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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잊지 말아요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조윤수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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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꽃이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그렇다면 꽃이 또한 사람이겠지요. 화려하고 탐스럽고 잘생긴 재배 꽃들은 잘나고 잘 생겼지만, 이 땅에 저절로 피고 지는 들꽃, 풀꽃들도 그와 못지않게 모두 소중하고도 귀한 생명입니다. 이 땅에 살다 간 조상 대대로의 영혼들이 세상에서 못다 한 한을 달래고자 들꽃으로 피고 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6월이 되면 개망초꽃들이 아련히 사라지는 산 숲의 아까 시와 밤꽃 냄새를 맡으며 몰려옵니다. 봄꽃들이 순서대로 찾아와 찬란한 잔치를 펼치고 돌아간 뒤, 산과 들이 푸르게 뒤덮일 때쯤, 때를 맞춰 무리지어 피어나는 하얀 꽃무리가 안개같이 서립니다.

진짜 비슷하나 진짜가 아닌 가짜인 것에‘개’자를 붙이는 것 같습니다. 한때 흔해서 천대시한 것, 개살구, 개꿈, 개떡, 개판, 개복숭아, 또‘개’자로 시작되는 안쓰러운 야생꽃이 있습니다. 개망초꽃.

나라가 망할 때 피어서 농부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당했다는 꽃. 귀화해 온 꽃이 들녘을 차지한다고 더러는 무시하기도 한 꽃, 그러나‘개’자가 붙여진 이름이야말로 지구의 토종인지도 모릅니다. 원초적 본질을 지닌 원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난히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일까요.

진짜도 아니지만 가짜도 아닌 것, 그것이 참모습이지 싶습니다. 나는 개망초꽃을 망초꽃이라고 부릅니다. ‘날 잊지 말아요(Forget me not)’라는 꽃말을 지닌 물망초꽃이 있다지만, 난 개망초꽃을 볼 때마다 그 꽃말을 생각합니다. 판에 박은 듯한 미니 계란후라이 같은 꽃. 노란 꽃술이 도톰하고 하얀 꽃잎이 잘고 짧은, 아이들의 순진한 눈망울 같아서, 망초꽃이라 하고 싶습니다. 기다란 꽃대에 잎이 엇갈려 나다가 윗부분에서 꽃가지가 이리저리 뻗어서 꽃다발을 이룹니다. 두어 포기 한 손에 움켜쥐면 꽃 안개꽃다발 같습니다. 망초꽃 한 다발 속에 빨간 장미 한송이 꽂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픈 훌륭한 애정의 꽃다발이 될 것입니다. 외출할 때 계단을 내려가면 계단 창틀 안으로 둑 밭의 순결한 망초꽃들이 비쳐들어 마음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밝은 나들이가 되라는 눈짓인 듯 생기를 돌게 합니다. 천변을 지나는 길가에 가로수처럼 망초꽃들이 우르르 줄지어 서서 환영하는 하얀 물결을 이룹니다.

6월의 개망초꽃은 땅 파먹기 힘들었던 이 땅을 다녀간 수많은 조상들의 영혼일지도 모릅니다. 이제사 마음 놓고 한숨을 바람에 날리며 흔들거립니다. 망초꽃들은 한스런 민초들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언제 농부를 방했는가 하며, 봄을 시샘하지도 않고 바쁜 농사철 지나서 핍니다. 익어 가는 열매를 탐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제가 올 때를 잘 아는지 산 언저리 빈 농토에 저들의 세상을 만듭니다.

개망초꽃들은 후덥지근한 여름의 전투장에서 쓰러져간 영혼들이기도 합니다. 젊은 혈기를 다 피우지 못한 아까운 영혼들이 우루루 모여서 시위를 합니다. 폐허가 된 고지에도 지금 망초꽃들이 피고 있을 겁니다. 삼팔선이 가로막힌 비무장지대에 망초꽃 언덕이 유난히 많은 것은 그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시골길 가로수가 되어 행인을 반기고, 쓰지 않는 땅을 지키는 망초꽃들, 6월이 아름다운 것은 망초꽃 언덕과 망초꽃길 때문입니다. 속절없이 사라져간 영혼들이 토해내는 한숨이 빈 농토마다 허드레 쪼가리 땅에 서리어 안개처럼 망초꽃밭을 이룹니다. 초록빛 들녘에 달무리같이 하얀 꽃무리가 서립니다.

놀고 있는 빈 터가 쓸쓸하지 않은 것은 망초꽃들 때문입니다. 도란도란 작은 눈망울을 굴리는 망초꽃들이 벌써 날 잊었냐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조상들도 먼 먼 옛날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합니다. 아니 또 그들의 먼 조상은 동이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나를 이 땅에 귀화시켰다고 싫어할 것입니까. 본래 내것네것이어디있었습니까.

더운 여름날 모든 곤충과 벌레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는 망초꽃 들녘, 어느 세월 이전 먼 조상의 정령일 수도 있으며, 다음 세상에 환생한다면, 틀림없이 인간으로 환생할 것을 믿습니다만, 또 알 수 없겠지요. 먼 먼 훗날 내 영혼이 개망초꽃으로 후미진 빈 터에 잠시 수많은 곤충들과 조우하러 올지….

태풍이 몰아칩니다. 개망초꽃들이 들녘마다 한들한들 넌출넌출 곡예를 펼치다가 끝내 쓰러져갈 것을 어찌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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