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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전용사여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두수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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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만 해도 서울의 상봉터미널은 한때 강원도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던 버스정류장이었다. 춘천과 서울에 기차가 다니긴 하였지만 두 시간에 한 대꼴로 그것도 2시간이나 걸려야 청량리역에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바쁜 사람들은 시간 절약을 위해서도 버스를 이용하였다.
그 당시야말로 버스정류장을 중심으로 상업 열기가 대단하여 몫이 좋은 곳을 차지한 상인들은 단단히 한몫을 볼 만큼 손님들이 엄청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번창하던 버스정류장이 사양길에 접어들었으니 바로 서울 춘천간 전철이 개통되는 바람에 버스정류장 주위의 낭만은 사라지고 새로운 상업지역이 형성된 것이다.
춘천에 사는 김형락은 오늘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아침 9시 전철을 타고 상봉역에 내렸다. 하루에 청량리로 연결되는 전철이 7∼8회 정도 있긴 하지만 시간 되는 대로 타다 보니 거의가 상봉역에서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상봉역에서 청량리로 가려면 용문에서 출발하는 문산행을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15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급할 것도 없어서 그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의 면모를 살피고 있는데 저만치서 유난히 허리를 굽혀 걷는 할아버지가 걸음을 빨리 하며 지나가시기에 말을 걸었다.
“차 오려면 아직 10분은 더 기다려야 하니까 여기 잠시 쉬어 가셔요.” 
지나치려던 할아버지는 그의 말에 멈칫 서시더니 김형락의 옆으로 다가 앉으신다.
“어디를 그리 바쁘게 가셔요.”
바쁜 일은 없어도 누가 오래간만에 만나자고 해서 가신단다. 말씀을 나누면서 그분의 얼굴을 보던 김형락은 자기와 연배가 비슷한 줄 알고 말을 놓으려다가 그래도 처음부터 그럴 수는 없어서 여쭈어보았다.
“얼굴을 뵈오니 동안이신데 연세가 어찌 되셨어요? ”
“내 나이요? 많아요. 내가 보기에 자네는 나보다 열 살은 아래일 것 같은데.”
“예? 그렇다면 연세가 꽤 높으신 모양이네요.”
“나, 지금 여든여덟이여.”
“예. 난 여든 살 정도 되신 걸로 보았는데 형님도 한참 위가 되네요.” 
“내 나이 꽤 많은 것 같지만 우리 동네에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인 분이 셋이나 더 있는데, 너무 오래 산 것 같아여.”
“왜 그런 말씀을 하셔요. 건강하게 장수하신다는 게 그리 쉽지 않을 테지만 그동안 적선을 많이 하셔서 그럴걸요.”
“뭔 적선을 해. 한 것이라구는 아무것도 없어.”
김형락은 자기보다 열 살이나 위이고 한참 위의 형님뻘이 되어 존경스러웠다.
“나를 보고 동안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특별히 먹는 것이라고는 밥 세끼 꼬박 먹는 외에는고정적으로 차를 먹는 것밖에는 없어.”
“그렇다면 만날 불로초라도 드신다는 말씀인가요? ”
“마누라가 아침마다 해주는 음식이 다 불로초라 할 수 있지.”
“마나님이 해주신다는 게 뭔데요? ”
“자네가 불로초라고 하였지만 그게 다 풀 나부랭이여. 아침에 일어나면 삼지구엽초 달인 차를 한잔 줘요.”
“삼지구엽초라면 음양곽으로 그 찻물을 계속 마시게 되면 동안이 되고 요강이 깨져 나간다고 하던데요.”
“하하하, 어서 주워듣기는 한 모양이네 그려. 항간에는 그런 말이 있긴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르겠지. 그런데 그 풀이 좋기는 좋은가비여. 거짓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말이여.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말을 타는 걸.”
“거보세요. 요강이 깨진다는 말이 다 일리가 있는 게 아닌가요?” 
“하하 글쎄, 그런데 대해서 깊이는 알지 못하지만 동의보감에도 나온
바가 있다더군. 예부터 좋다는 약은 다 효험이 있다는 말이겠지. 내가 말을 놓는다고 역겹게 생각하지 말아요. 척 보니 사람이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사람으로 보이기에 그런 것이니까.”
