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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 속의 정신적 유산들

한국문인협회 로고 최균희

아동문학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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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단어 두 가지를 대라 하면 나는 서슴없이 ‘고향’ 그리고 ‘어머니’라 답할 것이다.
내 고향은 산과 들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곳, 아름다운 변산반도와 널따란 호남 평야, 그리고 서해 바다에 인접해 있는 전북 부안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읍 변두리였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주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어머니란 단어는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기뻐도 생각나고 슬퍼도 생각나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 어머니를 어찌 한 시도 내 마음에서 지울 수 있을까.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다’는 속담대로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시면서, ‘나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 베풀 수 있으면 성공한 삶이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어머니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온 지도 어언 오십 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어머니! 하고 부르면 어디선가 금방 달려와 나를 꼭 안아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나는 항상 어머니란 이름 앞에서는 더 이상 어른일 수 없는 어린애에 불과하다.
내 나이 두 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네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은 거의 없다. 그 시절 누구나 힘들었겠지만 혼자 되신 우리 어머니는 삼남매의 뒷바라지에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지금도 ‘어머니’란 이름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다. 열다섯 살과 일곱 살 위인 큰오빠와 작은오빠 아래로 태어난 나는 마냥 철부지로 자랐다. 그래도 오빠들이 공부한 책들을 가까이 하며 책 읽기를 좋아한 덕분에 학교 공부는 언제나 상위권에 들었다.
그런데도 가정 형편 때문에 내가 가고 싶었던 상급 학교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여고를 졸업한 후, 4년제 대학마저도 갈 수 없어 2년제 교육대학에 가야 했다.
1970년 교대 졸업과 함께 발령을 받아 그해에 전북매일신문에 「꽃을 가꾸듯」이란 수필과 함께 「빨간 털구두」라는 동화를 3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 작품을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시며 아동문학가이신 윤갑철 선생님께서 한국기독교아동문학 작품 공모에 응모케 하여 1971년에 당선된 것이 동화 작가로 등단한 첫 번째 출발이었다.
고향의 모교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매일매일 마주하는 시골 아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동화의 소재가 된 것이다.
가난 속에서 부모의 농사일을 도와가며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은 항상 쓸쓸하고 외로웠다. 하지만 솔직하고 정직한 그들의 이야기를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이 사람이건 동식물이건 인내와 끈기로 역경을 이겨내며 마침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길이 있음을 알려주려 노력했다. 방과 후에는 문예반을 열심히 지도하여 한국글짓기지도회 이희승 박사로부터 제1회, 제2회 지도교사상을 두 해 연속으로 수상했으며, 향토의 전래 동요에 대한 연구로 현장 논문 발표에 특선으로 뽑혀 ‘전북의 별’이란 표창장도 받았다.
그 뒤로 1974년에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제1회 신인 작품에 동화 작품 「안개」가 당선되었고, 이어서 197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아기 참새」가 당선되었다.
그때 심사위원장이신 <고향의 봄> 작사자 이원수 선생님께서는 심사평에서 ‘최균희의 작품을 읽으면 우리나라의 산과 들과 집과 마을이 모두 우리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설픈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생활이 나타납니다. 거짓스럽거나 우스꽝스럽거나 겉치레한 것이 아닌 진실한 우리들의 살림살이가 나옵니다. 이러한 동화나 소년소설이 바로 우리들의 소년소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안개」에 나오는 범우나 「아기 참새」에 나오는 똑똑새를 보면 아무렇게나 만들어 낸 사람 혹은 참새가 아닌 실제로 있을 사람이나 참새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작가의 정신과 기교가 함께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최균희 씨는 아기 참새처럼 세상을 살아가며 옳은 생활을 위해 몸 바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의 글이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으면서 유머와 재치가 넘치며 진실에 자리하려 노력하고 있는 데서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라며 과찬을 아끼시지 않으셨다.
이원수 선생님께서는 내 작품을 읽고 내 고향을 지도에서 찾아보셨으며, 최종선에 올라온 작품 4편을 이웃에 사시는 황순원 선생님께 보여드리자, 황 선생님께서도 「아기 참새」를 맨 위에 올려주셔서 함께 기뻐하였다는 말씀을 사적인 자리에서 들려주셨다.
어쨌든 나를 알기 전에 내 작품을 인정을 해주신 이원수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서울에서 몇 분 일행과 우리 고향을 찾아오셨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채석강을 돌아볼 때였다.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아이들이 있어 ‘이분이 방금 너희가 부른 그 노래를 지으신 분이다’라고 말하자, ‘어떻게 저런 삐쩍 마른 할아버지가 이런 노래를 지을 수가 있어요?’ 하고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달아났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허허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래.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작품으로 어린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아름다운 정서를 길러주면 그만이지, 작가의 이름은 작품 뒤에 숨어서 보이지 않아도 돼.”
선생님의 소중한 작가 정신이 깃든 말씀이셨다.
신춘문예 당선 1년 후인 1976년에 그토록 하나뿐인 딸의 결혼을 고대하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서야 나는 이원수 선생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남편의 권유로 4년제 대학 국문과에 편입을 하였고, 아들 둘을 기르느라 3년 쉬었다가 다시 복직을 하여 대학원 공부를 계속했다.
종종 열리는 문학 행사에 참여하면서 박홍근, 박경종, 어효선, 김종상, 이영호, 엄기원, 차원재, 김완기 선생님 등 여러 아동문학가들과 교류하며, 동화와 동시를 쓰시는 분들이 얼마나 진솔하고, 인간미 넘치는 분들인가를 느끼곤 했다.
신현득 선생님은 1976년 소년한국일보에 「마음의 꽃다발」을 연재하면서 만나 뵈었다. 1985년에는 중학교 국어 교사로 전직하였고, 1991년과 1992년에는 중학생조선일보에 청소년 소설 「꿈이 영그는 교정」을 매회 원고지 7매씩 하루도 빠짐없이 328회의 장편소설을 연재한 적도 있다. 그 당시 여중 3학년 사춘기 소녀들이 체험하는 교육 환경 속에서 부푼 꿈과 사랑, 심리적 갈등과 우정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추억 속의 자료로 남을 것이라 믿는다.
요즘은 소설 쓰기에 흥미를 붙이고 있지만, 동화만을 고집하다가 우연히 내 동시에 작곡을 해주신 오세균, 이재석, 신귀복 선생님과 인연이 닿아 『최균희 노랫말 동요곡집』도 발간하였다. 나름 바쁘게 살면서 각종 잡지에 발표된 작품들을 한데 모아 종종 책을 낸 것이 30여 권에 이른다.
초등학교 교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중등 교사를 거쳐 교장직을 마치고 대학교 강단에서 아동문학과 한국문학사를 강의하는 등 나는 평생을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왔다. 그래서 서울시교육청의 후원을 받아 최근에는 『교육과 문학, 두 수레바퀴를 굴리며』라는 교육 생애사를 펴냈다.
예전에 모 기관에서 ‘나에게 문학이란?’ 하는 앙케트가 왔을 때, 나는 ‘신이 내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 또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이끌어가면서 글 쓰는 일을 즐기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아동문학이 모든 문학의 근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도 티 없이 밝고 맑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내 글의 바탕이 되는 정신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내 고향과 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시고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마냥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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