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5
0
인생을 백 년 산다 해도 억겁의 세월에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일 뿐이다.
“뒤돌아갈 수는 없어도 뒤돌아볼 수는 있다”는 말이 있다. 내 나이 벌써 여든이 넘었다. 옛날 같으면 죽어 산에 있을 나이다. 이 나이에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나이 칠십이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같고, 나이 팔십이면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같고, 나이 구십이면 집에 있으나 산(죽음)에 있으나 같다.”
옛날에는 예사로 들었는데 최근 나이가 들고 경험해 보니 누가 지어낸 것인지 모르지만 일리 있는, 실감 나는 말이다.
오늘 이 시간은 지난날을 뒤돌아보면서 좋았던 추억(자랑)을 따라 잠시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옛말에 자식 자랑은 반 미치광이요, 자기 자랑은 온 미치광이라는 말이 있다. 석양을 진 이 나이에 자기자랑한다고 시비할 사람이 있을까? 지금은 부도 명예도 아무 소용없는 나이다. 그저 다음 세상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 작은 시골 마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나는 아버지를 모른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아로 자라고 있을 때 돌아가시고, 그래서 이름도 ‘남길 유’자를 써서 지었다.
여섯 살에 6·25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두 형님을 잃었다. 우리 가정을 지탱해 온 두 형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우리 집 가장은 열두 살의 형님이었는데 모두 어리다 보니 농사일에 일손이 늘 부족하였다. 가정 사정으로 열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그래도 어머니의 은덕으로 시골 고등학교까지 다니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에 12년 학교생활 중에 열심히 공부하라는 사람은 없었다. 늘 하는 말, 빨리 학교 마치고 집에 와서 일손 거들라는 거였다. 중·고등학교는 집에서 십 리 길이 조금 넘었는데 비포장길을 도보로 빨리 가야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아침에 소를 먹이는 등 일손을 거들어 주고서야 학교에 가야 하니 수업 시간 반 이상이 지각이었다.
졸업을 한 달 정도 앞두고 군 입대 적령으로 육군에 입대하였다. 1967년에 만기 전역하였는데, 10월에 지방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의 행운을 얻었다. 1968년에 공무원에 임용되고 그 후 약 40여 년 큰 탈 없이 무사히 마감하였다.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좋은 추억만 기억을 살려 정리해 보면 그때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산은 근면과 성실뿐이었다. 우직하게 윗사람의 말을 잘 듣다 보니 일이 많은 부서만 근무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행정의 최우선 과제가 식량 증산이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굶는 국민이 있어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국민 다수의 주곡이 쌀인데, 일 년 쌀이 4천 석(1인당 정미 80킬로그램 소요 기준)이 생산되어야 하는데 1970년대에는 한 해 쌀 생산량이 3천4백만 석 정도로 6백만 석 정도가 부족하였다.
녹색 혁명을 이루자 하여 지방 행정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였다. 나는 농사 부서에 근무하였는데 군수를 비롯한 상급자들이 수시로 찾아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하고 퇴근은 저녁 10시, 휴일도 없었다. 출근과 퇴근 시간에 아이들은 자고 있어 아버지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
1980년대 초 새마을 재활력 운동이 전개되었다. 군 행정은 자연히 식량 증산 업무에서 새마을운동 활력화 업무로 집중성이 바뀌었다. 내무부가 주관한 추진 사항을 점검하기 위하여 분기별로 총열을 실시하였다. 확인 결과를 발표했는데 추진 실적이 부진한 시·도 단위로 한 시·군씩 경고하였다. 경고를 받은 시·군의 담당 부서는 초상집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군은 경고를 받은 적은 없다. 새마을 담당 부서 직원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나는 담당 부서의 주무였는데 군수로부터 수고했다는 칭찬도 들었다. 지방 서기관 승진을 끝으로 40여 년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함안군의회 5대 군의원에 당선되어 4년간의 임기도 마무리하였다.
내 생애 가장 큰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산업개발원 자치연구소 전문위원(강사) 재직 경력이다. 의원의 임기까지 마치고 나니 공직생활과 의원 재직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사장하는 것이 아까웠다. 연수원에 이러한 경력을 가진 사람인데 귀 연수원에서 근무하고 싶다 하고 강의 희망서를 작성하여 연수를 실시하는 네 곳에 송부하였다. 결과 세 곳에서 허락한다는 통보가 왔다.
그중에서 실적이 많은 산업개발원 자치연구소에서 약 3년간 강의를 하다가 그만두었다. 학문에서는 많이 부족하였지만 실제 경험을 강의하니 초선 의원들은 눈높이에 맞아 이해가 잘 되었다며 강의 끝나고 나서 나에게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할 때 큰 보람을 느꼈다.
무술년 새해 내 나이 팔순이 되었다 / 칠십 고려장이라 하는데, 십 년도 더 살았다. / 잠 자고 일어나니 소리가 잘 안 들리고 또 자고 일어나니 사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 귀 먹고, 눈멀고, 그리하여 어느 날 세상사와 인연을 묻고 바람처럼 연기처럼 사라져 간다. / 새 세상에 들어서니 꽃이 만발하고 새가 노래하고 계곡물도 졸졸 소리 내어 흐른다. / 흥이 나서 어린 시절 불렸던 노래를 부른다. /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그리운 어머니도, 먼저 간 친구들도 만나겠지 / 뒤돌아보니 잘도 살아온 것 같다. (「저승 가는 길」)
저녁에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너무나 아름답다. 나도 저녁 노을처럼 타서 소리 없이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