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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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사랑하는 이가 남기고 간 화초에 꽃망울이 맺힐 때, 또는 그가 그리워 멍하니 앉아 있는 순간 어디선가 홀연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주변을 맴돌 때, 그 꽃망울이나 나비로부터 웃음 짓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 가득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오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때 그것은 일종의 환상으로 또는 실제로 한 정령의 출현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이러한 일들은 전혀 생소한 어떤 것들이 현실세계와는 다른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솟아나와 우리 앞에 현전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형이상학적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예는 특히 시적 경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진정한 시인은 시를 창작함에 있어서 단순한 허구적 상상력에 의해 고안된 생각 또는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심연으로 열려진 감각에 의해 생동하는 어떤 미지의 힘을 강렬한 이미지로서 포착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때 시인의 자아는 현실의 경험적 자아와는 다른, 현상적 세계 이전 존재의 심연에 원초적 통일성으로 존재하는 근원적 존재와 혼연일체를 이루는 또 다른 ‘영원한 나’로 변형된다. 시인은 고양된 시심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존재의 원초적 통일성과 하나가 됨을 통하여 그 근원적 존재를 드러내면서 존재의 기반에 머물며 진실로 존재하는 ‘나’, 시적 천재를 통하여 그 사물의 바탕을 꿰뚫어보는 ‘나’, 곧 참다운 시인이 된다. 따라서 시인은 의미가 박탈된 부조리한 이 세계의 표면에 균열을 내고 심연으로 탐험해 들어가 태초의 원초적 세계의 통일성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 자신의 가능적 실존을 모색하는 모험가이기도 하다.
시인이 지니는 여러 본질적 특성 중에서 주로 이러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조성순 시인은 처녀시집 『목침』(2013)을 포함하여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2017), 『그리고 나는 걸었다』(2019), 『왼손을 위하여』(2020) 등 네편의 시집과 최근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2024)라는 산문집을 내놓은 바 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그리고 그 공존 속에서의 인간의 존재 가능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의거하여 접근해 가는 자연은 공리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 생명이 깃들어 있는, 인간이 교류하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의 기반이다. 따라서 자연은 인간의 영혼과 함께 그 안에 심연을 감추고 있으며 시인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그의 앞에는 영혼과 사물의 심연이 열려 있고, 그는 그 심연의 탐색을 통하여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추구하고 실현해 나아간다.
*
조성순 시인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의 심연으로 깊이 끌려 들어가게 된 것은 아마도 채 열 살도 되기 전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년을 막 벗어난 소년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던졌을 것이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그를 마치 무격처럼 초혼을 통해 심연으로부터 그 존재를 불러내고자 하는 내면의 갈망에 사로잡히게 하였던 것은 아닐까 한다. 「옛집」(『왼손을 위하여』) 중 “아들아, 아들아, 돌아오너라!”라고 뒤란의 감나무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는 상상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아버지의 부름인가? 또 「감꽃」(『목침』)에서 감꽃 속에서 걸어 나와 무명실에 감꽃을 가득 꿰어 목에 걸어주며 손을 꼭 잡아 주는 아버지는 상상의 이미지일 뿐인가 아니면 정령의 출현인가? 다음 작품을 보면 이러한 이미지들이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녹다 그친
봄눈이려니 했다.
오대산 월정사
어둠을 밝히고 떠난 무명(無名)의 부도 위
적멸(寂滅)의 안거(安居)에 드신
흰나비 한 마리
——「흔적」(『목침』) 전문
시인은 눈이 채 녹지도 않은, 때 이른 계절에 출현한 흰나비 한 마리를 부도 속에 잠들어 있는 어느 선사의 현신으로 보고 있다. 즉, 이 경우 나비에 정령이 깃들어 있듯이, “감꽃이 피면/ 아버진 감나무에서 걸어나와/ (중략)/ 감꽃이 지면/ 여리디 여린 감잎 되어/ 감나무로 돌아가시네”(「인동」, 『목침』)에서처럼 시인은 감꽃 속에 아버지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또한「짜장면」에서 짜장면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들에게 보리타작 끝나면 사주겠다고 약속한 아버지는 그 “약속 지키지 못하고 훌쩍 떠나셨”지만, 비오는 날 중국집에서 짜장 향기가 진동할 때 시인에게 절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비오는날
짜장 향기 따라 아버지 오십니다.