“형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게 없네요.”
“내가 오래 살았지 않아. 아닌 게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고 나니 나이가 어느 결에 이리되었는지 몰라. 기왕에 오래간만에 이야기 상대를 만나게 되니 할 이야기 못할 이야기를 다 하고 싶구먼.”
“시간이 아직 몇 분간 남아 있으니 좋으신 말씀 많이 해주셔요.” 
“난 사실 오늘 향군에서 목욕을 시켜주는 날이라서 다녀오는 길에 집에 일찍 들어가기는 무엇해서 서울 동대문에 유일하게 군대 친구가 있어 만나보러 가는 길이여.”
“그러시군요. 그럼 역전의 용사이시네요.”
“역전의 용사라…. 이를테면 그렇긴 하지. 6·25 때 인민군을 코앞에 놓고 싸웠으니까.”
“그 당시의 말씀이 태산처럼 많으시겠네요.”
“내가 6·25가 나기 1년 전에 국방군에 입대를 하였는데 나는 그때 고향인 전라도 무주에서 부모님 슬하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지. 한창 나이인 스물두 살경에 말이여. 그런데 젊은 놈이 농사를 짓는다는 게 왜 그리도 싫었는지 날마다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게여. 그런데 그때 초등학교 동기생이 어느 날 하는 소리가 자기도 농사를 짓기가 싫어서 그러니 어디 바깥세상으로 한번 나가보자는 거였어. 그의 말에 의하면 국방군엘 들어가게 되면 월급도 주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가 하면 휴일에는 애인도 사귈 수가 있다는 그야말로 꿈에도 한번 들어보지 못하던 소리를 하는 거여. 그때만 해도 지나가는 처녀들을 보게 되면 가슴이 두근두근할 때였고 속으로는 왠지 모르게 흥분이 되고 좋으면서도 막상 말 한마디를 할 줄 모르던 그런 때였지. 그런데 친구가 여자와 사귄다는 말을 듣게 되니 이 친구의 말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여. 그래서 고심 끝에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께 먼저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아서 밤저녁에 어머니가 주무시기 전에 안방으로 들어가서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잠자코 계시던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는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라는 거여. 그런데 아버지께 잘못 말씀을 드렸다가는 금방 소리만 버럭 지르실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데 다음날 친구가 와서 내일이 접수마감이니 무조건 한번 가 보기나 하자는 거여. 그의 말을 듣고 난 후에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끝에 우선은 식구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기로 하고 이튿날 친구를 따라서 부대엘 들어가니 그날로 바로 대기를 시키더니 사흘 만에 제주도 훈련소로 보내진 거여. 난생 처음으로 배를 타고 수평선을 바라보니 지금까지 산골에서 작은 하늘만 바라보던 세상과는 딴판으로 세상이 넓다는 것을 느끼고 집을 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이 들더라구. 그런데 배를 타고 보니 얼마나 배멀미가 나던지 먹은 것을 다 토하고 나서 겨우 제주도엘 닿았는데 정신이 어리벙벙하는 거여. 그러자 조교가 하는 말이 사나이가 그런 몸을 가지고 무슨 군대생활을 하느냐면서 기합을 주는 것이었지. 어쨌거나 그런 기합을 받아가면서 2개월 간의 훈련을 마치고 나자 특별외박을 사흘간이나 끊어주어서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은 좋은 추억도 만들었지. 그러고 얼마 후에 보병 7사단에 배치되어 1년 동안에 일등병으로 진급이 되었을 때인데 북한의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강행한 거여.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전쟁준비라는 것은 하나도 안된 가난한 나라로 미국에서 보내준 구제품 옷을 입었고 밀가루 배급을 타먹을 때였어. 그런 나라에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니 온 국민들이 피란을 가느라 난리를 쳤지만 인민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인민군 탱크가 서울을 누비고 다녔으니 아! 대한민국은 이제 빨갱이 세상이 다 되었구나 할 정도로 모든 국민들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졌었지. 우리 7사단은 후퇴를 거듭한 끝에 왜관까지 밀렸다가 가까스로 미국을 비롯하여 유엔군 열여섯 나라에서 비행기와 탱크며 야포 등 신무기를 한국군에게 지원하였으니 그것이 대한민국이 사는 길이었지. 최전방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후퇴를 하기도 하고 공격을 하다가는 다시 밀리기를 여러 번 하던 끝에 마침내 일등중사까지 진급을 한 것이여.”
