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5
0
페이스북을 한 지도 이제 10년이 넘었다. 휴대폰을 들어 가만히 페이스북을 연다. 며칠 전 스크린샷해 놓은 사성암 사진들이 확 눈에 들어온다. 섬진강과 지리산을 함께 담기 위해서 올린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재작년 여름, 정확히는 8월 1일에 아내와 둘이 구례 여행을 떠났다. 직장생활 40여 년 동안 8월 초 여름휴가는 처음이었다. 전혀 사전 준비도 없이 일만 하다 몸만 따라가는 그런 생활은 여전했기에, 이번에도 아내에게는 너무 미안하기만 했다.
구례에 간 김에 화엄사, 운조루, 천은사, 지리산 성삼재, 그리고 사성암에 갈 수 있었고, 또 하동 쌍계사와 벚꽃길을 거쳐 화개장터 지나 더 멀리 박경리문학관까지 갈 수 있었다. 많이 알고 사진으로만 보고 들어 거의 알고 있는 곳들을 확인하며 찾아볼 수 있었으니 짧기만 한 2박 여행이 너무 행복하기만 하였다.
숙소에서 사성암까지는 제법 길이 멀었고, 섬진강을 끼고 계속 지나치는 진초록 벚꽃길은 그래도 드라이브길의 운치를 한층 더해 주었다. 사성암 가는 길을 묻고 또 물어 셔틀버스가 있다는 것도 가까이 가서야 알았다. 큰 주차장에서 암자 아랫길은 운전도 하지 않는 내가 싫어하는 좁은 도로였지만, 바로 아래 중간 휴게점에서 쉬겠다는 아내를 뒤로하고 나무지팡이를 빌려 의지하면서 사성암으로 향했다.
사성암은 구례 화엄사의 말사로 백제 성왕 때인 544년 연기조사가 자라 모양의 오산(鰲山)의 정상에 세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오산암이라고 하였다가 불교를 전파하고 중흥시킨 원효, 의상, 진각, 도선 등 고승들이 수행을 하며 기도처로 삼은 곳이라 하여 이후 사성암(四聖庵)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보기엔 조그만 암자인 줄 알았는데 위로 올라가 보니 생각보다 넓은 마당이 있고 안팎으로 전각들이 여럿 있는 아기자기한 절이었다. 십수 년 전 처음 가 템플스테이까지 했던 해인사 고불암도 실제 보니 웬만한 절만큼 규모가 커 놀란 것처럼….
갑자기 선글라스에 밀짚모자를 쓴 이가 나를 부른다. 이 더운 날, 이 높은 곳에서 방문객도 몇 명 없는데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너무나 반가웠다. 20년 전쯤 같은 직장에서 함께했던 동료 L이었다. 서울에 살면서 여름휴가차 전주 처갓집에 와 처제랑 사성암에 왔고, 벌써 몇 년째 온다고 한다.
30미터쯤 되어 보이는 절벽 난간에 멋진 주련들이 있는 법당과 전각들이 매달린 듯하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초록빛 담쟁이들까지도 아름답기만 하다. 동료 L이 이끄는 대로 먼저 사성암의 약사전을 들여다본다.
“잘 들여다보셔요. 유리 위로 부처님 보이시죠?”
약사전은 유리광전이라고 부르는데, 법당에 따로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절벽에 음각되어 있는 약사여래 부처님을 유리를 통해 볼 수 있는 구조로 배치해 모시고 있다고 한다. 고승 원효대사가 참선을 하면서 벽에다 손톱으로 약사여래 부처님을 그렸다는 말도 전해 준다.
법당을 나와 왼쪽 계단을 따라 올라간 오산의 산정 북쪽에는 산왕각이란 산신각이 있고, 그 왼편 양쪽 바위 사이로 도선국사가 수도했다고 하는 도선굴이 있다. 한 사람이 겨우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만큼 좁지만 안에 켜 놓은 촛불이 엄숙하기만 하다. 도선굴을 지나니 멀리 또 가까이 지리산 노고단과 구례 화엄사, 그리고 구례 읍내, 섬진강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 섬진강!
지리산 화엄사에서 발원한 작은 물줄기는 섬진강이 되어 합쳐지고 구례 읍내를 관통해 지나간다. 큰 산과 큰 강이 그대로 어우러져 말로만 듣던 명당 같은 풍광을 보여준다. 70리 두꺼비 섬진강 물은 다시 화개장터로 유명한 하동을 지나 백사장터를 만들어 줌으로써 이곳 특산물인 재첩들을 자라게 하고, 남해안으로 흘러가는 어머니 같은 물길이다. 마치 인도차이나반도의 메콩강 물길이 그러한 것처럼….
다시 왼편 지장전 가는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중턱에 수령 800년 됐다는 오래된 귀목나무가 있고, 좀 더 올라가면 부채 모양의 편평 바위가 눈에 띈다. 바로 소원바위이다. 그 옛날 하동으로 뗏목을 팔러 간 남편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아내와 아내 잃은 슬픔에 끝내 숨을 거둔 남편의 애절한 전설이 깃들어 있는 바위라고 한다. 사성암은 특히 기도발이 잘 받는다고 입소문이 난 절로 유명하다. 영험하다는 소문들이 전해지기에 삶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마음을 의지하는 기도처로, 간절함을 가슴에 담고 이곳 소원바위를 찾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 옛날 고승들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위안을 얻고 또 마음에 평정심을 얻고 갔을까?
찌는 듯한 8월 초의 태양은 대지를 이글이글 타오르게 하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사성암은 무엇보다 구례를 처음 찾게 했다. 그리고 땀 흘리며 힘들게 올라온 나에게 최고의 시원함을 주는 바람, 녹음 짙은 지리산과 그 아래로 흘러가는 섬진강 등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빼어난 풍광을 아낌없이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더불어 오랜만에 옛 동료까지 만나게 해 주는 소중한 인연의 기쁨도 주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소원바위는 어느 정도 소원을 들어준 것이지만, 그래도 욕심을 내어 몇 가지를 속으로 빌어보았다.
‘우리 가족들이 건강하고 평안하도록 지켜 주셔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맘먹은 대로 잘 되게 해 주시기를….’
절을 내려가기 전 동료 L과 다시 사성암 마당에 서서 기념샷을 한다. 그리고 눈앞에 크게 펼쳐진 산 아래 세상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본다. 또한 지금까지 살아온 나를 생각하고 반성해 본다. 마음을 열고 아직은 부지런하게 살아야 하는데…. 문득, 고승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생각이 난다. 그 뜻을 다시 새겨 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욕심이 과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바람이 너무 컸는지도 모르겠다. 대기만성이라고들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