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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完의 가슴앓이

한국문인협회 로고 曺尙鉉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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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이루어야 할 꿈이 있다. 남들이 들으면 젊은이도 아니면서 웬 꿈 타령이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나에겐 꼭 이룩해야만 할 간절한 꿈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매년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꼭 이루고야 말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도 아직 그 꿈이 미완의 사유(思惟)로 남아 있으니, 내 왜 성화가 나지 않겠는가.
어영부영 살다 보니 올해 내 나이 자그마치 딱 망백(望百)이다. 어쩌자고 그리 빨리 흘러가 버리고 말았는지, 텃밭 가꾸듯 시작한 문학도 그새 70여 년이 훌쩍 넘었으니 말이다. 대학교를 다닐 때 『학도주보』가 공모한 전국 남녀 학생 신춘 현상 문예 대학부에 시가 당선되고, 바로 그때까지 써 모은 시를 간추려 시집 『未練』을 펴낸 후 뚜벅뚜벅 소걸음처럼 이날 이때까지 수필을 써 왔으니 어느새 그리 되었다.
한때 소설도 쓰고 신문사 일을 할 때엔 라디오 드라마가 당선되어 전국의 전파를 타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동안 수필이란 걸 정인(情人)처럼 끌어안고 써 왔는데, 막상 내놓을 만한 변변한 게 없으니 이 아니 부끄러운가. 옛날엔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렇게 다 저문 인생 황혼녘에 그런 ‘괜찮은 글’ 한 편 쓰는 게 나에겐 과제가 되고, 숙제가 되고, 간곡한 미완의 꿈, 가슴앓이가 된 것이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빠르게 진전된 고령화로 인간의 수명은 몰라보게 늘어나기는 했지만,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80∼90년이 고작인데, 나는 이미 그 턱밑에 들어서 있지 않는가. 농사 짓는 농부는 석양에 더 바쁘다고 한다. 한낮엔 덥고 힘들다고 빈둥대다가 서산에 지는 해를 보고서야 서둔다는 얘기다. 어쩜 지금 내가 저무는 밭두렁에서 호미자루를 움켜쥐고 허둥대는 꼭 그 글 농사꾼이지 싶다.
일찍이 ‘현대의 지성’으로 불리던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늙기는 쉽지만 우아하게 늙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 백번 옳은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4분의 3은 늙어가면서 보낸다. 아무리 장수 시대라고는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늙다가 떠나는 게 인생인데, 그 다함없는 풍상(風霜)의 세월이 어디 그리 녹록하고 만만하랴. 더구나 지금 이 벌거숭이 노서생(老書生)에게는 문필도(文筆徒)의 정년이 만기 제대를 재촉하고 있는데, 우아하기는커녕 추하게 늙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어찌 그 이루지 못한 미완의 꿈을 남의 일처럼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 나는 지금껏 어떤 글들을 써 왔던가. 내가 문학을 하는 것은 내 글을 읽어 줄 미지의 독자들과 만난다는 설렘 때문인데, 그동안 별것도 아닌 글을 독자들 앞에 내놓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사실 웬만큼 독해력을 지닌 독자라면 작품의 서두와 내용 그리고 결미 부분만 대충 훑어보고서도 그 작품의 경지와 완성도는 물론 작가의 역량까지도 금세 눈치챈다. 이처럼 예리한 안목을 지닌 독자들 앞에 어찌 넝마 같은 조박(糟粕) 글을 써 내놓고 시침을 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수필은 자기 체험의 문학이다. 작품 속에 작가의 사상이나 인생관 등 온갖 사고와 품격까지 고스란히 반영되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글쓰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간절한 소망은 더도 말고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창작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내 글을 읽던 독자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번지는 글, 한두 군데 어휘가 마음에 들어 진한 사람 내음을 음미하는 글, 그리고 소설적인 재미가 깨알처럼 쏟아지는 글이면 좋겠다. 어디 그뿐이랴. 인생의 희로애락이 심금을 울리고, 은유와 역설, 그리고 행간에서 자그마한 철학이 번뜩이는 글, 간혹 톡 쏘는 알싸한 고추냉이 맛 같은 그런 사회·문명 평을 곁들인 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 나뿐일까마는, 평소 나는 천상병 시인의 시문학을 아주 좋아했다. 그 많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세상을 마지막 떠날 때 남겨놓고 떠난 시 「歸天」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 말하리라’고, 당신이 그토록 겸손하고 자랑스럽게 읊조린 그 아름다웠던 생전의 문필 활동이 못내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지금 이렇게 좋은 글 한 편 쓰겠노라 다짐하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나에겐 시쳇말로 과람한 문학의 소확행(小確幸)이었는지 모른다. 그래, 이제 나는 그동안 못 이룬 내 그 미완의 가슴앓이를 기필코 이룩할 작정이다. 하늘의 저승사자가 날 가자고 데리러 오기 전에….

 

그런데 난데없이 산속 묘원에 이 웬 「歸天」 시비(詩碑)인가. 내 늙어 기력이 쇠해지자 사오 년 전에 자식들이 경춘가도 수려한 소양강 둔치 ‘경춘공원묘원’에 맑은 회색빛 화강암을 곱게 깎아 한 평짜리 납골당을 조성해 놓았다. 한데, 그 묘원으로 오르는 입새에 느닷없이 누가 언제 세워 놓은 것인지 천 시인의 그 「歸天」이 여보란 듯이 서 있으니 말이다. 어찌하여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산속에 와서 저리 외롭게 서 있는 걸까? 꼭 어린아이들의 베개 크기만 한 아주 앙증맞고 자그마한 꼭 수석(壽石) 같은 비석인데, 그것도 그 시비에 새겨진 시문(詩文)의 배열이나 생김새가 전문가의 솜씨만큼이나 예술성이 돋보이니 이 아니 놀라운가. 어느 누구의 선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성정이 너무도 고마워, 요즘도 나는 그 「歸天」이 잘 있는지 궁금해 가끔 찾아가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불가사의한 일들이 하필이면 내 납골당 쪽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이 어인 연유일까? 혹여, 그 미완의 꿈을 다시 한 번 가다듬으라는 「歸天」이 내게 일러 주는 깊은 격려의 뜻이 아닐까?
아하, 옳거니! 그렇구나. 그렇다면 우선 컴퓨터 속의 원고 뭉치부터 모두 꺼내 교정 작업의 대수술을 단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중후하고 정갈한 소재를 바탕으로 탈신변잡기적 그런 깔끔하고 감칠맛 나는 글을 써야겠다.
이 과제가 내 그 가슴앓이를 고쳐 줄 약 중의 보약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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