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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한국문인협회 로고 허복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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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따오 공항에 내리자 붉은 글씨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중국스럽다. 공산국가는 처음이라 살짝 긴장이 되기도 했다. 혹시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현지 안내인을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하기도 했다. 출구를 벗어나서도 우리가 찾는 안내인이 보이지 않아 가족들이 흩어져 찾아야 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작은 팻말을 든 작은 남자가 보였다. 피부도 까무잡잡하고 옷도 검다. 겨울이라 그런지 작은 두상에 머리까지 박박 민 게 몹시 추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 이름을 묻는 한국말이 능숙하다. 다행스러워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가족들도 안심이 된 듯 표정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곧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소개하는 선택 관광지를 보니 자신이 벌어야 할 수입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첩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밀문이 열리는 짝퉁 가방 가게며 고가의 라텍스 매장을 돌았고 우리는 강매에 시달렸다. 끝내 우리가 어떤 상품도 구매하지 않고 빈손으로 나오자 그의 표정이 어둡고 무겁다. 익히 듣던 가이드의 횡포가 느껴졌다. 여행의 환상을 깨버리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더욱이 볼멘소리하는 두 아들에게 민망하기까지 했다. 가이드는 자신에게 도움이 적은 곳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지나쳐서 우리는 안내지에서 본 장소를 지나쳤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곤 했다.
독일 궁궐을 축소하여 만든 영빈관에 도착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어느 것 하나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모든 자재는 독일에서 직접 실어다 만들었단다. 천정이 열리는 화실, 아름다운 샹들리에, 고급 장식장이 놓인 접견실, 마오쩌뚱이 머물렀다는 침실, 음식을 나르던 엘리베이터가 있는 주방을 거쳐 아이들 방을 지날 때 불현듯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깡마른 손으로 창틀이며 책상, 피아노를 쓰다듬고 지나가는데 서글픈 눈빛이 슬쩍 비쳤다. 자녀들에게 넉넉하게 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부모라는 공통분모를 찾고 나니 그에게서도 사람 냄새가 났다. 그가 경제적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도 조금씩 용서가 됐다.
칭따오에서의 마지막 저녁, 우리는 밤에 봐야 제멋이라는 불야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전날부터 불야성엔 꼭 가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원하던 곳을 가게 되어 그런지 안내하는 그의 목소리가 가볍다. 하지만 마이크를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머리를 숙이고 앞 의자에 머리를 대고 엎드린다. 졸려서 그런가 했더니 한 손으로 옆구리와 배를 쓰다듬는다. 수고로움이 어둠과 함께 그의 등에 내려앉았다. 혹시 지병이 있는 것인지 그날 먹은 음식에 체기라도 있는 것인지 다정한 위로 한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잠시라도 더 쉴 수 있도록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7년 동안 단 한 번도 축구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는 축구장을 고통스럽게 한숨을 쉬면서도 덤덤하게 이야기하려고 애쓰던,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부를 독식한 자들의 비행을 신랄하게 꼬집던 그는 매일 밤 오늘 본 모습처럼 그렇게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을 게다. 나는 아픈 곳이 있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조용히 엎드려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말 못 할 슬픔이 나와 그를 함께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어둡고 초라한 등은 내 아버지의 등이었고 거친 손 등은 저녁마다 석탄 가루를 씻어 내던 내 아버지의 손등이었다. 기절한 듯 움츠린 채 꼼짝 않는 그를 한참을 보았다. 내가 아버지에게 따뜻하지 못했던 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저어댔다.
현란한 불빛과 노래와 춤이 가득한 불야성에 도착하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앞장서서 걸었다. 그가 탕후루를 사서 우리에게 건넸다. 차가운 탕후루가 입속에서 부서지며 녹아내렸다. 그가 갖고 있던 수전노 같던 차갑고 낯선 이미지도 깨지면서 따스한 과일향이 솟았다. 
헤어지는 날 아침, 그는 큰 도시를 마음껏 여행하고 싶다는 포부를 이야기했다. 우리에게도 더 멋지고 큰 도시를 여행해 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안내인다운 작별인사에 감동이 가시기도 전 그는 선물용 병따개와 땅콩과 대추를 꺼내 들었다. 선물용 가게를 못 들어가게 극구 말리던 이유를 알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의 투철한 직업의식과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문제가 뭉클함으로 목젖을 적셨다. 라텍스 베게라도 하나 살 걸 그랬다. 비행기 탑승장으로 향하는 우리를 향해 마지막까지 한국에 가면 평가 잘 부탁드린다고 꾸벅 인사를 했다.
며칠간의 짧은 인연이지만 그를 만난 것이 값진 경험이었다. 그의 강한 생활력과 상술은 대비되면서도 이해되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의 삶이었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주어진 삶에 책임을 다하는 진지한 그와 같은 사람을, 그런 눈빛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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