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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과 인생

한국문인협회 로고 유상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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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도 잊게 만든다는 바둑은 도대체 누가, 언제, 무슨 동기로 만들었을까. 문헌에 대략 약 4000년의 역사를 지녔다는 것만 봐도 오랜 세월 인류와 접했다는 걸 금방 알 수가 있다.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 그곳에 오묘한 삶의 진리가 있을 줄이야. 죽은 돌도 살리고 살아 있는 돌도 죽는 무궁무진, 온갖 신비스러운 변화가 곳곳에 포진하여 인간의 지능을 접수하고 있다.
나와 바둑과의 인연도 어언 50년이 되었다. 그랬던 내가 한때 식칼로 무를 자르듯이 바둑과 절연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담배라는 복병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한 모금도 피지 않다가도 유독 인터넷 바둑을 둘 때마다 피워 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내기도 걸리지 않은 바둑을 두면서 왜 그리 담배에 집착했던 것일까. 그건 지나친 승부욕을 지닌 못된 성격 탓이었다. 대마(大馬)의 몰림으로 인한 초조와 불안, 그리고 이어지는 패배, 그로 인해 승률이 떨어지고 그 밑의 단(段)으로 떨어지는 불명예스러운 자존심, 뭐 이런 것들이 주된 원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담배를 피웠다 하면 묘수가 나와서 상황을 역전시키곤 했으니까, 담배야말로 우군 중의 우군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했다. 하루 저녁 바둑 세 판에 한 갑의 담배는 정상적인 몸을 좀먹기 시작했다. 기침과 가래가 동반하고 숨마저 가빠 오기 시작한다. 일상이 온통 술에 취한 낙타처럼 뒤틀리고, 아내는 “당신 이러다 오십도 못 넘기고 죽는다”라면서 바둑을 끊든지 아니면 담배를 안 피우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재촉했다.
4천 판이 넘는 바둑을 두면서 연기로 날려버린 담배는 몇 갑이나 되었을까. 담배를 사기 위해 푼돈처럼 나간 돈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그 독한 니코틴이 내 건강을 좀비처럼 파먹은 걸 알기나 했을까.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급기야 바둑을 접기로 결심했다. 우선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그랬던 내가 20년 만인 지난해에 다시 바둑돌을 잡기 시작했다. 군수배 바둑대회가 있으니 함께 참여하자는 선배의 부탁 때문이었다. 왕년에 내 실력을 알고 있던 선배로부터 빈자리를 메워 달라는 간곡한 청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종심(從心)이 가까워져 오면서 가장 좋아했던 바둑이라는 취미를 되살리고 말았다.
협회에 가입까지 하고 예전 못지않은 바둑 실력으로 기존 회원들로부터 다크호스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 나는 급기야 올해 10월 정선군에서 있었던 4개 시군 바둑대회에서 개인전 1위를 하는 성과를 이뤘다. 명실상부한 지역의 바둑 고수로 다시금 우뚝 서게 된 게 아닌가.
바둑을 다시 시작했으나 담배는 물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인생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말인가. 지면 어때 하면서 초연한 자세로 바둑판 앞에 앉는다. 그러니 몸도 정신도 좋아하고 승률도 올라간다. 그러나 바둑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이 여전히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마다 예전에 내가 다시 소환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기사였던 조훈현 선생은 한 판의 바둑을 둘 때마다 장미 담배 세 갑을 피웠다고 한다. 애제자 이창호에게 연이어 패하자, 담배를 끊었다는 일화도 있다. 바둑과 담배는 필연의 소산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바둑 두는 사람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가르침이 있다. 위기십결(圍棋十訣) 중 첫 번째 가르침은 부득탐승(不得貪勝)이다. 너무 이기려고만 하지 말라는 뜻이다. 생존 경쟁의 치열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남을 이겨야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오늘도 사투를 벌이는 모양새 아닌가. 너무 이기려고만 하다 보면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고, 결국 그 약점으로 인해서 인생을 그르치게 된다는 경고의 뜻이라고 생각된다.
훌륭한 인성을 지닌 자녀로 만들고 싶다면, 바둑을 가르치라고 한다. 삼라만상의 조화로움이 그 속에 있고, 그걸 깨치고 배우다 보면 스스로 좋은 인성의 소유자로 길들여진다는 얘기다. 공자가 이르기를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라고 했다. 이렇듯 수천 년간 인류와 함께하며 정서적 신앙과도 같았던 바둑도 어둠에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의 틀을 벗어나 세계로 전파되던 바둑이었는데,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이 두 점을 깔고도 지는 기계와의 전쟁에서 인간 스스로가 무너져 버린 격이 된 것이다. 세계 최고가 아니면 그 어떤 종목의 스포츠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만우청락이라, 근심을 잊게 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제공했던 바둑이 역사 속 유물로 사라지지 않도록 후진 양성에 온 국민이 발 벗고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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