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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나들이·2

한국문인협회 로고 유현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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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이 왔다.
‘교동도에 가려고 합니다.’
지난번 순담계곡에 함께 갔던 지인이다. 무료하던 터라 같이 가겠느냐는 물음에 선뜻 따라나서기로 한다. 강화읍에서 두 가족이 한 차로 출발했다.
교동대교는 아직 먼데 꼬리문 자동차 행렬은 끝이 없다. 설 연휴 첫날이라 귀향 차량과 관광객이 몰린 모양이다. 석모도로 목적지를 변경하려다가 오늘 같은 날은 거기도 매한가지일 것 같아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지루한 시간을 견딘 후에야 검문소에 출입 신고를 하고 교동대교를 건넜다.
교동도는 본도를 제외하고 강화군에서 가장 큰 섬이다. 교통이 열악한 탓에 조선시대 연산군과 광해군이 유배를 왔던 곳이다. 그곳에 2014년 본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가 건설되어 주민들은 배 대신 차를 타고 섬을 넘나든다. 교통이 편리해지자 수도권 당일 여행지로 각광받으면서 섬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제법 활기를 띠고 있다.
다리가 개통되고 처음으로 교동도를 방문했던 때는 가을이었다. 교동대교에서 바라본 교동도는 오색으로 물든 단풍이 잔잔한 바닷물과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했다. 겉모습은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평온했다.
계절을 달리한 1월 말에 다시 찾은 교동도다. 그토록 매섭던 겨울 추위도 몸을 부풀리며 꿈틀대는 봄의 태동에는 힘을 잃어가는 것 같다. 바람도 없고 포근해 나들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차가 난정저수지로 향했다. 지난해 해바라기 축제가 열렸던 드넓은 밭은 비질을 한 듯 정갈하게 단장되어 새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강 건너 북한이 바로 보이는 철조망 앞에 주차했다. 강화도는 갯벌로 인해 물이 탁한데 이곳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실눈을 뜨고 북녘을 바라본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헐벗었던 산처럼 북한의 산은 아직도 벌거숭이다. 북한 마을이 훤하게 보이는데 사람 왕래는 없고 정적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먼 나라보다 가기 어려운 저곳.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세상에 단 하나의 분단국인 조국의 모습에 마음이 무겁다.
교동도는 북한을 떠나온 피난민들이 고향 가까이에 머물다 종전되면 바로 돌아가리라 보퉁이를 내려놓았다던 곳이다. 이제나저제나 애타게 그날을 기다리며 70여 년을 발붙이고 산 그들의 두 번째 고향이다. 긴긴 세월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돌아가지 못할 줄 누군들 알았으랴! 피난민들은 하나둘 타지로 떠나기도, 세상을 등지기도 해서 이제 몇 사람 남아 있지 않다.
1998년 대기업 모 회장이 소 1001마리를 몰고 고향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17세 때 부친 몰래 소판돈 70원을 들고가 출해 남한에서 성공한 실향민이다. 그는 ‘소 한 마리 빚을 소 1001마리로 늘려서 갚으려고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간다’고 했다.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았을 텐데, 통일은 요원하니 그렇게나마 고향 땅을 밟고 싶었을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 일은 남북 정상 회담을, 금강산 개발과 개성공단이 건립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 남북관계가 퍽 유연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고향 갈 수 있으리라 희망이 움트던 실향민들의 가슴은 또 무너졌으리라.
나는 강화도가 고향이라 유년 시절 대남 방송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전쟁이 발발하는 꿈을 자주 꿨다. 무서워서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나 현실이 아닌 것에 안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남북관계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철새만이 자유로이 남북한을 오간다.
계속된 영하의 날씨에 철조망 안쪽 난정저수지는 얼음판으로 변해 있다. 저수지의 물결이 휴전선처럼 얼음판 곳곳에 얼음 둑을 만들어 놓았다. 그 모습이 피난민들의 이마 주름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얼음판으로 들어서니 쩍쩍 얼음판 갈라지는 소리에 신경이 예민해진다. 고양이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편에서 얼음낚시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안도하며 조심스레 얼음을 지쳐본다.
어릴 적 벼 베고 난 논에 물이 얼면, 다른 놀이가 없는 아이들은 썰매를 가지고 나와 종일 얼음판에서 놀았다. 얼음판이라고 해야 다랑논에 벼 그루터기가 얼음 위로 올라와 있어 썰매가 자꾸 걸려서 엎어지기 일쑤였다. 그때 훼방꾼 같았던 벼 그루터기마저도 정겹게 다가온다.
얼음판 위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손에 잡고 일행에게 끌어달라고 했다. 내가 무거워서인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끄는 사람이 되려 끌려온다. 나뭇가지를 반으로 꺾어 두 발밑에 대고 끄니 곧잘 나아간다.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깔깔대며 얼음판 위에서 미끄럼을 탔다. 시름없이 천진하게 웃어 본 것이 얼마 만인가.
해가 지기 전에 피난민들이 봇짐을 풀었다던 교동시장도 둘러보기로 한다. 오후 4시쯤이면 도시민들이 빠져나갈 시간인데 아직도 시장은 입구부터 붐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보다 상점들도 많아지고, 파는 물건들도 다양해졌다.
그때 약방, 다방, 이발소, 신발가게 등 1970년대 영화 세트장 같은 옛 모습을 둘러보았던 터라, 오늘은 교동에서 생산한 농산물 판매장을 구경하고 다녔다. 떡국 떡과 누룽지, 표고버섯을 샀다.
오후 5시가 넘었는데 해가 한 뼘은 남아 있다. 문득 이 한 뼘 남은 해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피난민들의 ‘희망의 끈’ 길이인 것만 같은 생각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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