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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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정말 화가 난 것일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세찬 소낙비가 쏟아지다가 눈부신 뙤약볕이 내려쬐다가. 봄인가 하면 겨울이고, 겨울인가 싶으면 또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와 있는 변덕스런 날씨에 우리네 심신 또한 흩날리는 꽃잎처럼 나른하고 무기력한 계절이다.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설마 했던 친구도 한 편의 콩트 같은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니, 남의 일인 듯 그냥 웃고 넘어가기는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친구의 일은 곧 우리들의 일이기에 더욱 공감의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이참에, 친구의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를 나의 일처럼 되새기며 타산지석으로 삼아보려고 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인상이 말해주듯, 친구는 조용하고 느긋하며 낙천적인 성격이다. 좀처럼 화를 내거나 따지려 들지 않으며, 일처리가 꼼꼼하고, 웬만해선 실수가 없기로 정평이 나 있다. 몸이 가벼워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열차와 고속버스를 자주 이용한다. 그러다보니 동년배 친구들에 비해 스마트폰 활용에 익숙하고, 시간 관리도 철저한 편이다.
그날은 부산에서 있을 세미나 참석을 위해 친구가 고속열차를 이용하기로 한 날이었다. 주말에 일정이 잡혀, 열차표를 이틀 전에 미리 예매해놓은 것은 당연지사. 가방을 챙기고, 옷을 입고, 즐겨 마시는 핸드 드립 커피를 내리느냐 마느냐는 문제도 열차 시간에 맞춰야 한다. 알람을 설정해놓고,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다.
곳에 따라 종일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예상된다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역 대합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열차출발 안내표지판에는 친구가 예매한 열차가 표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친구는 별다른 의심 없이 부산행 열차가 들어오는 7, 8번 홈으로 미리 내려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찌된 일일까. 승객들로 북적거려야할 플랫폼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 수보다 비둘기들이 훨씬 많았다. 예상 밖의 풍경이었다. 열차가 한 대 빠졌나? 그렇다면 예약 번호로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토요일인데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이 별로 없는 것이 이상하다 싶어, 친구는 먹이를 찾는 비둘기처럼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약속을 천금같이 여기는 친구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가 초조함으로 바뀌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친구는 부득불 다음 열차라도 타야겠다는 심정으로 부질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고, 다음 열차가 곧 들어온다는 방송이 흘러 나옴과 동시에 친구는 급히 기존의 승차권을 취소하고 새 승차권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승차 홈이 달랐다. 친구는, 다급하게 에스컬레이터로 뛰어 올라가 옆의 홈으로 다시 내려가는 수고 끝에 겨우 출발 직전의 열차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앞 열차에 대한 소식은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지나가는 승무원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자초지종을 따져 물어야 하는데, 친구의 느긋한 성격이 흥분을 가라앉히라 고 만류했다.
친구가 미처 좌석에 앉기도 전에 지인에게서 카톡’문자가 날아왔다. 행사장에 도착해 미리 준비해 온 김밥을 같이 먹자는 것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친구는 ‘열차가 한 대 빠지는 바람에 약속시간을 못 지키겠다. 점심은 알아서 해결할 테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라’고답을 보냈다. 그리고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며 두근거리던 가슴을 진정시켰다.
직장생활과 결혼 등으로 강산이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 출장이나 여행, 만남, 친정 방문 등 숱하게 열차를 이용해왔던 친구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보상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궁리에 몰두하다보니, 열차는 어느덧 종점인 부산역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차질을 빚은 열차에 대한 사후처리를 확인할 차례였다.
그러나 그 일로 시간을 허비하다보면 세미나 참석을 위해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으니, 그것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일이 연속으로 꼬이는 것을‘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는가 싶었다. 어차피 일은 벌어진 것. 따지는 것은 천천히 해도 된다는 생각이 다시 친구의 행동을 가로막았고, 친구는 서두르지 말라는 경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친구는 열차나 고속버스 승차권 예매를 할 때마다 찾기 쉽게 캡쳐를 해두고는 했다. 취소했던 승차권 확인을 위해 스마트폰 갤러리의 앨범을 뒤적이던 손가락이 얼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 궁금한 얼굴을 불쑥 내민 승차권에는, 출발역과 도착역이 바뀐 채 인쇄가 되어 있었다. 역명을 확인하지 않은 채‘예매하기’를 클릭해버린 모양이었다.
순간, 친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현기증과 함께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다더니, 나에게도 이런 실수가…’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무실로 찾아가 시시콜콜 경위를 따지기라도 했더라면 그 창피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친구는 없는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실수가 명확해진 이상 빠른 인정이 다음 일정을 소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게 된 불편한 생각은 정신건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친구가 모를 리 없었다. 차라리 긍정적이고 차분한 성격에 감사해야 할 일이라며, 친구는 옷매무새를 다듬듯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마음을 다독였다.
웃는 듯 마는 듯 어정쩡한 친구의 표정이 세미나 참석을 위해 만난 지인들을 더 당황하게 한 것은 아니었는지. 약속시간에 늦은 이유를 말로 설명하기조차 낯간지러운 일이 벌어진 것은 무엇보다 하수상한 날씨 탓이라며, 친구는 두어 차례 발바닥을 구르고 하늘을 향해 눈꼬리를 치켜뜨는 것으로 일말의 사건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틈바구니에‘이 정도 실수로 치매 운운하기는 이르다’는 암팡진 생각이 배시시 웃으며 친구의 팔짱을 슬그머니 끼고 들어서는 것을, 친구가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그러구러 웃으며 늙어 가는 것 아니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