가만가만 오셔서 내 온몸을 어루만지고
글썽이는 햇발처럼
울먹울먹 가십니다.
——「짜장면」(『목침』) 부분
여기서 정령의 기운은 화자의 온몸을 감싸며 어루만지는 듯한 신체적 감각을 느끼게 하고 있다. 아버지는 화자 안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상상력의 한계를 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그러나 설령 온 몸을 감싸며 어루만지는 듯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정체는 마치 얼핏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영처럼 불확실한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운명적으로 상상력과 환상 그리고 신들린 듯한 취함의 긴장 사이에서 떠도는 부동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심연이 그 끝까지 다 밝혀질 수 있다면 이미 심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달빛이 비추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듯이 그 심연의 어두컴컴한 내부의 비밀을 얼핏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리움과 두려움의 이율배반의 긴장 속에서 저승의 영혼과의 은밀한 교감을 확신하는 것이다. “내 몸 속/ 우물 하나 있네./ 아득하여 깊이를 알 수 없네.”로 시작되는 「우물」에서 시인은 영혼의 심연을 상징하는 ‘우물’ 끝까지 내려가 보고 싶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워 발길을 돌린다. 그렇지만,
그러나 난 알지
우물이 다한 곳
은하계 저쪽
그 사람
이쪽 우물을 들여다보고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네.
——「우물」(『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라고 하며 이 쪽 세상에 있는 자신을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손짓하여 부르는 저 쪽 세계의 한 영혼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주체성 또는 주관을 포기하고 미지의 심연으로부터 부르는 마력과도 같은 인력에 자신을 내맡길 때 주어지는 어떤 예리한 촉수를 영원을 향해 뻗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그 예리한 촉수는 형이상학적 초월적 세계를 감지하는 초월적 감각이다.
아버지란 존재는 생물학적으로도 자신의 존재가 비롯된 뿌리이자 분신이기도 해서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거칠게 말하여 즉자로서의 나와 대자로서의 나, 또는 경험적 생물학적 나와 개체화되기 이전의 원초적 통일성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나 사이의 관계로 대치될 수도 있다. 후자의 나는 마치 깊은 우물과도 같은 심연 속에 존재하며 마치 그림자처럼 떨쳐낼 수 없으면서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비밀을 감추고 있는 존재이다. 「관계」에서 시인은 진정한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된 채로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에서의 나와 여기에서처럼 그림자와 같은 또 다른 진정한 자기 자신의 존재의 분열 상태를 극복하고 다시 완전한 하나의 통일체가 되는 것에 대한 실존적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피었다 지는데
당신과 나 사이는 피기도 전에 떨어진 나뭇잎 같아
눈부신 연둣빛 신록에 내 몸과 마음을 숨깁니다.
잡으려고 다가가면 도망가고
망설망설하면 그림자 길게 늘이고 기다리는
당신은
나는
——「관계」(『목침』) 부분
여기서 ‘당신’은 현재의 내가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그림자처럼 모호한 심연 속의 나이기도 하고 동시에 피기도 전에 떨어진 나뭇잎 같이 그 관계가 단절된 돌아가신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에게 “당신과 나 사이는 피지 못한 꽃 같아/ 피워야 할 꽃 같아”여전히 회복될 관계로 여겨지며 포기하지 않고 추구해야 할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는 그저 얼핏 보았던 저 쪽의 또 다른 나를 향해 더 핍진한 만남을 추구해 나아가야만 하는 향후의 과제를 안고 있다.
*
심연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탐색하는 시인에게 사물 또한 단단한 표피가 갈라지고 심연이 열린다. 왜냐하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 곧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은 각기 개체로 개별화되기 이전의 존재의 심연에 있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통일체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철학자 엠피도클레스처럼 시인 또한 인간은 모든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근원은 흙, 물, 불, 바람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집보내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취한 「딸에게」에서 시인은
아가야, 내 사랑아/ 너는/ 한때 흙〔地〕이었다./ 물〔水〕이었다./ 불〔火〕이었다./ 바람〔風〕이었다.// 아득한 우주에서 떠돌다 내게 안식을 가져다 준/ 느낌표이다/ 감탄사이다/ 우레다/ 찬란한 광휘다
—「딸에게」(『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라며 고대 우주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간을 바라본다. 형태도 없는 물질로부터 사랑스런 나의 딸로 변화 현출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며 찬란하게 빛나는 변형이다. 이러한 존재의 탄생은 모든 생명체에 적용된다. 심연으로부터의 이러한 존재의 출현을 가장 아름답고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식물의 개화이다. 존재의 개시는 꽃이 피어나는 순간에 폭발하듯 드러난다. 시인에게 꽃은 존재의 아름다움의 극치이며 존재의 완성이다.
