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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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오전에 <TV 진품명품>이 방영된다. 개인들이 출품한 문화유품들을 전문가의 해설로 보여 준다. 적지 않은 지식이 되므로 매회 놓치지 않고 즐긴다. 그러니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소품도 후일에는 시대의 유산임을 생각하게 된다.
이 방송을 보노라면 불현듯 단아했던 윤 생원이 떠오른다. 오류동*에는 시대의 정신이 앙금져 있다. 일제강점기 이철영(李喆榮) 독립지사가 말년에 이 부락 넷째 아우 집에서 운명하고 얼마 지나서 윤 생원이 이사 들어와 한약방을 열었다.
면계에 우뚝한 무적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양지녘에 지붕이 고래등 같은 와가집과 주변에 초가집 몇 채가 자리해 있고, 윤상희 약방집은 부락 제일 윗집에 위치하여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마당가에는 여러 해 묵은 살구나무와 감나무가 있어 여름이면 그늘을 드리운다. 집에는 나무 하는 소년과 부인이 살며 산양과 거위를 기르고 있어 손님이 마당에 들어서면 하얀 거위 한 쌍이 높은 소리를 내어 알린다.
평소 윤 의원은 약방에 있는 날보다 외지에 나가는 일이 잦고, 나가면 여러 날 지나서 돌아와 찾아온 손님과 상담하며 한약을 지어 준다. 사람들은 윤 의원이 나가서 무슨 일을 하고 어디에 다녀오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랏일(독립운동) 하다가 집에 들어오는 정도로 추측을 한다. 볼수록 빈틈이 없어 보이는 윤 의원은 못하는 일이 없다. 몸에 잘 맞는 한약을 짓고, 효력 좋은 침 시술이며 땅속까지 볼 줄 아는 지관일 하고 사람의 관상이며 사주까지 잘 봐 주므로 멀리서까지 찾아오게 한다.
또한 이름 있는 시사총 위치와 타성들의 계보까지 달달 외우고 있어 듣는 사람들을 끄덕이게 한다. 지리에도 밝아 명산록을 줄줄이 꿰고 있어 인근 마을의 묫자리, 집자리 점혈을 잡아 준다. 이따금 뜻이 통하는 동지라도 오면 반가워하며 깊숙이 두었던 문화유산들에 대한 해설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표정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달항아리와 목이 긴 백자, 갈색 벼루와 연적, 고려 이녕(李寧)의 <묵죽도>를 보여 준다.
대청 시렁 위에는 오래된 고서들이 가지런히 쌓였고, 약방 서궤에는 『방약합편(方藥合編)』, 『채근담(菜根譚)』이 놓여 있다. 방약합편은 처방전을 작성할 때 볼 것이고 채근담은 홀로 있을 때 읽을 것이다. 귀한 문화유산을 많이 감상할수록 행정기관에 기증하라고 권고하면 “가까이에 소장하며 한가할 때마다 보다가 나중에 나라에 넘길 생각”이라고 답한다.
대청에는 목관(木棺)이 놓여 있다. 후덥지근한 여름에는 이 관 위에서 낮잠을 즐기고 추운 동절기에는 내실로 옮겨 침대로 사용한다. 관 위에 누우면 정신이 서늘해지고 척추가 반듯해져 잡념이 들지 않고 신선의 경지에 들어 좋다. 비록 후사가 없지만 운명하면 마을에서 조용히 마을장(葬)을 치를 것이니 미리 장례비를 후하게 기탁할 것이며, 산소 관리도 시멘트로 봉분을 덮으면 초목이 나지 않을 것이니 살아 마음 쓸 일이 없다고 웃어 넘긴다.
인생은 누구나 생로병사로 낳아서 늙어 가다가 병들어 죽는 일련의 과정을 지나도록 숙명되어 있다. 사람이 노쇠기에 접어드는 갱년기에 이르게 되면 부모로부터 받은 원기가 고갈되는 시기인데 대략 남자에게는 64세, 여자는 49세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들기 전에 원기를 보충해 주면 노쇠·병약기를 수월하게 건널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이 원리를 알지만 방심하여 시기를 놓치게 된다. 따라서 자연의 진기를 획득하여 이용하면 가능하게 된다. 즉 바다가 기른 대구포, 왕새우, 홍합, 낙지와 산지가 키운 밤, 대추, 율무를 푹 끓여 섭취하면 양생할 수 있고 수(壽)를 늘릴 수 있을 것이며, 이리하면 온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가 있다.
윤 생원이 외출할 때면 반드시 허리춤에 장도칼을 찬 다음 짧은 두루마기를 입는다. 두루마기에는 긴 옷고름이 아닌 큰 단추 하나만 달아 활동하기 편하게 하였다. 머리에는 실로 짠 원형 모자를 쓰고 마디진 지팡이를 짚고 나선다. 쉽게 범하기 어려운 산중 고찰의 고승 기풍이 풍긴다. 사람들은 윤 도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희미한 윤 생원의 행장이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鄭敾)의 실경화처럼 한 점의 진경으로 남아지기를 그려 본다.
*오류동: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신장 1리에 위치한 자연부락. 지난날 봉화를 올렸던 무적봉 아래 동쪽으로 논골이 시작되면서 실개천도 논골 따라 흐르다가 우기에는 수량이 많아 개천이 넘치므로 부락 앞 천변에 둑을 쌓고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홍수를 막았으므로 부락 지명이 연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