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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박남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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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완연하다. 겨우내 이상 기온으로 변덕을 부리더니 계절의 전령은 어김없이 봄소식을 전해왔다. 모처럼 뒷동산으로 봄맞이를 하러 올랐다. 꼬물꼬물 새싹들이 배꼽 인사를 하고 수줍은 진달래가 봄 처녀로 돌아왔다. 부슬부슬 봄비가 오는데도 둘레길 산책을 나서며 아직 내게 이런 감성이 남아 있어 다행이라며 혼자 피식 웃었다.

우리 부부는 젊어서부터 나이 들수록 매사를 함께 공유하고 나누며 보기 좋게 늙어 가자고 종종 약속했다. 대부분 부부가 그러하듯 참 열심히 살아왔다. 매사를 의논하고 힘을 모아 해결하고 어려운 짐도 나누어지며 여기까지 왔다.

며칠 전 우리 동네 대형병원 건물 외벽에 내걸린 봄을 맞이하는 현수막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봄은 겨울을 거쳐야 꽃이고, 꽃은 당신을 스쳐야 사랑인가 봅니다.’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다! 내 인생은 남편과 함께 마지막 꽃을 피워 내기 위해 겨울을 이겨내 다시 봄을 맞으려 살아 온 것 같아서다.

지금 우리는 점점 세상의 책임에서 하나둘 내려오며 우리만의 시간이 늘어나니, 여유롭게 나이 들어가고 싶어한다. 인생의 정상에서 바른 걸음으로 삐끗거리지 않고 편안히 내려오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예전에 발표한 내 수필「닮아 가는 삶」에서 서로 점점 닮아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이 컸기에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랐다.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 반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 와 보니 닮은 점도 많아졌지만, 그렇지 못한 점도 예상치 못하게 자꾸 비집고 나와 가끔은 버겁다.

신앙 안에서 동반자가 되고, 취미도 하나쯤은 함께 하자며 새롭게 취미 생활을시작한 지 3년 차다. 한주에 한두 번 야외로 운동을 하러 가며 공통적 관심사가 늘어나니 대화도 많아지는 편이다.

잘했다 싶지만 가끔은 부딪치는 일도 생긴다. 누구라도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지만, 서로 필요 없는 참견을 하다가 맘에 없는 충돌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함께하는 그 시간이 행복하고 건강도 지키기에 우리는 다시 의기투합하며 잘 익어 가는 약속을 지키는 중이다.

지금의 생각은 부부란 닮아 가며 죽이 척척 맞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서로 다름도 인정하며 손뼉 치고 응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뒤늦게 깨닫고 있다. 어쩌면 설익은 허망한 꿈을 미리 꾼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주변에 아름답게 익어 가는 후배 부부가 있다. 근면 성실이 그들의 가훈처럼 참 열심히 살아와, 삼 남매를 잘 키워 세상의 인재로 내보내더니 결혼도 잘 시켰다. 그들은‘가정은 지상의 천국’처럼 가정을 꾸미는 부부였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몇 년 만에 모처럼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녀 남편의 모습이 예전같지가 않았다. 조심스레 안부를 물으니 치매가 살짝 왔다고 한다. 너무 놀라 자초지종을 물으니 코로나 시국 3년 동안 조기퇴직을 하고 두문불출 하더니 조금씩 병이 오더란다.

아내인 후배가“그런데 우리 둘은 예전보다 더 일심동체로 살아요” 하며 까르르 웃는다. 이유인즉 자신은 육신이 힘들어 쩔쩔매는데 남편은 정신은 조금 아프지만, 육체가 건강하니 서로 보완하며 산다고 또 웃는다. 밖으로 나가면 가끔 길을 잃으니 자신하고만 외출을 하고 시장을 가서 물건을 사면 무거운 짐을 들어주니 육신의 어려움을 겪는 자신에게 많이 힘이 되고, 집안일도 부탁하면 잘 도와주니 예전보다 편한 점도 있다 하였다.

아마 그녀 나름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움을 삭혀 가는 위로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어쩌면 부부 대부분이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요즈음 선배들이나 친구들 모임에서의 화두는 남편과 어떻게 보내야 노후에 평화로운 부부생활을 잘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부부가 나이 들며 지병 하나씩 얻고 육신도 힘드니 서로에게 도움이 필요한 나이가 된 증거다. 젊어서는 닮아 가는 것을 노부부의 최대 행복이라 생각했던 나였지만 지금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보완해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내 주변에는 또 다른 새로운 일심동체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오늘 산책길에 봄을 맞으며 느낀 소회는‘남편을 스쳐야 내가 봄이고 꽃인 걸 알아내며 봄맞이’를 한 것이다. 그래, 다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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