나무, 풀, 꽃 등 모든 식물과 동물 곧 자연은 존재의 근원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이다. 따라서 “돌아보니/ 초록이/ 안녕, 하고/ 손을 흔든다”(「교감」, 『왼손을 위하여』)는 자연과의 교감은 시인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또한 이점에서 조성순 시인이 원초적 세계로서의 자연에 특별하게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연은 그의 시적 공간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조성순 시에서 꽃은 주객 분리 이전의 원초적 통일로서의 자연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깊은 산 속 길가의 너도바람꽃에서 군인 시절 정을 나누었던 이름 모를 여인을 떠올리는 「너도바람꽃」과 울릉도 해담길의 동백꽃에서 고교시절 펜팔로 사귀었던 울릉도 소녀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연애편지」를 통해서 조성순의 시에서 꽃이 어떤 시적 의미를 가지는지 그 일면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산속 길을 가다가 어디선가 오라버니, 하고 부르는 소리에 두리번거리다가 돌아보면 길가에서 말갛게 새살거리는게 발걸음을 붙잡고 있지 뭐야. 쿵쾅거리는 가슴 진정하고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보니, 오호라, 지난날 벌이 되어, 나비가 되어 좁은 골목길을 허겁지겁 쫓아가서 만난 더운 숨결이 바로 너였구나
——「너도바람꽃」(『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서리 묻은 단풍보다 더 고운 동백이 반쯤 입을 열고 고혹적으로 웃고 있는 해담길. 한 떼의 소녀들이 붉은 입술연지에 노란 잇몸을 드러내고 동백나무 숲으로 뛰어든다. 꽃나무 가지마다 걸터앉아 다음번엔 늦지 마, 하고 눈 흘기고 있었다.
——「연애편지」(『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너도바람꽃」에서는 “말갛게 새살거리는게 발걸음을 붙잡고 있”는 꽃의 부름이 시의 핵심이면서 시적 전개의 출발점이다. 여기서 꽃의 강렬한 부름에 의해 꽃과 화자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이후 화자는 오라버니, 하고 부르는 옛적의 여인을 떠올린다. 즉, 새살거리며 발길을 붙잡는 꽃으로 인하여 가슴은 쿵쾅거리고 꽃으로부터 더운 숨결마저 느꼈을 것이라 짐작된다.
또한 「연애편지」에서는 “반쯤 입을 열고 고혹적으로 웃고 있는 동백”에서 마찬가지로 강렬한 여인의 성적 유혹과도 같은 충동을 느끼며, 옛날의 연애편지를 주고받던 소녀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꽃은 존재자로서 출현하는 주객 분리 이전의 심층의 근원적 통일성으로 흐르는 강력한 충동들을 그대로 전해주고, 시인은 이것을 다시 여인과 소녀들의 이미지로 변용하고 있다. 조성순의 꽃들은 따라서 유미주의적인 영랑의 모란이나 서정주의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비쳐지는 ‘내 누님 같이 생긴’ 국화꽃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그들의 꽃이 문명의 곁에서 피어있는 반면 조성순의 꽃은 문명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태초의 원초적 모습 그대로 보존된 공간에 피어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백산」은 저마다의 생명을 구가하고 있는 온갖 동식물들의 존재의 향연으로 수놓아진 원시의 지대로서 고고하게 펼쳐진 소백산을 존재의 보고로서 그려내고 있다. 거기에는 오염되지 않은 염시의 생명력이 꿈틀대고 있다. 주목할 두 가지 점은 그 산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들은 인간에게 예속된 존재들이 아니라 인간과 대등한 자격을 지닌 존재로서 그려지고 있다는 점과 식물들에게도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시인은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고라니 산토끼 멀뚱히 바라보며 ‘왜 왔노’ 하며 은근히 제 영역을 침범한 걸 탓하는 듯하고”, 비로봉 능선길에서 “걸음 옮길 때마다 따라와 웃는 동자꽃은 비로자나의 현신인가, 살짝 얼굴 붉혀 ‘낸 줄 알겠니’ 한다”와 같은 구절에서 시인은 인간으로서의 어떤 우선적 지위나 권한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백산은 시인과 같이 “속진에 찌든 사람이 와서 마음 씻고 가는 수행 도량”으로서 존재론적으로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 지적한 바와 같이 동자꽃을 비로자나의 현신으로 봄으로써 꽃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인식을 간파할 수 있고, 다음의 구절
