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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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 아들 내외와 함께 캘리포니아 북서부 여행 셋째 날을 맞았다. 오래곤주 유진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모텔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태평양을 끼고 플로렌스 주립공원을 향해 101번 고속도로를 달렸다. 도중 바다사자가 산다는 해식 동굴에 들렀다. 그런데 바다사자는 한 마리도 없고, 시원스레 펼쳐진 수평선과 해안 절경이 바다사자를 대신하여 기쁨을 주었다.
상대적으로 기념품 가게는 만원이었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진열장 안에서 새 한 마리가 눈길을 끌었다. 이는 내 두 번째 수필집에도 등장했던 펠리컨이다. 가격표를 보니 36.95불이다. 너무 비싸다 싶어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런데 한 바퀴를 돌아도 다른 것은 눈에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조그마한 나뭇등걸에 두 발을 딛고 서서 목을 길게 빼고 몸통만큼 큰 입을 딱 벌려 하늘을 우러른 모습만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다시 펠리컨 앞으로 갔다. 마침 아들도 거기 있었다. 아들에게 “나 이거 맘에 드는데!” 했더니 “그럼 사세요” 하기에, 좀처럼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사지 않던 내가 거금을 들여 바닷새를 모셔왔다.
함께 태평양을 건너온 펠리컨은 지금도 내 책장 앞에서 기도 중이다. 무엇을 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배고파 먹이를 구하는 외침은 아닌 듯하다. 하기야 생존에 필요한 것이 어찌 먹이뿐이겠는가. 짝을 잃은 외로움도 있겠고, 어미가 자식을 떼어 놓아야 하는 아픔도 있겠지. 만만찮은 세상사가 어찌 저에겐들 비켜가겠는가.
내게도 만만찮은 세상사가 나를 단련시키던 때가 있었다. 지아비는 새처럼 둥지를 떠났고, 나는 섬에서 시집살이로 연명하고 있었다. 기술이라고는 밥 하는 기술밖에 없으니 앞날이 캄캄했다. 동물의 세계에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냥하는 법을 배워야 하듯, 나도 무엇인가 살길을 찾아야 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던가? 때마침 인천에서 자취하며 학교 다니던 친척 조카가 있었다. 단칸방을 함께 쓰며 밥과 빨래를 해주기로 하고, 따라가겠다고 울며불며 떼쓰는 어린 아들을 할머니께 맡겨 놓고 쌀 한 말 들고 더부살이를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육 개월 속성 과정으로 양재 학원을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기술자로 취직은 되었으나 경험 부족으로 실수하기 일쑤였다. 비빌 언덕조차 없는 몸. 암흑 같은 미래는 하늘의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슬픔. 그 막막함. 그렇게 양장점을 전전하고, 때로는 재단대에서 쪽잠을 자며 기술을 익혔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나의 간절한 소망은 오직 방 한 칸이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기까지는 숱한 고생과 시련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던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아들도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
기도하는 펠리컨이 마음을 끈 것은 아마도 내 젊은 날을 보는 듯해서일 것이다. 그가 마음에 들어 사 오기는 했지만, 벌겋게 충혈된 눈을 보면 애처롭기도 하다. 무엇이 그리 간절할까? 눈에서는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다.
그래도 그의 모습은 참으로 우아하다. 흠이라면 몸통만큼 큰 입을 가졌다는 것이지만, 그 큰 입만큼 소망도 간절해 보인다. 입과 배는 갈색이고, 목은 흰색, 등과 날개와 다리는 옅은 회색이다. 크기는 약 15센티 남짓이다. 비록 숨 쉬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날아갈세라 가만히 만져보면 온기가 느껴진다. 부드럽기도 깃털 같다. 수지를 특수 가공 처리해 만들었다는데 얼마나 정교한지 살아 있는 듯하다. 만든 이의 사진과 사인과 배지, 설명서까지 달아 놓은 것을 보아 제법 이름난 조각가의 작품인 듯하다.
생각해 보니 펠리컨이 내게 온 것은 아마도 기도가 부족한 나를 깨우치려는 뜻이 아닌가 싶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하신 하나님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 새 가정을 꾸린 손자와 손부, 손녀를 위해 열심히 문을 두드려야 할까 보다. 더불어 평온한 오늘을 주심에도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