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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날의 일기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경복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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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흰눈이 펄펄 내리고 매서운 칼바람이 윙윙 불어야 겨울맛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뱃속 편한 사람들의 말이고, 우리네 서민들은 추운 겨울나기가 고역일 수밖에 없다.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이 만만치 않다.
우리 집은 가스보일러로 난방하는데 난방비가 늘 부담스럽다. 그래서 보일러를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돌리는 시늉만 하니, 실내 기온이 죽은 코끼리 입김만도 못하다고 투덜대는 아내의 입김이 오늘도 하얗게 피어오른다.
언제부터인가 직장에서는 원하지도 않는 주 5일 근무를 하면서 주말만 되면 걱정스럽다. 주말을 이용하여 여가 선용을 잘해야 하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다 돈하고 연관이 있어 놓아서 그것이 늘 고민이다. 봉급은 그대로인데 쓸데없이 시간만 남으니…. 그래서 주말이면 시골에 사시는 형님 댁에 자주 놀러 가곤 한다. 형님은 조그마한 농장을 경영하시는데, 이것저것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엊그제 주말에도 형님 댁에 갔다. 형님 댁에 가면 좋은 점은 항상 집 안이 따뜻하고, 방바닥이 쩔쩔 끓을 정도로 뜨거운 것이 제일 맘에 든다. 연유를 알고 보니 통나무 보일러를 무한정으로 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날, 형님과 함께 연료로 쓸 나무를 구하러 산에 올라갔다. 곳곳에 연료로 쓸 수 있는 죽은 나무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중에서 운반하기 쉬운 것을 골라, 가지고 간 엔진톱으로 손쉽게 잘라 차에 싣고 오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하나같이 벌거벗은 민둥산들이 어쩌면 이렇게 울창하게 변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는 나무가 귀하여 땔나무 한 짐을 구하기 위하여 새벽같이 일어났었는데….
지금 시골에서도 거의 다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므로 취사·난방을 위하여 옛날처럼 산으로 나무하러 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산에는 온갖 잡목이 자라서 사람이 몇 발짝 들어서지 못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곧게 자라야 할 나무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기름보일러를 사용했던 형님은 이웃의 권유로 통나무 보일러 한 대 더 장착했다고 한다. 엔진톱을 하나 사 가지고 틈이 있을 때마다 운동 삼아 산으로 나무하러 간다고 하셨다. 조금만 움직이면 금방 며칠 분의 연료를 구하여 차에 싣고 오니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비싼 기름보일러를 사용할 때는 항상 춥게 살았는데, 흔한 통나무 몇 토막이면 하루 종일 집 안이 따뜻하게 보내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산에 갔다 돌아오니 구수한 청국장 끓이는 냄새가 집 안에 진동했다. 냄새가 나는 곳을 살펴보니 거실에 놓인 화로에서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것이었다.
무쇠 화로, 참 오랜만에 본다. 내 유년 시절에 있었던 그 화로가 어디 있다가 이제 나왔는지 모르겠다. 형님께서는 나무 보일러 속에 타고 남은 벌건 숯불이 아까워서 화로에 담아 놓으니 십상이라고 말씀하신다. 화로를 보니 그 옛날 화롯가에 앉아 들었던 할머니의 옛이야기가 생각나고, 화롯가에서 한복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언뜻언뜻 떠오르고, 화로에 얽힌 추억들이 한꺼번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화로에 숯불을 피워 손을 녹이는 난로로 사용했었다. 대개는 재래식 아궁이에서 취사하고 남은 재를 담아 난로로 사용했다. 화로의 용도는 참 다양했다. 할아버지는 담배를 태우실 때마다 긴 담뱃대에 불을 붙이는 데 사용했고, 여인들이 한복을 손질할 때 화로가 없으면 안 되었다. 그곳에 인두를 꽂아 동정을 달 때 인두로 다림질을 하기 위하여 꼭 필요했다. 깊은 겨울밤에 누나들과 화로에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서 호호 불며 나누어 먹던 그 시절이 꿈속처럼 그리워진다.
화로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형님께서는 오늘 밤은 참새 사냥을 해서 화롯불에 구워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셨다.
밤이 이슥하게 깊어져 갈 즈음에 형님과 조카들과 함께 참새 사냥을 나갔다. 유년 시절에 더러 해 본 것으로 방법은 그때나 똑같았다. 이웃에 큰 대나무숲이 있는데, 밤에는 온 동네를 휩쓸고 다니던 참새들이 밤이면 이곳에 모여 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숲 중간에 대나무 사이로 새그물을 조용히 치고는, 한쪽에서부터 장대로 대나무들을 두들겨서 잠이 든 참새들을 조심스럽게 깨우는 것이다. 잠이 깬 참새들은 어둠이 무서워 허공으로는 도망가지 못하고, 대나무 옆 가지로 조금씩 옮겨가다가 결국은 쳐놓은 그물에 머리를 박고는 꼼짝 못하고 그물에 얽혀 잡히는 것이다. 이렇게 참새들을 몰아 그물에 걸리게 하는 수법으로 몇 차례 하다 보니 어느덧 30여 마리나 잡혔다.
조카들이 잡아온 참새를 밖에서 털을 뜯어 가지고 들어왔다. 이제는 화롯불에 잘 굽는 일만 남았다. 참기름을 발라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모양이, 그 고소한 냄새가 군침을 돌게 만든다. 요즘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과 안성맞춤으로 어울렸던 것이 바로 참새구이였다.
형님과 조카들과 함께 소주잔을 채워 건배했다. 한참 출출한 판이라 참새구이는 입에서 저절로 녹는 듯했다. ‘참새구이 한 점과 쇠고기 열 점은 바꾸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을 만큼 참새구이 맛은 최고였다.
밖으로 동치미 국물을 뜨러 간 조카 머리 위에 흰눈이 하얗게 쌓여 들어왔다. 방문을 열고 밖을 보니 어느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전봇대에 켜 있는 가로등 불빛으로 본 눈 내리는 풍경은 글로는 형용하지 못할 운치와 멋이 있다.
눈 오는 겨울은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 밤은 목화송이같이 포근한 눈을 보니 더욱 하얀 그리움 같은 것이 일어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오늘 밤은 하얀 눈이 밤새도록 내릴 것 같다. 황량하기만 한 텅 빈 들판이 쌀가루 같은 하얀 눈이 가득 쌓였으면 좋겠다.
사륵사륵 눈 내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리에 누웠으나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오늘 밤은 동심으로 돌아가 눈 덮인 산속에서 산토끼를 쫓아다니는 꿈을 밤새도록 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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