연화봉에서 비로봉 가는 길은 마타리 터리풀 산수국 개당귀 솔나리 물봉선 정영엉겅퀴 참배암차즈기 까실쑥부쟁이 투구꽃, 밤하늘의 별들이 낮 동안 고원에 내려와 몸 바꾸어 피어있고
——「소백산」(『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는 마치 윤동주의 별처럼 정령이 깃든 별들이 지상에 내려와 영혼의 환생(transmigration of souls)을 통해 꽃들로 이동해 들어가는 신비한 현상을 보여주려 하고 있으며, “별 하나 따서 이마에 붙이고, 사람 사는 동네로 몸만 간다”고 하여 별에 깃든 거룩한 영 또는 정신을 얻겠다고 함으로써 분리와 소외의 현실세계 이전의 존재의 심연에 놓인 근원적 통일로서의 본래적 존재의 지대에 이르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시인의 세계인식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금강초롱」은 간결하게 절제된 형식 속에 ‘쇠북’ 소리와도 같은 충격파를 숨기고 있다.
보랏빛 바다였다.// 바위 틈새 외진 곳/ 수줍은 새악시 모양// 겸허한 눈빛으로/ 대지의 소릴 귀담아 들으려는/ 고즈넉한 기다림.// 오욕의 인간사/ 돌아보게// 한 번은 하늘의 계시/ 울릴 것 같은/ 쇠북
——「금강초롱」(『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전문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하고 깊은 산중에 고고하게 피어나는 고고한 미의 전형 금강초롱은 탐욕과 오만으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더럽히고 욕된 상태로 추락해버린 인간의 대척점에 존재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여름에도 눈이 내렸다”는 내성천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 의해 삶의 기반이 파괴되어 버린 예를 보여준다. 눈처럼 하얀 모래사장은 그믐이면 마치 은하수가 흐르는 듯 희게 빛나고, “사람들은/ 무명 홑이불을 들고/ 모래 갱변으로 나가서/ 물을 맞았다.”(「내성천」, 『왼손을 위하여』) 그러나 댐으로 물길이 막히자 하얀 모래사장은 거뭇한 물때와 수초로 덮혀 아름다운 옛 모습을 잃었고, 그와 함께 자연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행복했던 삶도 사라졌다.
다시 「금강초롱」으로 돌아오자면, “대지의 소리”와 “하늘의 계시”는 금강초롱이 여전히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는 태초의 우주자연의 질서와 존재의 진리일 것이며, 이 금강초롱과 함께 신통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능소화(「골목 안 능소화」, 『왼손을 위하여』)는 자신의 심연 내부에 존재의 근원적 통일성 안에서 원초적 존재의 힘을 드러내는 식물의 전형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심연 속에 감추어진 존재의 궁극적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말대로 “보거나 듣는 이의 귀와 눈이 열려 궁극에 닿아 있어야” 하고, “가슴에 흐르는 강물이 이승과 저승으로 넘다들어야 한다.”(「아리랑」,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이 말은 이미 충분히 살펴본 바와 같이 사물과 이 세상 너머 영원의 차원에 존재할 어떤 영혼의 부름에도 귀 기울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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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는 조성순의 시에 있어서의 원초적 세계의 본질적 속성 혹은 그 지형과,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교류의 양상들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그의 시에서 모든 존재자들이 어떻게 존재의 근원인 원초적 통일성으로부터 존재자로서 개별적으로 나타나는지, 이른바 자신의 존재의 실현 곧 가능적 실존의 이행을 어떻게 수행하게 되는지, 그럼으로써 인간의 실존의 의미가 어떻게 성취 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봄의 약동 속에서 존재의 근원적인 충동이 깨어나고, 무정형의 대지의 모태로부터 그 충동은 개별적으로 출현하는 존재자들을 통하여 개체화된다. 개별화된 개체들은 나타남 이전의 근원적 통일체로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서로서로 교류하는 사귐의 관계에 있다. 봄은 존재의 고향 곧 대지의 모성과 거기서 꿈틀대는 생명의 충동을 환기시켜 준다. 천지를 약동하는 기운으로 가득 채우는 봄을 통하여 그 존재의 근원적 충동 안에서 개별화되어 분절된 너와 나는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봄이 와서 피어난 꽃을 보며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와 내가
