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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 누이와 고욤나무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흥국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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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시절로 되돌아가 보려고 한다. 여름방학을 기다리던 무더운 날이었다. 나에게는 예쁜 누이가 혜성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얼마 전부터 할머니는 손님이 온다고 누차 말씀을 하셨지만, 일상의 일이려니 무심히 지내고 있었다.
예쁜 누이는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시골인 우리 동네를 지나가는 버스는 하루에 서너 번은 다녔지만, 걸핏하면 거르는 게 부지기수였다. 버스 정류장은 학교 교문 옆에 있었다. 누이는 잘못 알고 미리 내렸다고 했다. 이런 누이의 실수가 우리 가족들 중에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누이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싶다.
교실 유리창살 사이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았다. 여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신 것이 아닌가 하고 아이들의 호기심은 창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웅성웅성 떠들고 있었다. 한 아이가 나를 찾는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누이와 첫 대면을 하게 됐다.
“니를 한눈에 알아 봤데이. 시골 머스매 같지 않고 허여멀건 기 잘생겼드구마. 주변이 훤하니 광채가 났던 기라. 그래, 바로 알았다 아이가.”
집으로 가는 길에서 던진 일성(一聲)이었다. 누이의 사투리는 어감(語感)이 달콤했고, 내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학교 길은 봇둑길을 지나기도 하고, 개울을 건너기도 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엔 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빨간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황토밭을 가로지르는 꼬부랑 길도 있었다. 누이 앞에서 걸을 때는 혹여나 누이가 놀랄까 봐 길섶에서 튀어나오는 개구리와 풀벌레들을 쫓아 주었다. 누이 뒤에서 걸을 때는 황토길에 콕콕 찍힌 누이의 구두 발자국을 내 발자국으로 포개 누르며 누이가 눈치 채지 않게 조심조심 걸었다.
경자 누이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어느 누구보다도 축하해 주었다. 환하게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펼쳐 보였던 그 예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졸업장 그리고 우등상과 개근상장을 누이에게 안겨줬을 때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웃동네 면소제지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누이에게 반장 임명장을 펼쳐 보일 때에도 기뻐하는 누이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경자누이는 3년이 넘도록 우리 식구들과 오순도순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동네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건넛마을 아주머니를 조용히 만나셨다. 며칠 전에 만나신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후로, 우리 집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누이가 시집을 간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삽시간에 일파만파 퍼져 갔고, 결혼식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건넛마을에 키 크고 잘생긴 형은 경자누이를 우리 집에서 사뿐히 데리고 갔다. 나에게서 빼앗아갔다.
아침이면 나를 잠에서 깨웠던 누이는 다시는 나를 깨우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나를 맞아주던 누이도 없었다. 썰렁한 집안 분위기는 더욱 누이를 보고 싶게 했다. 괜히 집 안팎을 기웃거렸고, 곧장이라도 누이가 뛰쳐나오며 나를 부를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집 안 곳곳에 누이의 모습이 숨어서 살고 있었다.
시집간 누이네 마당 한편엔 커다란 고욤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서서 누이 대신 나를 쓸쓸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누이가 보고 싶을 때면, 그 고욤나무를 바라보게 되었고, 고욤나무가 점점 내 누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누이를 만나고 오던 날 밤, 배웅 나온 누이와 나는 칠흑의 어둠을 뚫고 고욤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보름달을 함께 보았다.
“어쩌면 좋노, 누이가 그렇게도 좋노?”
누이는 살포시 나를 안아 주었다. 누이의 품이 그리도 포근한지 몰랐다. 그리도 아늑한지 몰랐다. 달빛이 흐르는 고욤나무 그림자가 발 아래로 길게 누워 있고, 그 위에 누이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었다.음츠린 어깨 위로 차가운 밤바람이 고욤나무 가지에 걸려 잠시 숨을 멈추고 있었다. 누이의 손을 놓고 갈팡질팡 집으로 돌아오는 내 머리 위에선 누이대신 보름달이 고만큼씩 따라오며 어두운 발밑을 밝혀주고 있었다.
쓸쓸함이 가득 찼던 가을날, 누이는 갑자기 이사를 갔다. 고욤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남겨 놓고 서울로 떠났다. 누이가 이사 가는 그날도 누이는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났다.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나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을 때, 풀풀 먼지를 털며 고개를 힘겹게 넘는 버스가 내 옆으로 지나갔다. 만원버스에 갇혀 있던 누이는 손을 휘저으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의심하면서도 얼떨결에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누이는 우리 동네를 떠나갔다. 내 곁에서 멀리 떠나갔다. 황토색 시골 버스는 누이를 나에게 데려다 주었다. 황토색 시골 버스는 누이를 나에게서 데리고 갔다.
이젠 고욤나무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다. 양지마을이 썰렁해질 무렵, 우리 가족도 고욤나무를 먼발치에 두고 읍내로 이사를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르다 보니 누이와의 추억이 점점 희미해지려고 한다. 올봄에는 앞마당에 고욤나무를 심어야겠다. 고욤나무가 쑥쑥 자라서, 예전처럼 보름달이 새 고욤나무 가지에 앉는 날, 누이와 지낸 꿈같은 날들이 더 절실하게 그리고 더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을까.
누님! 누님은 고운 모습으로 언제나 제 맘속에 살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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