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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미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노갑선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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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옷을 다림질한다. 다리미로 살살 문지르니 주름이 펴지며 반듯한 제모습을 갖춘다. 와이셔츠와 양복바지는 봄바람을 쐬러 갈 기대로 부푼 듯 윤기가 흐른다. 내 마음속에 접혀 있던 주름마저 펴지는 기분이다.

남편은 정년퇴직 후 양복을 입을 기회가 잘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입고 다녔던 정장 대신 편한 옷을 선호했다. 청바지와 티셔츠 점프 등 활동적인 옷을 걸치고 취미 생활을 즐겼다. 매일 같이 와이셔츠와 바지를 매끈하게 다려야 하는 수고로움이 줄어들었다. 다리미는 자연스럽게 방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요즘 남편이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하면서 나는 다시 다리미를 잡게 된 게다. 연식이 오래된 탓인지 제 기능을 다 못하고 삐거덕거린다. 어머니가 평생 쓰셨던 다리미에 생각이 머문다.

다실 창가에 나부죽이 앉아 있는 동글납작한 무쇠 다리미다. 어머니 손때가 묻은 물건이지만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동반자 같은 날렵한 인두를 품속에 꼭 안았다. 매끈했던 표면은 곳곳에 균열이 가고 벌겋게 녹이 슬었다. 이글거리는 숯불을 품고 살았기에 속이 시커멓게 탔다. 우둘투둘하게 얽은 모습이 상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힘겨운 세월을 견디느라 여기저기 고장 난 주인을 닮은 꼴이다. 빛이 바래고 헐거운 나무막대 손잡이에서 어머니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어린 날, 어머니는 대청마루에서 다림질을 자주 하였다. 어둠이 사위에 깔리는 시간이면 모깃불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머니는 빨랫줄에 널린 옷을 걷어 꼭꼭 밟아 올을 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모시 치마저고리며 두루마기, 삼베로 만든 일상복 같은 입성이다. 모시옷과 삼베옷은 숯불을 담은 다리미의 불기운이 닿으면 가슬가슬한 자존심을 세웠다. 씨실과 날실이 만들어 낸 작은 구멍으로 바람길을 열었다. 하얀 모시 한복을 입고 나들이 가는 어머니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삼베 이불이나 광목 홑청을 다릴 때는 어머니와 마주 앉아 한쪽 끝을 잡았다. 솔기가 있는 폭을 맞추어 두 손으로 팽팽하게 당겼다. 어머니는 팔을 길게 뻗어 빠른 손놀림으로 주름살을 골고루 폈다. 벌겋게 타는 숯불을 안은 다리미가 가까이 오면 가슴이 콩닥거렸다. 내가 당기는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다리미도 휘청댔다. 작은 불티가 허공으로 날아 올라 홑청에 재를 뿌리는 수도 있었다. 중심을 잡으려는 당신의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혔다. 균형을 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느꼈다.

설날이 다가오면 어머니의 일손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한복을 즐겨 입으셨던 아버지의 바지저고리나 두루마기를 손수 지었다. 고운 명주 천을 자르고 마름질하며 한 땀 한 땀 기웠다. 저고리 깃이나 섶처럼 좁은 곳은 뾰족한 인두로 잔주름을 폈다. 아이들의 설빔을 준비하느라 며칠씩 바느질에 매달렸다. 문풍지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드는 문 앞에서 바람막이처럼 앉아 바느질에 정성을 쏟았다. 인두가 꽂혀 있는 화로와 다리미가 어머니 곁을 지켰다. 안방 구들목에 발을 묻고 부챗살처럼 누운 올망졸망한 아이들 얼굴을 보며 지난한 삶도 견뎠으리라. 어머니는 사그라져 가는 화로의 불씨를 인두로 뒤적이며 시린 가슴을 다독였을까.

젊은 어머니의 가슴에도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6·25전쟁의 어수선한 시기에 당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집안 어른들에게 등 떠밀려 시집을 왔다. 열 살이나 많은 남편은 반반한 땅한 뙈기 없는 무일푼이었다. 덩그런 집에 중학생 남동생과 아홉 살 여동생만 남겨 두고 온 안타까움에 눈물로 나날을 지새웠다. 친정 부모님이 안 계셔서일까.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도 혹독했다. 부잣집에서 부모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어머니로선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다. 갑자기 바뀐 낯선 환경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평생 손발이 부르트도록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워 전답을 늘렸다. 다림질은 당신의 가슴에 접힌 주름살을 펴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사랑이라는 불꽃을 가슴에 담고 다리미로 살았다. 뜨거운 숯불을 안은 다리미가 주름을 편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던 것 같다. 서러움, 원망, 미움 등의 까만 숯덩이를 태우며 인내를 배우지 않았을까. 온 집안사람들과 이웃의 주름진 곳을 일일이 매만지며 온기로 감쌌다. 동네 어른들께“너거 엄마는 천심(天心)”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른 채 예사로 듣고 넘겼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당신의 고달팠던 삶을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아흔을 훌쩍 넘긴 어머니는 사랑의 불씨 하나 붙잡고 다림질을 멈추지 않는다.

내 가슴속에도 잉걸불 담긴 다리미 하나 지녔으면 좋겠다. 빨갛게 타오르는 꽃불로 차갑게 식어가는 마음을 데우고 싶다. 일상에서 받은 상처로 접힌 주름을 다독이면 반지르르하게 펴질 것 같다. 따뜻한 다리미로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접힌 주름살을 펴면 세상은 더 환해지지 않을까.

삐걱거리던 다리미에 불꽃이 서서히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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