만나면
봄이다
——「봄」(『왼손을 위하여』) 전문
또한 “냉이꽃은 하얗고/ 꽃다지는 노랗대.// 까짓/ 이름 따윈 몰라도 돼.// 만나서 이렇게 활짝 웃고 있잖아!”(「이름생각」, 『왼손을 위하여』)라고 하며 본질적 통일 속의 동일성을 공유하는 존재에 대한 반가움과 재회의 기쁨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로써 존재자가 세계에 출현하는 이유, 곧 존재 이유란 잠재해 있을 뿐인 무정형의 혼돈 속의 충동으로부터 어떤 형태를 갖는 개체로 출현함으로써 자신의 가능적 존재를 실현하는 것과 동시에 그 근원적 통일성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세계의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 통일성 또는 동일성을 회복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존재의 이유로부터 솟아나는 의지는 시인의 경우 식물의 씨앗에 응축되어있다. 시인이 말하는 ‘신의 메시지’란 이러한 존재 이유와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들고 오는 노오란 살구의 무게에/ 골목이 휘청거린다.// (중략)/ 잘 익은 몸 속에서/ 씨앗이 통통거린다.// 내게 보낸 신의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다.
——「선물」(『왼손을 위하여』) 부분
시인은 씨앗의 통통거림에서 신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다. 씨앗은 “순정한 기운이 맺힌 막막한 그리움의 정화”이며, “세상으로 가는 간절한 기도”(「씨앗」, 『왼손을 위하여』)이다. 그것은 “이 세상 존재하는 것들을 짙붉게 사랑하는 해질 무렵 저녁놀”(「관계」)로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존재는 그리움이고 기대이며, 간절한 소망이다. 씨앗 곧 존재의 근원에는 세상으로 나와 뭇 그리운 존재들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과 그 만남 속에서 존재의 저변에 흐르던 충동들을 발산하며 생명을 추구하려는 기대와 의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향한 존재의 그리움은 영혼의 환생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인동」에서 시인이 “그리운 세상/ 그리운 이 만나고파/ 아버지”라고 노래하는 ‘아버지’는 감나무 안에서 잠자며 겨울을 견딘 후에 봄이 되면 감꽃으로 피어 시인을 만나는 것이다.
“장 서는 날이면 일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괜스레 설레었다”로 시작되는 「장날」은 이러한 미지의 존재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을 질박하고 정겨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흰 광목 차일이 하늘을 가리고, 사람들은 서로 몸을 부비며 장터를 오갔다.
어린 나는 물건보담도 깊은 골 숨은 듯 살다가 장날이면 쏟아져 오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장꾼들이 오는 산골짝과 그곳에서 부는 바람과 하늘빛이 궁금했다.
——「장날」(『왼손을 위하여』) 부분
몸을 부비며 오가는 사람들, 한꺼번에 쏟아져 장터로 모여드는 광경 등 분주한 움직임과 접촉, 그리고 빠른 속도와 큰 규모를 일깨우는 일련의 이미지들을 통하여 이 작품은 말하자면 존재의 축제를 그려내고 있다. 미지의 낯선 사람들의 분주한 접촉에서 어떤 새로운 힘이 분출하고 대규모로 일어나는 급격한 사람들의 움직임 덕분에 그들의 삶의 터전인 산골짝과 하늘도 아연 생명력으로 가득 차오른다. 울긋불긋 각색의 꽃들과 나비 벌들이 잔치를 벌이는 푸르른 산골짝과 나뭇잎과 풀들을 흔들어 일렁이게 하는 바람, 그리고 심연처럼 펼쳐지는 파란 하늘은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서 채워질 것이다. 이와 같이 미지의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와 호기심, 그리고 새로운 존재에 대한 열망으로 실존은 수행되고 진정한 존재는 실현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실존의 기쁨과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실존의 과정 중에 수반되는 고통과 시련, 고독, 그리고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실존의 강력한 힘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존재는 본질적으로 고독과 시련을 이겨내고 자신의 존재를 끝내 실현한다. 별은 고독을 달래주는 동반자이다. 「관계」와 「엉겅퀴」에서 시인은 이러한 고독과 그 고독을 달래주는 별과의 교감과,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존재를 실현해 나아가는 존재의 근원적 힘을 포착하여 제시한다.