그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전투는 죽음의 계곡이라고 할 만큼 치열했던 백마고지 탈환작전에 투입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중공군이 새까맣게 고지를 향해 기어 올라오는 것을 향해서 기관총을 조준해서 총알을 내뿜었는데 장마 때 개미 떼가 새까맣게 줄을 지어 이동을 하는 것처럼 아무리 총을 갈겨도 뒤를 이어서 계속해서 줄을 지어 새까맣게 올라오던 중공군과 백병전을 치르다가 용케도 중공군을 물리치고 백마고지를 탈환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중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열 명도 되질 않았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모른다니까.”
“정말 형님은 천명으로 사셨네요. 중공군은 야간 전투에 능하고 그들이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기어오를 때가 제일 무서웠다면서요?” 
“말도 말아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는 웬만한 병력으로는 당할 수가 없었어. 장진전투에서 수많은 미군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사를 하였고 포로로도 많이 잡혔다는 거여. 우리나라야 전쟁 당사국이니까 그렇지만 유엔군들이야말로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으니 얼마나 그 분들이 위대한 사람들이여. 지금 말이지만 우리가 당시에 유엔군이 아니었다면 무슨 수로 나라를 지킬 수가 있었겠어. 사실 당시에 한국군만 이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면 부산까지도 인민군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여. 우리 군이야말로 탱크하나 제대로 갖추기를 하였나 전투기 한 대도 없이 북한의 침략을 당했던 것이니 그 당시에 만일 유엔이 참전을 조금이라도 늦게 하였다면 남한 사정은 또 달라졌을 거여. 당시의 전력으로 보아서는 겨우 제주도나 빼앗기지 않았으면 다행이었을 거여. 그런데 지금도 미군이 우리의 적이라고 가르치는 극소수의 학교가 있다니 아직도 1980년대 학생운동의 잔재가 일부 학교를 좀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여. 그분들 유엔군이 아니었다면 나도 벌써 죽었을 것이고 우리 국민 반 이상이 살지 못했을 거여.”
“말씀을 듣고 보니 형님이야말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겪으신 역전의 용사시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참된 군인입니다.”
당시에 열 여섯개 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였으니 이 분들이 모두가 약관의 젊은 나이의 청년들이었다. 자유우방인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먹히게 되었다고 하자 세계 도처에서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하면서 유엔군에 자원입대를 하여 한국으로 향하였던 것이니 그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조차 모르고 참전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그때야말로 오늘날처럼 대한민국이 세계속의 한국으로 빛나던 나라도 아니고 일제 35년간의 통치를 받아 왔으며 단 2백 달라도 되지 않던 가난하고 못살던 나라였다.
그렇지만 세계의 유수한 나라들은 자유우방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전에 참전을 한 것이니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결코 유엔군에서 활약한 분들의 은공을 잊지 말아야 하고 나라에서는 그들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경제지원은 물론이거니와 자라나는 세대로 하여금 우리와의 우의를 다져 나가는 사이가 되기를 바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의 실태를 보게 되면 우리야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 또다른 6·25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여.”
“한때 남북 정상이 만나고 미북 회담까지 열렸지만 믿을 수 없는 사상이 공산주의라는 거 아닙니까.”
“남북 양쪽이 비핵화로 나간다면 서로가 잘살고 우리가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저쪽 사람들의 말은 하나도 믿을 수가 없는 거여. 그들에게 한두 번을 속았어야지.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도 땅굴을 파내려 온 사람들이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여.”
