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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노래를 좋아해요

한국문인협회 로고 윤수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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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아, 너 좋은 일 좀 하지 않으련?”
미장원 아줌마가 머리를 손질하다 말고 넌지시 물었습니다. 
“좋은 일이요? 어떤 일인데요?”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거울 속의 미장원 아줌마를 바라보았습니다.
“일주일에 세 시간만 하면 되는 좋은 일이야.”
“그게 무슨 일이냐니까요?”
“버드나무집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산책시켜 드리는 일.” 
미장원 아줌마는 우리 동네 반장입니다. 어려운 일은 물론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봉사를 해달라는 말이죠?”
“응. 대신 네 머리 값은 받지 않을게.”
그렇게 해서 나는 매주 한 차례씩 휠체어에 할머니를 태워가지고 공원을 산책하였습니다. 그렇잖아도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있던 참이어서 마침 잘됐다 싶어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말하는 걸 잊은 것 같았습니다. 인사를 해도 덤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산책하는 동안에도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돌부처처럼 앉아 있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나는 할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공원 안을 돌고 또 돌고 하였습니다. 봄볕이 따사로워서 산책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말이 봉사활동이지 오히려 내가 더 즐거웠습니다.
“할머니, 오늘 날씨 참 좋지요?”
나는 고개를 숙여 할머니를 향해 물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기분 좋으시지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 입에 넣어드리는 사탕만 오물거렸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나는 차츰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에이, 무슨 할머니가 한 말씀도 안 해요? 바보 할머니잖아.”
나는 할머니를 향해서 싫은 소리도 해봤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머니의 덤덤함은 그대로였습니다.
사람이 말 한마디 없이 같이 지낸다는 것처럼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바위나 돌덩이라면 몰라도요.
“저어 있죠, 아줌마. 할머니가 전에도 저러셨어요? 도통 말을 안 해요. 나무토막이랑 같이 있는 기분이에요.”
오죽했으면 미장원 아줌마한테 그런 말을 다 했을라고요.
“응, 그거? 전엔 변호사 저리 가라 할 만큼 말씀을 잘 하셨지.” 
“그런데 어쩌다가 저리 되셨어요?”
“그게 말이지, 치매가 갑자기 와서 기억력을 잃으시더니 말씀까지….” 
아줌마는 말끝을 흐렸습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도 돌아가시기 전에 아주 심하게 치매를 앓으셨거든요. 느닷없이 엉뚱한 말을 하지 않나,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나, 나중에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엄마를 누구냐고 묻지 않나, 아빠를 보고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하지 않나. 그런데 신기한 것은 돌아가시기 하루 전엔 정신이 돌아와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고 가셨다고 했습니다.
버드나무집 할머니가 치매라는 것을 안 나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아무 말을 안 해도 그런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대신, 나는 혼자 중얼거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와! 저 고목나무 좀 봐라. 봄이 되니 생기가 도네.”
“비둘기들아, 너희는 맨날 뭘 그리 먹기만 하니?”
“오는 주말엔 축구를 할까, 농구를 할까….”
그러다가 그도 싫증이 나자, 나는 혼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날씬한 엄마 물고기
늠름한 아빠 물고기
풍덩풍덩 형제 물고기
물고기 가족이죠.

우리 아빠 잠깐 멀리 나가면
다정한 엄마가 우릴 지켜요
-엄마 심심해요!
-나는 배고파요!
(이하 생략)
—<배뚱뚱 잉어 가족>(정선혜 작사, 김정철 작곡)

그런데 내가 노래를 부르자 미동도 하지 않던 할머니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멍하던 눈빛도 조금 달라보였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노래를 좋아하나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동생이 즐겨 부르는 <빨간 장화>를 다시 불렀습니다.

언니가 신던
파란 장화도 싫대요
내가 신던
노란 장화도 싫대요

백화점에서
동생이 직접 고른
빨간 장화
(이하 생략)
—<빨간 장화>(이경덕 작사, 송택동 작곡)

그러자 할머니가 입을 오물거렸습니다. 뭐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노래 좋아하세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 <고향의 봄> 아시지요?”
나는 이번에는 <고향의 봄>을 불렀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그러자 할머니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신이 나서 2절까지 내리 불렀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부터 나는 휠체어를 밀며 노래를 불렀고 할머니는 나를 따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즐거웠습니다. 나도 모르게 일요일이 기다려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할머니도 일요일을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할머니, 어릴 적에 말이에요. <오빠 생각> 노래도 많이 불렀지요?” 
내가 노래 얘기만 꺼내면 할머니의 얼굴에 반가워하는 빛이 돌았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가수라니까. 노래 부르기 대회에 나가면 일등 하실 거야.”
나는 신이 나서 휠체어를 밀었습니다. 휠체어도 훨씬 잘 굴러갔습니다. 
“자, 노래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일요일은 음악시간입니다.
우린 <오빠 생각>을 같이 불렀습니다.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다음은 <섬집 아기>입니다.”
우린 <섬집 아기>를 같이 불렀습니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우린 또 <엄마야 강변 살자>도 같이 불렀습니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뒤에는∼.”
<엄마야 강변 살자> 노래를 부를 땐 할머니의 얼굴에 아련한 빛이 어른거렸습니다.
우린 가요도 불렀습니다. <고향초>, <해 뜰 날>, <어머나>… <애국가>는 손까지 흔들며 불렀습니다.
한 달쯤 지난 일요일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마침내 말을 했습니다. 
“고마워.”
나는 왈칵 눈물이 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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