서어나무도 밤이 오면/ 외로워 별을 기다리겠지요/ 추위에 떨며 눈물을 삼키겠지요/ 허나, 서어나무는 설움을 끌어올려 봄을 만듭니다/ 고추바람을 맞아 꽃을 피웁니다.
——「관계」부분
깊은 산구렁/ 외롭게 핀 엉겅퀴를 보았네// 통꽃에/ 작은 꽃을 가득 품고 있는// 바람 따라/ 성숙한 꽃들은/ 시집을 간다네// …// 칠흑 같은 밤/ 별들과 주고받은 사연// 꽃가슴에/ 산그늘이 깊어가면/ 일렁이는 고독의 깊이가/ 내게 와 전율하네
——「엉겅퀴」(『왼손을 위하여』) 부분
세찬 바람과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고 다시 꽃을 피우는 서어나무와 작은 꽃들을 키워 바람에 모두 날려버리고 쓸쓸히 외로이 서있는 엉겅퀴는 모두 별을 벗 삼아 시련과 이별의 아픔을 견뎌낸다. 서어나무와 엉겅퀴가 그런 시련과 고독을 느낀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다만 시인은 대면하여 감각적으로 느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시인은 작품 「폭포」에서 이러한 포기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적 충동 또는 힘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 의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물은 살기 위해서 낭떠러지를 뛰어내리는 거다./ 바다를 만나기 위해/ 정신없이 미친 듯이/ 아니 정말 미쳐서/ 죽음을 감내하고서라도 가고자 한다./ 죽어서라도 가고자 하여// 마침내 간다.
——「폭포」(『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모든 것이 역설이다. 살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써야 하고, 미치지 않기 위해서 미쳐야 한다. 만나고 싶어서, 그리움이 사무쳐서, 사랑이 가슴 벅차게 차올라서, 죽어서라도 가고자 하는 것, 이것이 존재의 진실이다.
소금기를 찾아 벼랑을 헤매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산양의 놀라운 동작에 경탄하며 찬사를 보내지만, 그것은 그로서는 생명의 욕구의 이끌림에 따라 위험을 감수하며 온몸을 던져 수행하는 생존을 건 투쟁일 뿐이다. “그러나 너는/ 날 선 작두 위 무격이고/ 몸이 갈망하는/ 생존을 위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마찬가지로 살길을 가다 마주치는 고운 바람꽃이 고운 것만 아닌 것은 거센 풍파의 시련에 맞서 생명을 지키고 틔워내기 위해 나날이 격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날이 절박하고/ 하루하루/ 시시때때/ 존재의 창끝으로/ 격전을 치르고 있다.// 뿌리에서 대궁까지/ 필생을 걸고/ 하늘거리고 있는 것이다.”(이상 「아름다움에 대한 일고」, 『왼손을 위하여』)
따라서 진정으로 아름다움은 멋진 포즈나 고운 빛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자신의 존재를 이어가는 그 생명력에 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실존에 그대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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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극단에는 죽음 또는 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존재의 소멸이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하여 실존에 분명한 한계를 두었지만, 죽음을 또 다른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인식하는 사유도 존재한다. 어차피 시란 것은 이 세계 너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세계를 탐색해 들어가는 한에 있어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 한, 시에 있어서 죽음 또는 존재의 소멸과 그와 관련되는 문제들을 그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시인은 삶으로부터 죽음으로의 이행을 차를 갈아타는 ‘환승’으로 표현하고 있다. 「환승」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살아있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화장 순서를 기다리는 네팔 힌두교도들의 삶과 죽음의 인식에 비하면‘환승’이란 표현도 미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다 남은 시체의 고깃덩이를 개들이 물고 다니는 풍경이 일상화된 곳에서는 말이다. 그러한 세계 속에 잠시라도 머문다면 아마도 역설적으로 죽음의 공포로부터 얼마간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 (중략) // 봄꽃 다한 산등성이 지나/ 불쑥 나타날 게다.// 잘 탈 수 있게/ 물기 마른 삭정이 되어/ 기다릴 게다.
