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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땅 육백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김상영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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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안마기 소리가 꼭두새벽을 울린다. 찌뿌둥함을 참다 못한 아내가 안마의자에 올라앉은 게다. 저런다고 거듭되는 들일 품앗이로 뻐근해진 삭신을 다독일 수 있나. 새벽잠을 설칠지언정 소방수가 나설 차례이다. 제아무리 신식 안마기라 해도 내 손만 하랴. 수건 한 장 찾아 들고 어둠 속 안방을 향하며 아내 귀에 속삭인다.

“고마 방으로 들오소.”

아내는 발바닥이 유난히 아픈 사람이다. 발바닥은 오장육부의 축소판이라는데, 내장이 부실한 게다. 발바닥이 무지근하니 맨발 걷기를 꺼린다. 실내에서도 지압 신발을 신지 않곤 못 배긴다. 하루는 현관, 어느 땐 안방, 대중없이 널브러지는 신발이다. 꿰신었다가 아무 곳에나 벗어 놓고는 찾느라 두리번거리기 일쑤다. 집안으로 들어설 때 첫 동작이 신발 꿰신기라 선뜻 눈에 띄지 않는 날은 불안해 보인다.

그 신발이 지뢰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230㎜ 그 동글동글한 분홍색 요철 신발에 걸려 거실 바닥에 꽈당! 자빠졌을 땐 천장이 뱅뱅 돌았다. 베란다 쪽으로 넘어져 큰 유리창을 통째로 갈아 낀 적도 있었다. 된욕이 절로 튀어나왔어도, 술기운이 좀 있는 데다 덤벙댄 내 탓이려니 하고 아내 입장을 헤아렸다. 셋방살이 신혼 시절 돈이 없어 산후조리를 제대로 해 주지 못한 후유증만 같아서다. 내가 조심할 수밖에 없다. 야밤에 냉장고를 열거나 TV를 보려고 거실을 더듬거릴 양이면 신발에 걸려 넘어질까, 똥꼬가 찌릿찌릿하다. 그래도 가을날 멍석 나락 젓듯 발을 끌다시피 걸으면 그뿐이지 싶었다.

며칠 전 일이다. 거실 바닥에 숯검정 같은 줄무늬가 군데군데 그였다. 걸레로 훔치거나 세척용제로 닦아내도 자꾸 생겼다. 희한하네, 싶으면서도 지우기를 계속하였다. 지울 때마다 칠칠찮은 여자라며 구시렁거렸고 아내도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뒤집힌 지압 신발을 보고서야 알았다. 발뒤꿈치 겉 밑창이 삐딱하게 닳자, 부드러운 속 검정 고무가 걸음마다 직직 그이며 자국을 남긴 거였다. 우직하게 오래 신은 탓이었다. 원인을 알아차린 아내가 그제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오일장이 멀었기에 인터넷으로 새 신발을 주문하였다. 그 며칠을 못 견뎌 마스킹 테이프로 신발 바닥을 때워 신었다. 이렇듯 아내의 신발 사랑은 유별나다.

아내는 못 이긴 척 안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넙죽 엎드린다. 발바닥이 천정을 향해야 내가 마사지하는 자세와 맞기 때문이다. 아내 발치께에 거꾸로 앉아 크림 뚜껑을 연다. 허벅지 위에 수건을 펼치고 아내 발을 척 끌어당겨 올린다. 중국 여인네 전족 발처럼 앙증맞다. 마사지 크림을 콩알만큼 손가락으로 찍어 다섯 발가락에 피아노 치듯 바른다. 손가락을 발가락 사이마다 끼웠다 뺐다,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조물조물 문지르는 게 첫 순서다.

어느 정도 시동이 걸렸다 싶으면 크림을 듬뿍 찍어 발바닥에 골고루 펼쳐 바른 뒤 주먹으로 죽죽 밀기 시작한다. 빨래판 내리밀 듯 말이다. 때론 느리게, 아니면 빠르게, 그야말로 리드미컬하게 ‘슬로우슬로우 퀵퀵’이다. 다양한 형태의 지압봉이 쌔고 쌨지만 죽으나 사나 주먹이다. 지압봉은 비인간적이며 무지막지하다. 족집게처럼 요소요소를 찔러댈 때마다 비명이 난무하는 발 마사지 건강 프로는 보기만 해도 오금 저린다. 나는 오장과 육부의 복잡한 압점을 잘 모르니 무작위로 눌러 훑는다. 이야말로 주먹구구식일진 모르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을까.

한 주먹으로 수십 회를 거듭 밀면 마찰 때문에 뼈마디가 화끈거린다. 간간이 크림을 발라가며 하는 데도 뻑뻑해지기 일쑤다. 이 주먹 저 주먹 번갈아 대면 열이 수그러지고 힘도 덜 든다. 150번을 밀고 잠시 발가락을 주무르고, 다시 150번을 거듭한다. 한 발바닥에 300번씩, 모두 600회에 이른다. 나만의 풀코스라고나 할까. 이쯤이면 땀이 진득한 나와는 달리 아내는 코를 엷게 골다가 말다가 한다.

깔았던 수건으로 곤죽이 된 발바닥을 쓱쓱 닦는데, 세게 문지르듯 하는 행위 또한 시원하리라 여겨져서다. 마지막으로“갑종”하며 발바닥을 철썩 치는 것으로 불 끄기를 마친다.

길면 30분이요 허벌나게 밀면 20분에도 종칠 수 있다. ‘밀땅 육백’은 내가 붙여본 이름인데, 숱한 경험 끝에 획정한 공식이다. 속도를 조절하는 건 순전히 내 마음이지만 미는 횟수는 줄이지 않는다. 부부 사이 신뢰의 영역을 지키고 싶어서다. 잡생각으로 회수를 까먹을 땐 까짓것 처음부터 다시 센다.

만날 꾸준할 수 있을까, 누르는 강도가 약하거나 빨리 끝낼 때도 있다. 나도 사람인데 매번 기계처럼 똑같이 할 수야 있나. 행여 횟수가 모자란다 싶으면 비몽사몽이던 아내 건만 부실함을 알아채곤 “와 이카노”한다. 예리하기도 하지. 그래, 콩밭에 잠깐 간 걸 어찌 알까. 지압봉에 찔리듯 뜨끔하다.

봉사 받는 처지임에도 당당하니 좋다. 마사지로 상쇄하는 부문이 여럿인데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면 적당한 표현일까. 삼시 세끼 밥 챙겨 주는 데다 반주 한잔하시라 고기 구워 대령한다. 글 모임을 거듭하며 고상한 척해도 짐짓“아이고 대감님”하며 치켜세워 준다. 그중에 으뜸은, 다소 부실한 사내임에도 그 죄를 사해 준다는 거다. 화력이 시원찮다며 바짝 달려들면 진땀 나지 않겠는가. 각방살이가 편하다며 황혼 타령을 일삼는 지인들이 남의 일 같지 않건만, 아직은 임도 보고 뽕도 따고싶다.

사흘돌이 소방수 노릇을 멈출 수 없으니 버겁긴 하나, 벗어날 생각은 없다. 밀고 당긴 가락으로 심금을 울린 가수가 그 얼마나 고맙던가. 문지방 넘을 힘닿는 날까지 발바닥 밀당을 거듭해야 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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