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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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내렸다. 어린 자녀들의 통곡과 지인들의 오열 속에 그녀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어느 죽음인들 슬프지 않은 것이 없건만 그녀의 죽음은 슬픔을 넘어 비통함이었다. 남편 일찍 보내고 오랜 세월 홀로 지내다 사랑하는 사람 만나 행복해지려고 하는 그때, 어린 삼 남매를 남겨두고 아무런 말 한마디 못한 채 10여 년 전에 떠난 남편 곁으로 갔다. 떠나기 하루 전날도 화사한 웃음으로 우리들에게 민화 지도를 했는데, 밤사이 아무도 모르게 먼 길을 떠났다. 바람처럼.
그녀의 삶은 50세를 조금 넘겼다. 그 시간을 살려고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던가. 슬픔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 젊음이, 그 재주가, 그 열정이 아깝기만 했다. 그녀의 주변은 항상 즐거움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바람은 오직 자기로 인해 타인이 행복하면 자신도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떠나자 모두 망연자실할 말을 잃었다. 혼자 몸으로 돌도 채 되지 않은 막둥이와 초등학생 둘을 키우면서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내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녀가 떠난 뒤 나는 민화 그리기를 멈추었다. 도저히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그런 죽음을 보면서 나 역시 언제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고개를 든다. 내 몸 이곳저곳이 고장이 나고 병원 신세를 지는 날이 많아지면서부터인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 닥쳤을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후세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후세계는 존재할까, 종교인들이 말하는 지옥이나 천국은 정말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해답을 주는 수많은 책들 중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타노트」가 있다.
사후세계를 경험한 대통령이 과학부 장관에게 사후세계에 대한 연구를 지시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사람들이 사후세계를 체험하는 내용이다. 실험하는 도중 죽을 수도 있으므로 사형수들 중에서 희망하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진행한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죽음의 경지에까지 갔다가 다시 현재로 되돌아와서 체험한 내용을 증언한다. 그들에 의하면 죽은 후 천계에 가서 자신이 평생 살아온 행동들에 대해 심판을 받고, 영혼은 천사들의 제국으로 간다는 내용이다. 인류 모두의 관심사인 사후세계를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위트로 죽음에 관한 내용을 가볍고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영계 탐사 소설이다.
나는 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어떤 세상으로 떠날까 궁금할 때가 많다. 별 탈 없이 순하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평화롭게 항해를 끝나길 소망하지만 두렵다. 이제 더 이상 되돌아갈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기에, 죽음을 생각하면 이성적으로는 삶의 끝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처럼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 둘 계속하여 나의 곁을 떠나고 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오빠, 친구, 심지어 후배까지. 나도 이제 인생 항해의 닻을 내릴 준비를 해야 하는 시점에 다다른 것 같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온갖 질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떠올라 가슴을 적시곤 한다. 어머니가 누워 계신 요양병원에 들렀을 때, 코에 튜브를 꽂고 입을 벌린 채 정물처럼 누워 있는 환자들을 보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것은 누구를 위한 생명의 연장인지 회의가 들었다. 생명의 권리는 누굴까? 나일까, 아니면 창조주, 국가의 법?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다.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고심 끝에 생명 연장을 거부하는 신청서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삶이 존엄한 것처럼 죽음도 품위 있고 존엄성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시간이 짧은 나, 이런 시간들이 나에게 올 것이라는 것을 육십 대만 해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칠십 대를 맞으면서 다가온 이 현실이 때로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세상에 늙지 않는 사람 없고, 죽지 않는 사람도 없다. 누구나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모두 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죽음을 외면한 채 오늘을 살아간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에 전례가 없는 장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무병장수를 꿈꾸지만, 갖은 질병을 앓으면서 오래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쉬운 말이 있지만 그것이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던가. 흐르는 시간 앞에서 그냥 바라만 볼 수밖에. 제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죽음 너머의 세상은 미스터리이다.
100세 시대, 말년을 병마와 싸우다가 요양병원에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가야만 하는 인간의 시간, 정말로 피하고 싶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인생의 한 부분이다.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생사는 신의 선택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는데, 그렇다면 왜 신은 이리도 가혹한 종말을 인간들에게 기획하였는지. 왜 신은 젊고 착한 사람들을 그리 일찍 데려가는지, 왜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을 데려가는지 고희가 지나도 모르겠다.
해가 지면 어둠이 찾아오듯 슬그머니 다가온 노년, 그저 스산하기만 하다. 흘러간 세월의 강 앞에 서서 가뭇한 시간을 되돌아보며 오늘 하루를 소중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목련이 지고 있다. 또 한 생명이 가고 있다. 그리움은 남은 자들의 몫이라 했던가. 그녀가 보고 싶다. 내일은 그녀의 영전에 국화꽃 한 송이 건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