그분의 말을 듣다가 지난해에 부산에 있는 유엔군 묘지를 참배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 부산에는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2천여 전몰장병이 모셔져 있는데. 거기엘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약관의 나이에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싸우다가 죽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안쓰러워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그분들이 전쟁에 참전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았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즐길 수도 있었으련만 그들은 오직 세계평화를 위하여 한 목숨을 남의 나라를 위하여 바친 것이다.
만일의 경우 그분들이 살아 있어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부산 부두에 닿으면서 볼 기회기 주어졌다면 와! 하는 탄성을 지르면서 자유를 위해서 싸운 보람이 이것이야 하면서 얼마나 길길이 뛰면서 좋아하였으랴!
아! 그러나 너무도 애석하고 불쌍하구나. 그분들 중에 한 분도 이 현실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깜깜한 지하 어둠 속에서 아무 말도 없이 누워계시지 않는가.
“지금도 전우들을 만나는 기회가 있으신가요?”
“전우라 하지만 나와 같이 적과 싸우던 친구는 다 죽어서 만날 길이 없어. 현충일이 되면 서울 동작동국립묘지를 해마다 갔었는데 올해부터는 가지 않기로 하였지. 근력이 부쳐서 말이여.”
“그러시군요. 사시는데 무리는 하시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한 가지 말 못할 사정이 생겨서 그것이 걱정이여.”
“뭔 걱정이 있어요. 자식들은 다 성장해 제 갈 길로 나갔을 텐데요.” 
“나는 오남매를 두었는데 딸이 셋에 아들이 둘이여. 큰애가 아들인데 나는 지금도 그 아들에게 얹혀서 살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을 하니 재산은 많지 않지만 큰아들에게 살고 있는 집이라도 물려줄 생각으로 어느 날 법원에 가서 아들에게 집을 상속해 준 거여.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추석날 아이들이 모여서 수군대더니 나에게 어떻게 자식들과 일체 협의도 없이 아버지 마음대로 재산을 맏자식에게만 상속을 하였느냐고 따지더란 말이여.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나를 봉양하고 있는 게 큰아들이라 서 그렇게 하였다고 하자 갈가마귀 떼처럼 몰려들어서 하는 말이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가 잘못한 것이니 법적으로 해본다면서 추석이고 뭐고 다 걷어 내차고 각자가 집으로 돌아가더란 말이지.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다 할지라도 자식들이 이렇게 나오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를 않았는데 백마고지를 탈환한 역전의 용사가 기가 탁 죽는 거여.”
“그래서 자식들이 많으면 재산이 적으나 많으나 간에 생전에 처리를 하고 돌아가셔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왜 그것을 모르겠어. 재산이 얼마 되지를 않으니 그것을 찢어발리면 아무 값어치도 나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였을 뿐인데 재산을 좀 가지고 있는 딸년이 더 달려들더라니까. 그럴 줄 알았다면 큰자식 하나만 낳을 걸 잘못하였어.”
“옛날에는 생긴 대로 다 기어 나오는 판에 어떻게 나오는 놈을 도로 들여밀 수도 없던 시대였어요.”
“하기야 그랬었지. 지금은 뭐 피임이라는 기구가 있어 애를 낳지 못하게도 하지만 피임약까지 있어서 당초에 애를 만들지 못하게 한다니 자연을 거스르면 재앙이 따른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짓들이여. 지금 시골에는 아이들이 없어서 학교를 다 폐교한다더군. 아이들이 없으면 경제는 누가 발전을 시키며 아이들이 없으면 장차 이 나라는 누가 지키는 거여.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처럼 심각한 문제는 없을 것인데 정부나 민간인이나 간에 모두 손을 놓고 있다시피 하고 있으니 그것이 큰 일이 아니여.”
“그렇다고 외국에서 고용인을 모집할 수도 없는 일이구요.”
“외국인을 고용하게 되면 가뜩이나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부족한 판인데 어떻게 외국인을 고용할 수가 있겠어?”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네요.”
“내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어?”
“그것이 무언데요?”
