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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 푸르싱싱

한국문인협회 로고 권석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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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하얀 거품을 뿜네! ”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던 진아가 중얼거렸다. 진아네 집은 문만 열면 동해 바다가 끝없이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할머니랑 이렇게 바다를 보았었는데….’
창가에 붙어 서서 바다를 바라보던 진아가 고개를 돌려 주방 을 힐끗 보았다.
그때 막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서던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퉁 명스럽게 내뱉는다.
“나 서울 보내줘. 할머니한테…”
“네가 가면 할머니가 힘들어서 안 돼!”
“방학 하면, 할머니가 오라고 했단 말이야.”
“아직 방학도 안 했는데?”
“그러니까 방학 하면 보내달라고.”
할머니가 서울 작은집에 올라가신 지는 서너 달 지났다. 작은 집이 가게를 내면서 할머니를 모셔 갔기 때문이다. 작은엄마 아빠가 가게에 나가면, 할머니는 집에 남아 어린이집에 간 혁이를 기다린다고 한다.
“내가 서울 가면 혁이도 좋아할 거라고 할머니가 그랬어.”
진아는 어느새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떼를 썼다.
“아빠가 퇴근해 오면, 의논해 보자.”
엄마는 아빠 핑계를 대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토라져 있는 진아 얼굴을 들여다보고 피식 웃었다.
“오늘은 바다가 푸르뎅뎅할 거야.”
“할머니가 했던 말이네. 내가 실쭉샐쭉할 때마다…”
“바다의 푸른 빛이 고르지 않을 때처럼…”
“할머니는 내 마음을 바다 색깔로 나타내곤 했지.”
“바다를 참 좋아하셨는데…”
엄마가 말끝을 흐리며 바다를 내다보았다.

진아는 아빠가 퇴근해 오자마자 옆에 바짝 붙어앉아 조르기 시작했다. 
“아빠, 방학 하면 나 서울 보내줄 거지?”
“갑자기 서울은 왜?”
아빠는 진아와 엄마를 번갈아 보았다.
“진아가 오늘 바다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었나 봐요.” 
“바다는 왜?”
아빠는 엄마 대답에 뜬금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님이 바다 바라보는 걸 좋아하셨잖아요.”
“그러셨지. 봄빛 바다를 ‘새싹처럼 푸릇푸릇하다’고 하셨어.” 
아빠가 그제야 생각난 듯이 말했다.
“오늘은 한 줄기 비라도 내리려나, 검푸르죽죽하다.” 
엄마가 할머니 말투로 맞장구를 쳤다.
“맞아. 할머니는 바다 색깔이 때때로 변한다고 하셨어.”
진아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할머니가 서울로 가시기 며칠 전이었다.
아침에 진아는 할머니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아, 바다에 해비늘이 반짝인다.”
“해님도 생선처럼 비늘이 있어?”
“햇살에 파도가 생선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모양을 어느 시인이 ‘해비늘’이라고 이름 지었단다.”
“해비늘을 벗기면 바다는 무슨 색깔일까?”
“푸르싱싱한 색깔.”
“땡, 틀렸어.”
“왜?”
“사람들은 바다를 푸른 바다라고 하잖아. 그러니까, 푸른 색깔이지.” 
“바다를 자세히 오래 바라보면, 색깔이 조금씩은 달라.”
할머니는 공책을 열어서 진아에게 보여 주셨다. 첫 장에는 ‘푸르르다, 푸르스름하다, 푸르데데하다, 푸르무레하다, 푸르뎅뎅하다, 푸르죽죽하다, 푸르께하다, 푸름푸름하다, 푸르퉁퉁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뒷장에는 ‘새파랗다, 시퍼렇다, 짙푸르다, 얕푸르다, 옅푸르다, 검푸르다, 시푸르다, 희푸르다’라고 쓰여 있었다.
“우아, 이렇게 많아?”
진아는 놀라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찾아보면 더 있을걸? 아마…”
할머니는 사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진아는 사전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찾았다, 푸르디푸르다.”
“딩동댕, ‘더할 없이 푸르다’는 뜻이네.”
“나태주 시인은, 풀꽃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하셨어. 바다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그러다 보면, 바다를 바라보는 게 재미있겠네.”

“서울보내줘.”
노래 부르듯 조르는 진아 등쌀에 못 이겨 엄마 아빠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그래, 서울 가자.”
“신난다!”
진아는 아빠 말에 두 팔까지 벌리며 좋아했다.
“단 하루만이다.”
아빠가 짤막하게 말했다. 
“서울에 하루만?”
진아는 눈이 동그래졌다.
“바다가 푸르뎅뎅할까, 푸르싱싱할까?”
엄마가 진아 얼굴을 보며 놀리듯이 말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응, 동서. 고맙기는…”
작은엄마인가 보다.
“가방은 다 싸 두었지? 어머님 좀 바꿔 줘.”
진아는 여전히 입을 삐죽이 내민 채로 엄마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님!”
“할머니, 할머니!”
진아가 큰소리로 할머니를 부르자, 엄마가 씩 웃으며 핸드폰을 진아 손에 넘겼다.
“할머니, 나 할머니 보고 싶어.”
“나도 진아가 보고 싶어. 바다도 보고 싶고.”
“그런데 서울에 가서 하루만 있는대.”
“맞아, 하루만 있으면 돼.”
“싫어. 난 할머니와 살고 싶단 말이야.”
진아는 할머니 목소리를 듣고 울컥해져서 눈물이 났다. 
그 바람에 핸드폰을 넘겨받은 엄마 귀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도 진아 곁에 있으려고 동해로 내려가는 거야.”
할머니 목소리를 듣지 못한 진아는 그저 눈물 훔치기에 바빴다. 그러자 아빠가 진아를 덥석 안았다.
“내일 서울 가서 할머니를 모시고 오자.”
“서울 작은집에 가서 하룻밤만 자고 할머니와 같이 오는 거야. 혁이도 같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엄마는 아빠의 말을 받았다.
“내가 속았잖아.”
진아는 그제야 엄마 아빠한테 속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잠시 씩씩대다가, 할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 순간, 엄마가 진아를 보며 활짝 웃었다. 
“지금 바다 색깔은 어떨까?”
진아는 조금도 머뭇대지 않고 대답했다. 
“푸르싱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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