의 세계 밖으로 소외시키고 있다는 데 내가 몹시 화가 났다는 것을 이번엔 어떻게 하든 알리고 싶었다. 나는 베란다의 커튼을 확 소리 나게 걷고 베란다 바닥이 쿵쿵 울리게 소리 내어 왔다 갔다 걸으며 가슴속의 열기를 뱉어내었다. 베란다와 거실 사이의 중문을 소리가 나게 열어젖혔다가 쾅, 내팽개치듯 닫았다.
입 안에서 한마디가 맴돈다.
‘아이 답답이. 왜 말 안 하고 혼자 그러고 살아. 언제까지 그럴 거야?’
내 맘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변명한다. 확신하는 말투다.
“당신이 고양이 싫어하잖아!”
내가 반격한다. 나 역시 확신의 말투다.
“누가 그래, 내가 고양이 싫어한다고?”
나는 이참에 마음속에서 하고 싶던 말들을 쏟아 놓는다.
“내가 왜 고양이를 싫어해? 내가 싫어하는 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당신이 나 모르게 고양이들을 만나고 내게 숨기면서 걔네들을 돌보는 당신의 방식이 싫은 거지. 더 이상 길고양이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 했던 것이 벌써 몇 번째인데,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당신의 길고양이 사랑에 내가 지친 거지.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이라고 동네에서 얼굴이 알려지자, 당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사내로부터 목을 잡히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고, 그 일 이후 이젠 손을 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뒤에도 계속해서 그 아이들 사료를 사서 차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나 몰래 먹이를 주더니, 아직도입니까?”
산책하러 나갔던 그가 일찍 돌아왔다. 손에 쥔 디카페인 커피 한 잔을 내민다. 아, 긴 산책이 아니라 아파트 후문 근처에 있는 동네 카페에 가서 바로 사 들고 온 모양이다. 평소 산책을 혼자 다니는 남편이 가끔 사 들고 오는 커피나 케이크를 나는 정(情)의 표로 반긴다. 배려하는 것이 고마워서다. 그 마음을 담아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그래, 이런 게 가족이지! 같이 사는 가족을 소외시키는 게 무슨 가족이냐?”
나의 어투에서 화해를 감지한 듯 그만 꽥꽥거리라, 남편은 가볍게 한마디를 남기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자기만의 휴식 공간인 침대에서 쉬겠다는 뜻이다. 거기는 그가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접하고 세상과 대화하는 곳이며 고양이들을 자유롭게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아, 힘들다. 가족 노릇. 얼마든지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데, 어렵게 꼬이면, 한참을, 아니 여생을 헤맬 수도 있는 그런 게 가족 노릇이 아닌가 싶다. 남편에게 더 이상의 비밀이 없으면 좋겠다. 결국 다 말하고 말 것, 처음부터 공유하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