“사실은 아까도 잠시 말을 하였지만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을 때에 아가씨 하나를 사귄 적이 있었던 거여. 그 많은 세월이 가도록 한 번도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몰라.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그 여자의 생사라도 알 수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면 좋겠는데. 방법을 알아야지. 이름은 서귀녀로 일출봉에서 가까운 마을에 엄마와 단 둘이 살던 처녀야. 인물이 참 좋았지. 아니 꽤 예쁜 얼굴이었어. 그날 나는 친구들과 같이 일출봉엘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인데 어떤 처녀 둘이서 앞서가더니 한 처녀가 길옆으로 비키는 것을 보니 어디가 아픈지 얼굴이 하얘지면서 오만상을 찌푸리는 거였어. 그래서 얼른 그에게 다가가서 왜 그러냐고 말을 걸었지. 그랬더니 조반을 먹은 후에 배가 좀 아픈 듯하였는데 내려오는 길에 이상하게 맥이 탁 풀려 걸을 수가 없다는 거였어. 나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쇠꼴도 많이 베고 약초도 많이 알고 있던 터에다가 아버지가 침을 잘 놓으셔서 그것을 이따금 사용도 하여 체한 사람을 고쳐주기도 하였는데 이 처녀에게 침을 놓아주었던 거지. 그런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처녀가 자기 집엘 한번 놀러 오라는 거여. 처녀는 티없이 자라서 그렇겠지만 마음이 순한데다가 그의 모습을 뜯어보니 당시에 배우로 활동하고 인기를 끌고 있던 김 지미 비슷한데다가 끌어안으면 품안에 꼭 들을 것만 같은 그런 날씬한 몸매를 갖추고 있었던 거여. 더구나 그가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어느 날 바닷가로 놀러가자고 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생긋이 웃더니 손을 먼저 잡으면서 다가서는 것이었지. 그때야말로 나는 여자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도 없고 국산영화에서도 그때만 해도 키스 장면도 없던 시대였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내 스스로 그를 꽉 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에게다 갖다가 대니 그는 가만히 있더란 말이지. 하하. 아마 그때 내가 여자를 포옹한 최초의 순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다음부터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손잡고 끌어안는 것은 보통으로 이루어지더라구. 그 후 그 집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자 처음에는 반색을 하더니 무남독녀인 그에게 장가를 들려면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함께 살아야 된다는 것이었어. 제주도에 와서 장가를 가는 것은 좋으나 데릴사위라는 말에 고만 일은 다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나더라구. 그러는 사이에 부대가 이동을 하게 되어 제주도를 떠났고 그 후에는 연락도 못하고 6·25가 나는 바람에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몇십 년이 흐른 지금 와서 간간이 생각이 나는 거여.”
“그러고 보면 그 아가씨가 형님의 첫사랑이네요. 왜 젊어서 한번 가보시지 그랬어요.”
“젊어서 농사짓기 바쁘고 어렵게 살다 보니 언제 그런 생각이나 하였겠어. 남 다 가는 제주도에 한 번도 가지를 않았으니 농사라는 게 사람을 일생 동안 묶어 놓는 직업이라서 그랬던가 보아.”
“그러시네요. 사실 농사를 짓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지 않아요.”
“인간의 뼈 꼴 다 빼먹는 일이 농사여. 군인 제대하고 일생 동안을 고향에서 농사만 짓다가 보니 어느새 귀 밑에는 서리가 내리고 근력은 쇠하니 좋은 시절이 어느 결에 다 갔는지 몰라.”
“오늘 어디를 가신다고 했지요.”
“동대문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하였지.”
그때 전철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전철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것을 보니 차가 오는 모양이네요. 걸으실 때에 허리를 좀 펴고 걸으셔요.”
“내 허리는 이미 양궁장에 버려진 활처럼 다 휘어져서 더 펴지지를 않아. 잘못 폈다가는 애개개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파서 못 견디겠으니 할 수 없지 뭐. 오늘 이야기 상대를 해주어서 고맙네. 언제 다시 만났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겠지.”
“오늘 이 시간 이때가 되면 이 길을 지날 때가 많으니 만나뵐 수도 있을 거예요. 또 만나 뵙게 되면 좋겠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면서 그 분의 손을 잡으니 앙상한 손가락뼈에 힘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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