——「환승」(『왼손을 위하여』) 부분
라는 여유를 부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안나푸르나로 가는 트레킹 길에서 마주하는 무와 황량함은 시인에게 모든 존재가 소멸된 죽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황량함으로 가득 찬 그 길은 그러나 시인에게 부정적인 느낌은커녕 오히려 사무친 그리움으로 다가 온다. 모든 존재가 사라진 황량한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도 소멸되어 그 안에 하나로 융합되어 원초적 존재의 상태로 변화할 또 다른 미래의 나에 대한 그리움은 아닐까? “더 이상 황량할 수 없는/ 그러나 돌아서면/ 그리움이 되어 사무쳐오는/ 물 없이 흐르는 강”(「틸리초 가는 길」,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이 황량하기만 한 길에는 그러나 흙먼지를 날리고 돌무더기를 부스러뜨리는 ‘바람’이 있다. 장차 그의 혼은 이 바람이 될 것이 아닐지.
바람과 마찬가지로 연기는 존재 혹은 자아의 소멸을 환기시켜 준다.
더께가 앉아 유리문이 뿌연/ 외딴 점방// 겨우내 묵은 김치/ 막걸리 한 사발// 굴뚝에서 새하얀 연기 오른다.// 어디로 가란 것이냐?
——「산골서정」(『왼손을 위하여』) 부분
연기는 나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 묻는다. 그러나 스무나무 위의 까마귀가 까욱, 하고 사라지면서 나 또한 그 까마귀처럼 또 연기처럼 사라져야 한다고 넌지시 일러주는 것 같다. 그렇다. 연기처럼 사라지지만, 그리운 곳을 향해 부는 바람이 되기도 할 것이다.
「시월」에서 바람은 그리움이며 시인은 밤새 그리움의 바람 편지를 쓴다.
달빛에 목물한/ 귀또리 소리// 잠 못 이뤄/ 생각느니// 닿을 데 없다// 물자작나무 껍질에/ 밤새껏 쓰는/ 바람 편지
——「시월」(『왼손을 위하여』) 전문
귀뚜라미 우는 가을 밤 잠 못 이루는 시인의 그리움은 그 끝이 없다. 바람은 시인의 그리움처럼 물자작나무 껍질을 울리며 밤새 불어대고 시인의 시는 물자작나무 껍질에 밤새 쓰는 그리움의 바람 편지가 된다. 그 바람은 시인이 그리워하는 것들을 향해 밤이 새도록 울어대며 끊임없이 불고 있다.
한편 「그리운 것들」이란 작품에서 시인은 그 그리움의 대상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른 봄날 노란 갯버들 기지개 켜는 소리”, “오지그릇 깊숙이 박아둔 노을빛 무장아찌”, “깊은 겨울밤 윷놀이 내기하여 몰래 꺼내 먹던 이웃집 무구덩이 무 그 깊고 그윽한 맛”, “시골집 토담 너머 밭은 객혈 숨 가쁘게 놓던 아부지 기침 소리”(「그리운 것들」, 『목침』) 등이 그 예로서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진 삶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조성순 시인의 시는 결국 그리움으로 시작하여 그리움으로 끝나는 것 같다. 첫 시집의 첫 작품은 「그리운 것들」이며, 마지막 시집의 마지막 작품은 역시 그리움을 노래한 「피리」이다. 「피리」의 전문을 옮겨본다.
나는야
철 지난 바닷가
누가 마시고 버린
빈 소주병
고추바람
기다리는 소식 모양
불어오시면
오직 당신만을 위한
입술을 열고
뱃고동 피리를 붑니다.
기다리는 소식 같은 고추바람은 나를 그리워하여 내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그 바람이 불어올 때 나는 그 바람에 장단을 맞춰 그리운 ‘당신’을 향해 피리를 분다.
앞으로 조성순 시인이 어떤 그리움의 노래를 부를지, 그 그리움의 바람이 어디로 불어갈지 자못 궁금해지고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