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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의 시간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손동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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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오빠는 올케언니 장례식 동영상과 함께 소천소식을 전해왔다. 갑작스런 일이라 놀라움으로, 함께 나누었던 시간과 대화를 떠올리며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문득 지난 일들이 그리워진다. 두 살 터울의 오빠는 고교 시절 미국으로 유학 가서 긴 세월 떨어져 살았다. 한인교회에서 만난 여성과 약혼한다며 편지를 보내오고 그때부터 반대하는 부모님의 입장에선 당장 달려갈 수도 없고 어찌할 방법이 없어 오빠의 편지를 받으면 자주 시끄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후 둘은 결혼하였고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결혼을 하고 바쁘게 살다보니 40대가 되어서야 오빠 가족을 만나러 갔다. 남매간의 풋풋한 정을 나누던 고교 시절에 헤어졌으니 애틋함이 컸다.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지금처럼 풍요로운 시절이 아니었기에 오빠부부와 조카에게 무엇이 좋을까 백화점 안을 꼼꼼히 살피며 좋은 옷과 내가 아끼던 액세서리도 주고 싶어 선물보따리를 꾸려놓고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어도 남매간의 정은 예전 그대로 정다웠다. 멀리 살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했고 병원생활을 짧게 하다가 운명한 올케 언니. 서로에게 정표로 나누었던 액세서리를 꺼내보다 왈칵 눈물이 났고 어디선가 이별의 종소리가 댕∼댕 울리는 것 같았다.

소프라노 조수미는 아버지 장례식날 청중과의 약속이기에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연주를 다 마친 후 앙코르곡으로 아버지를 위해 <아베마리아>를 부르며 그날의 연주회를 아버지께 바쳤다. 보는 내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국가의 중요한 행사마다 늘 함께 하는 그녀를 진정한 애국자라 여겼는데 그 기억과 함께 올케언니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그녀가 부른 <아베마리아>를 찾아 들었다.

나의 여고 시절도 부모님은 오빠처럼 유학을 보내려고 준비하셨으나 오빠는 극구 반대하였다. 당시 낯설고 물선 그곳에 어린 여자애가 오면 외로워서 견딜 수 없으니 안 된다는 것이었고 대학 3년 때 다시 한 번 부모님의 시도가 있었으나 대학 졸업하고 약혼자와 와야 한다며 반대했다. 살며 어느 순간, 그때를 떠올리다 혼자 화를 삭인 적도 있었다. 오빠의 반대로 또 다른 나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한동안 원망도 하며 살았다. 이제 지긋한 나이가 되고 보니 모두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주어진 매순간을 열심히 살고 있는 지금, 그 모든 것이 나름 잘 발효된 시간 덕분이다. 바쁘고 고단했던 지난 시절, 잘 발효된 음식처럼 많은 일들이 내 안에서 여러 과정을 거치며 나름 좋게 작용했음을 이 나이 들어서야 새삼 깨닫는다.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수많은 글에서 보았지만 막연하기만 했던 젊은 시절, 지나고 보니 아버지의 말씀이 오랫동안 맴돈다. 대학 시절 피아노 전공인 내가 교직과목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꾸중 듣던 기억,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여서 무조건 교직을 따놓아야 한다는 말씀에 속으로 자신의 앞일은 어느 정도 꾸려 갈 수 있다고 자신하던 시기였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어도 무엇이 옳은 일이며 인연으로 다가온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는지 돌이켜 보게 된다.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살아온 일들은 아쉬움과 함께 남은 시간 잘 살아내기 위한 반성으로 내 안에서 물결친다.

나를 지켜주었던 소중한 인연과 그로 인한 잊을 수 없는 수만의 기억들이 늦은 밤이면 가끔 내 안에서 쿨럭거리며 깊은 심연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힘들 때마다 내게 기운을 주었던 그 일들은 힐링의 시간이 되었고 내면의 세계를 평온하게 지켜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효되어 자신을 발전시키고 어려움으로부터 일어서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살면서 만났던 상처들은 발효의 시간들이 나를 건재하게 해 주었음을 상기하며 상처가 꽃이 되기도 했음을 발견한다.

막상 열어보면 으레 하찮고 대수롭잖은/ 잡동사니들만 잔뜩 들어 있는 것이지만/ 그 서랍의 주인에겐 하나같이/ 소중하고 애틋한 세월의 흔적들이다.

문득 임철우 시인의「아름다운 기억의 서랍」이란 시의 일부를 떠올린다.

숙성과 발효과정을 거쳐 먹는 음식은 소화 기능 향상, 면역력 강화 등 건강에 다양한 도움을 준다. 사람에게 유익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발효라 하듯 나 자신에게 힘들었던 일들이 내 안에서 발효되어 삶에 힘을 주고 득이 되는 이 과정을 즐기며 살려 한다. 젊어서는 못 느끼는 이런 순간이 참으로 감사하다.

인생의 빛과 어둠이 녹아들어 어느 나이가 되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생기고 그건 바로 발효의 시간을 거치면서 내 자신이 가지게 된 여유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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