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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보봐르의 묘비 앞에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황수남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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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프랑스 파리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는 꼭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묘지를 가보리라 생각하고 몽파르나스 공동묘지를 찾았다. 렌트카를 하여 파리 시내의 좁은 골목길을 구불구불 돌다가 길가에 주차를 하고 입구로 들어섰다. 안내원에게 “사르트르”라고 말하자 그는 얼른 오른쪽으로 가보라고 친절하게 손짓을 했다. 몇 개의 비석을 지나가니 사르트르 보봐르의 이름이 적힌 연한 갈색 대리석 비석이 있었다.
‘JEAN PAUL SARTRE(1905-1980) / SIMONE DE BEAUVOIR (1908-1986).’
비석 아래 두 단으로 된 제단에는 향을 꽂는 유리병 두 개와 분홍, 빨간, 하얀 장미꽃이 두 송이씩 놓여 있었다. 사탕과 노란 귤도 누군가가 올려놓았다. 멀리서 온 우리도 그들의 안식을 빌었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의 거두인 사르트르와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보봐르에게 말이다.
대학 시절에 사르트르의 「구토」와 「존재와 무」를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아 끙끙거렸고, 「제2의 성」의 저자인 보봐르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났다. 키는 작지만 까만 테의 안경을 쓰고 날카로운 눈으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사르트르와 키가 크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지성의 보봐르를 말이다. 20세기의 이 지성인들은 1929년 ‘계약 결혼’을 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연인이면서 동반자로 51년간 동고동락을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철학 교수 자격시험 준비를 하면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소르본느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보봐르를 만난다. 그는 보봐르에게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자 2년간 계약 결혼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녀가 이를 승낙함으로써 둘의 계약이 성립된다. 자유 허용, 영혼의 정절, 육체의 자유, 관계의 투명성을 기반으로 둔 것이다.
사르트르는 파리 출생으로 2세 때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어머니가 열한 살 때 재혼하여 좀 방황했으나, 프랑스 국립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1938년 소설 「구토」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구토」는 ‘부조리’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실존주의를 선언한 사르트르는 2차 세계대전에 소집되어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극적으로 파리로 돌아와서 「존재와 무」(1943)를 발표한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데, 이는 스스로 선택해서 존재 실현을 추구하여 자유롭지만 책임도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다.
보봐르는 『제2의 성』(1949)을 출판하는데 1주일 만에 2만 2천 권이 팔렸고, 미국에서는 1953년에 나온 영역본이 200만 부 이상 팔렸다. 페미니즘의 대모가 된 것이다. 여성의 자유 의지와 주체성을 강조한 이 글은 남성들의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여성들의 대환호를 받았다. 이와 같이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20세기 문학과 철학과 여성사에 한 획을 긋는 지성인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계약 결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등 위태로운 상황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정신적인 동반자로서 결코 연인의 자리를 내어놓지 않았다. 사상을 공유하고 서로의 책을 읽어 주고 비판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보봐르가 그녀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어 고여서 썩는 물이 되지 않게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변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한 가지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난 그대 보봐르와 늘 함께하리라는 사실이라오”라는 말로 그녀와의 약속을 확인했다. 그에 대한 답으로 보봐르는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한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말할 때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두 개인 사이의 조화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그렇다. 이 둘의 계약 결혼은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서로를 지탱하면서 동반자로서 임무를 다한 것이다.
사르트르가 1980년 75세에 세상을 하직하자 보봐르는 “사르트르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우리의 삶이 그토록 오랫동안 조화롭게 하나였다는 사실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50년간 이어진 그들의 계약 결혼은 아름다웠느라고…. 그리고 보봐르는 그 후 6년 뒤 세상을 떠났다. “진정한 사랑은 남녀 모두 주체가 되어… 다른 쪽을 구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녀는 사르트르와 같이 여기에 묻힘으로써 영원한 동반자로 남은 것이다.
몽파르나스 묘지를 나오니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추구했던 사랑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사랑’을 주창한 보봐르와 이를 동조해 준 사르트르식 사랑은 오늘을 사는 21세기의 사랑을 예감한 것이리라.
그리고 ‘나의 사랑은 어떤 것이지?’ 새삼 돌아보았다. 20세기를 뒤흔든 그들의 계약 결혼과 21세기 동양의 평범한 나의 정식 결혼은 무엇이 다를까? 60세가 넘고 보니 보봐르가 주창한 타자화된 ‘제2의 성’이 좌충우돌하면서 살아간 어설픈 내 모습이 보였다. 동양의 보수적인 사회의 결혼 형태에서 과연 ‘구속되지 않은 삶’을 살 수가 있었을까? 그저 여성적 차이를 인정하고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뚜벅뚜벅 걸어온 ‘나’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서로 간의 노력과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리라. 어떤 형태의 결혼이건 결혼은 결국 서로의 치열한 노력과 사랑으로 실존을 찾아갈 때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닐까.
하늘을 쳐다보니 34년 동반자인 우리 부부에게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인사했다.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갈구했던 그 ‘자유’의 구름일까? 그들에 대한 상념과 내 인생에 대한 미련이 함께 출렁거리고 있었다. 파리의 청쾌한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이곳에 꼭 오고 싶어 하던 남편과 나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잠시 배회했다. 계약 결혼의 영속을 꾀한 그들의 사랑은 우리 부부의 정신을 살짝 일깨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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