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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감은 나의 힘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김미원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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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만나 40여 년간 알고 지내는 친구는 나에게‘너는 생각이 없는 애’라고 자주 말한다. 생각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속으로 아니라 항변하지만 그 이야길 하도 많이 들어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인가 생각하기도 한다. 하긴 힘든 일을 당하거나 풀지 못할 문제가 생기면 잠부터 잤으니 그런 말을 들을 법도 하다.

물론 처음부터 잠이 오는 건 아니다. 화도 나고 머릿속이 와글와글하지만 눈을 꾹 감고 숨을 고르면 어느 새 잠이 들었다. 한숨 자고 나면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힘이 나고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어떻게 무사태평하게 잠을 잘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나는 어쩜 대책 없는 사람이거나 매우 둔감한 사람일 것이다. 혈액형도 단순 무식하다는 O형에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 유형도 외향적이고 골치 아프게 이것저것 분석하지 않는 직관형이다.

『실낙원』을 쓴 와타나베 준이치는『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에서 둔감한 것이 능력이라고 했다. 둔감한 내가 제목에 이끌려 집어 들었는데 읽어갈수록 위안이 되면서 자존감이 높아졌다. 참으로 의외의 주장인데 의사이면서 소설가인 작가는 실제로 예민한 사람이 면역력이 약하다는 과학적인 통계를 인용하며‘둔감한 마음은 신이 주신 최고의 재능이며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둔감함이야말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재능’이라고까지 했다.

내게 생각이 없다고 말한 친구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분석하고 사소한 일도 잘 기억한다. 그래서 상처도 잘 받는다. 너무 예민하고 도가 지나치면 불안에 이른다. 둔감한 덕분인지 나는 10년간 위내시경을 한번도 안 할 정도로 소화기관이 튼튼하다.

엄마는 어렸을 적 공부할 때는 총소리가 나도 뒤돌아보지 말라하셨다. 공부하기 싫어 몸을 비비꼬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두리번거리면 엄마는 어김없이 등짝을 내리치셨다. 어쩌면 내 일에만 몰두하고 다른 것에 둔감한 것이 엄마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내 둔감력의 8할은 엄마 덕분일거라는 생각도 든다.

엄마는 늘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고 했다.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다는 엄마 말을 신봉하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며 살며 어디에 집착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욕망한다고 해서 다 이룰 수 없고, 어느 땐가는 내려와야 하는 인생의 질서를 알기에 완벽을 추구하지 않았다.

큰 욕심이 없어서 권력이나 부의 냄새를 맡으려 코를 킁킁대거나 촉수를 예민하게 뻗지 않고 내 배짱대로 깜냥대로 살았다. 자신의 최대치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고 용을 쓰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적당한 선에서 그래 이쯤이야 하며 살아왔다.

나는 아이큐가 낮은 대신 고맙게도 이해력은 뛰어나다. 문해력도 비교적 뛰어나 국어를 잘했다. 더불어 인간도 잘 이해한다.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관대한 나를 인정하기에 같은 호모사피엔스들에게 연민을 갖고 있다. 누가 예상치 못하는 행동을 했을 때도 그럴 만한 사정이, 무슨 연유가 있겠지 한다. 하여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잘 받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어떤 꿍꿍이가 있거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을 잘 믿듯이 세상을 잘 믿는다. 위험한 놀이기구를 믿고 즐기듯 사회 시스템이 견고하게 잘 돌아가리라 믿는다. 그래서 비판을 잘 하지 않는다.

딸은 내가 자존감이 엄청 높다고 한다. 눈치가 없고 둔해서 잘 주눅 들지 않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웬만해선 힘들다 생각하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어떻게 그날들을 건너왔을까 싶게 고군분투했던 세월인데 나는 그때는 힘들지 않았다. 심지어 나름 행복했다. 정말 무딘 사람이다. 어쩜 통각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여행가서도 남들은 불평하는데 나는 맛있게 먹고 스케줄에 대해 불만도 없다. 같이 간 지인들도 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정말 생각이 없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나는 죽는 날까지 둔감하게 살고 싶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침착하고 흐트러지지 않으며 상냥하고 대범하게 살고 싶다. 와타나베 준이치는 책에서‘둔감력은 재능을 한껏 키우고 활짝 꽃피우게 하는 가장 큰 힘’이라고 했다. 크게 이룬 것도 없지만 지금의 내 모습과 성취는 둔감력에 기대어 있다고 믿는다.

이제 조금만 노력하면 진정한 둔감력과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의경지에 오를 터인데 8부 능선쯤에서 흔들리고 있다. 꼰대가 되려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조금씩 늘어난다. 세상 산 만큼 내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려 한다. 마음이 불편하고 전전긍긍이 늘어난다.

아침에 여러 명에게 보낸 문자에 한 시간이 지나도 답들이 없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라는 문자가 떴다. 그는 무슨 말을 했다가 삭제를 눌렀을까. 젠장, 둔감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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