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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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매운 바람이 보도 위로 구른다. 정월 대보름을 눈앞에 둔 뒷산에는 연 띄우는 아이들의 손재주 자랑에 시끄럽다. 그 소리에 선잠이 깨어 하품을 하니 오장육부의 뼈 마디마디가 잘근잘근거린다. 삼동(三冬)을 앓는 체질 탓일까. 나른히 저려 오는 피로함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찢어진 문틈으로 반사되는 햇살이 케케한 먼지를 날리고 있다.
그 초점에 어리는 달력 그림의 봄은 화사하다. 그것을 보노라면 메마른 감정이 뭉클 끓어오른다. 그 열기에 이불을 거두고 대문을 밀었다. 담장 사이로 보이는 반장 집 기둥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등 봄을 맞이하는 글귀가 내 시야에 들어온다.
아! 벌써 입춘. 봄이 오는구나. 춥다 춥다 하지만 나뭇가지엔 움이 트고, 세차게 불던 바람은 푸석하게 시들어 간다. 골목길 양지쪽에는 냉이 몇 포기 봄빛을 담뿍 쬐고 있다. 저렇게 생명력이 강할 수 있나. 영하의 추위에 맨몸으로 세상을 살아왔으니 굳센 그 삶을 찬양한다.
벌레 한 마리 어디론가 기어가고 있다. 작은 체구로 지구를 핥는 근면, 이는 삶의 발버둥이다. 인간의 나태함은 자연에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봄을 좋아한다, 만물이 약동하는 찬란한 봄을. 흙에서 소생하는 힘은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선악에 대하여 어떠한 현자(賢者)보다 더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봄. 나는 이러한 봄을 그리워한다. 인생은 그리움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3월(봄)은 나의 애인이다. 나이는 열아홉 살, 열두 형제 중 셋째 딸이다. 예로부터 셋째 딸은 궁합을 안 보고 혼인을 해도 잘산다고 했다. 3월은 미인이다. 이목구비가 패이고 인정, 강인, 근면, 질서 있는 다산(多産)의 능력을 갖춘 규수다.
때로는 열두 형제의 시새움에 울고, 꺾이고, 고통이 올지라도 어머니 마음처럼 넓은 아량으로 그들을 감싸준다. 또 샘솟는 뿌리의 정력으로 나를 다스려 오늘 그 자비스러운 모습을 기다리게 하는 걸까.
3월은 나를 보려고 사뿐사뿐 오고 있다. 깊은 산골 얼음장 밑에서부터 필리핀을 지나 강남의 어느 바다 상공을 훨훨 날아오고 있다. 나래가 아프면 섬마을에서 쉬고, 꽃구름에 싸여 지금쯤 제주도에 왔다는 소식이다.
나는 애인을 맞이하는 기쁨에 마냥 가슴 설렌다. 오늘 아침 비를 들고 집 주위를 청소하고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이라 써서 대문에 붙여 보았다. 방문을 열고 마루의 먼지를 털어내고 마당에 서서 남쪽의 푸른 하늘을 향해 긴 호흡을 하니, 어느덧 봄 향기는 나의 마음을 적셔 주었다.
간밤에 구름이 낮게 어리더니 밤새 비가 내렸다. 먼 산의 잔설이 뼈다귀처럼 앙칼져 보이고 눈 녹은 도랑물이 맑은 노래로 새벽잠을 깨운다. 누가 봄만 되면 이 강산에 파란 물감을 지천으로 뿌려 흙에게 아름다운 옷을 갈아입힐까. 과수원 사과나무의 오디빛이나 보리밭의 파란 나풀거림, 수양버들의 연둣빛 흐름은 하나의 경이였다.
봄빛이 나의 등을 따스히 쬐인다. 그렇게 내려앉던 참새 떼는 간 곳 없고, 수탉은 긴 목청을 돋우어 정오를 알리며 빈 마당을 맴돈다. 그런데 울타리 위에서 누가 정답게 이야기하며 손짓한다. 아지랑이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우리 집을 엿본다.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전신에 화기가 돌았다. 3월은 댓돌 위나 장독대, 마굿간에서 한바탕 선을 보고 짚가리에 가서 장난을 하다 살구나무 가지 끝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자지러지는 봄빛 / 막 터지려는 꽃봉오리 / 풍만한 젖가슴 / 해맑은 미소 / 그 향기.
앵두빛 입술의 고고한 자태는 홍도 복숭아 같은 인물이다. 시인 묵객들은 이를 두고 이팔청춘이니, 일장춘몽이니 했던가. 3월은 수줍은 모습으로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있다가 이내 빨간 치마폭을 휙 사려안고 산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산에 올라보니, 3월은 양지쪽 진달래 무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 3월은 봄의 여왕이다. 나는 분홍빛 순정에 유인되었다. 불타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향 과정, 우윳빛 진맛에 놀고 싶다. 그 풍만한 육체를 한아름 안아보면 신비스러운 감회에 젖어 지나는 시간이 자꾸 슬퍼진다.
3월은 초동의 나뭇짐에 실려 속세로 하산했다. 골목길로 접어들면 할머니, 누나들은 나를 보고 소박한 웃음으로 계절의 기쁨과 삶의 보람을 느끼도록 해주곤 했다.
3월은 아지랑이와 술래 지어 초원을 난다. 그러다 지치면 찔레나무, 개나리, 벚나무, 배나무에게 정을 준다. 그리고 3월은 노란 개나리꽃 속에서 낮잠을 잔다. 가엾은 꽃, 누구도 돌보지 않고, 산과 들 어느 곳에서나 서민의 꽃으로 천하게 살아온 인생, 그래도 아무 불평 없이 편안하게 봄을 맞이하니 가상하기 그지없다.
봄이 기뻐서 작은 나팔을 불어 세상을 울리면, 벌과 나비, 천진한 아이들도 모여 한마당 봄잔치를 펼치니 이 세상에 그 누구를 부러워할 것인가. 또 일상을 자신이 능력껏만 산다면 행복은 그림자처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물 것이 아닌가. 봄의 설렘에 규방(閨房)의 아가씨도 사창을 활짝 열고 3월과 친구 되고파 종달새 소리에 귀를 열고, 먼 산의 푸른 등줄기를 헤아려본다.
그러나 3월은 단명한다. 인생은 굵고 짧게 살라고 했듯이, 씨를 뿌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 여신의 업적은 대지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런데도 사랑하는 사람과 작별함은 왜 이렇게 슬퍼질까.
서서히 바람이 분다. 오색 꽃잎은 한 잎 두 잎 오솔길에 나부낀다. 인간의 발길이 슬퍼짐은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함인가. 3월의 연분홍 치마폭이 동생 5월의 강에 사위어진다. 3월은 나룻배에 실려 창파로 떠나며 슬픈 미소 속에 빨간 손짓으로 나에게 안녕을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