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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려고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승하

시인·소설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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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북 의성군 안계면에서 고고의 울음을 터뜨린 날 서울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을 고려대학교에서는 ‘4·18 고대생 피습의 날’이라고 부른다. 시위를 마치고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을 지나가던 고대생들을 구타하라는 깡패 두목 신도환과 임화수의 지시를 받은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동대문패 화랑동지회의 폭력배들은 각목과 자전거 체인 같은 것을 들고 몰려와 이 일대 거리를 피로 물들였다. 수십 명 학생이 크게 다쳤고 부상자 중 사망자도 나왔다.
그다음 날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서울 거리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187명이 사망하였고 부상자 중에서 사망자가 계속 나왔다. 이미 마산에서 9명의 사망자가 나온 3·15부정선거 반대시위가 있었다. 전국에서 함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 내 아버지는 경찰관이었다.
“내가 그때 서울지구에 근무하고 있었더라면 방아쇠를 당겼을 거다. 그때 경찰관들이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면 옷을 벗어야 했는데 어떻게 방아쇠를 안 당겼겠니.”
아버지는 경찰전문학교(지금의 경찰대학) 출신임에도 그 학교 출신들처럼 출세가도를 달리지 못하고 시골의 파출소장으로 떠돌며 울분을 술로 풀곤 하였다.
“난 돈도 없고 빽도 없어 요 모양 요 꼴이다. 공수래공수거!”
취하면 꼭 이 말씀을 하셨다. 무척 고지식해서 아첨할 줄을 몰랐다.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자였다. 승진 누락이 되었을 때 결심했다. 경찰 못한다고 굶어 죽기야 하겠어. 김천에서 근무할 때 사표를 내 본적지가 의성에서 김천으로 옮겨졌다. 어머니가 하던 문방구점의 점원이 되었다. 아버지가 사표를 낸 것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아버지는 그 뒤로 직업을 가져보지 못했다. 성격이 무척 급하고 괄괄한 분이었다. 20년 동안 했던 형사 내지는 수사관의 기질을 버리지 못했으니 집안 분위기가 어땠으랴. 김천역으로 온 물건박스를 큰 자전거에 싣고 오면서 길에서 후배 경찰이 탄 차를 만나기도 했다. 울화통이 치밀었을 것이다.
나는 문학의 세계로 도피하였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만 행복하였다. 김천성의중학교에 다닐 때 권태을 국어선생님을 만난건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선생님이 인솔하여 백일장에 참가했는데 1학년짜리인 내가 장원을 하자 명령을 내렸다. 무조건 한 주에 한 편씩 시를 써 제출하라는. 내게만 주어진 숙제였다. 1학년 1학기 말에 전교 3등을 해서 장학금을 받았는데 그 뒤로는 성적이 오른 적이 없었다. 시집과 소설집을 읽으면서 문학은 내 인생의 좌표가 되었다.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1975년에 김천고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내가 쓴 시를 빨간색 펜으로 첨삭지도를 해주시는 선생님 대신 무시무시한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김천은 소도시라 그해는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그 전해부터 고교평준화라는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무시험 고교 배정 정책이었다. 대구나 대전 같은 대도시부터 시행되어 1975년에는 인근 도시에서 학생들이 지방 명문 김천고등학교로 대거 지원해 왔다. 기숙사 시설이 워낙 잘 되어 있는 학교였다. 영재나 수재 소리를 듣던 학생들이 시험을 거쳐 대거 입학하자 선생님들이 작전을 짠 것 같았다. 첫 번째 월말고사가 끝나자 틀린 개수대로 이른바 ‘빳다’를 때리는 것이었다. 종아리가 퉁퉁 부었다. 집에서 아버지한테 맞는 것도 서러운데 선생님마다 회초리를 들고 들어오니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 집의 돈을 훔쳐 서울로 가출하면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몇 년만 꾹 참고 계십시오. 제가 반드시 성공해 서 어머니를 구출하러 오겠습니다.'
내 인생에서 고교 시절은 2개월 재학으로 끝났다.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것이 1979년 3월이었다. 학원에도 안 다니고 독학으로 도서관과 독서실에서 공부하느라 심신이 피폐해졌고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휴학하고서 귀향, 정양하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 저격 소식을 라디오로 들었다. 10·26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얼마 안 되어 12·12쿠데타가 일어났다. 해가 바뀌어 대학 생활을 하려고 서울 흑석동 캠퍼스에 왔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서울의 봄’이 왔다는데 학우들과 선배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연일 시위를 했다. 바로 그해 5월에 광주에서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중앙대 1학년 남학생 전원은 교련 과목의 일환으로 군부대에 입소하여 기초유격훈련을 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내무반에 들어왔을 때 어느 학생이 말했다. 광주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대. 사람들이 많이 다쳤대. 전국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대. 라디오를 들었다는 것이다. 밤에 학생 대표들이 모여 숙의했다. 우리 중앙대도 휴교 중일 텐데 우리가 여기서 군사훈련 받고 있는 게 말이 돼? 일단 퇴소했다가 광주에서의 사태를 보고 재입소를 하든가 하자. 날이 밝아 훈련소장에게 몰려가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꾸지람과 함께 오늘 일자 훈련이나 잘 받으라는 말을 듣고 물러 나왔다. 수백 명 학생들이 밖에서 하던 대로 연병장을 돌면서 시위를 했다. 연병장에서 대학생들이 시위한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1시간이 채 못 돼 군용트럭이 10대쯤 들어오더니 연병장 가에 죽 서는 게 아닌가. 트럭에서 뛰어내리는 이들은 말로만 듣던 공수특전단원들이었다. 데모 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모양이었다. 얼굴이 까무잡잡했고 바짝 말라 있었다. 눈만 반짝반짝했다. 진압봉을 들고 있는 그들 앞에서 우리는 훈련 잘 받고 퇴소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곧바로 광주로 내려갔을 것이다.
훗날 광주대와 전남대에 입학한 초등학교 때 친구한테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들었다. 진압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눈빛! 내가 보았던 바로 그 군인들의 눈빛이었다. 
4·19 때 방아쇠를 당긴 경찰관 중 아들이 5·18 때 광주에 투입된 진압군이 있다면? 이 가정법은 소설을 쓰게 했다. 그리고 유신시대와 5공 시절의 ‘고문 정국’은 이근안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했고, 그 이름은 공포감을 불러왔다. 1988년에 이상문학상을 받은 임철우의 「붉은 방」을 보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정말 끔찍한 1980년대였다. 서울대생 박종철의 죽음이 있었기에 6월항쟁이 있었고 6·29선언이 이뤄질 수 있었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남쪽에서는 탈출 러시가 이뤄졌는데 일엽편주가 뒤집혀 떼죽음을 당한 가족을 가리켜 ‘보트피플’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를 엮어서 시로 썼다.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는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비망록」을 쓰게 했고 고문 정국과 보트피플의 참상은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가 뭉크와 함께」를 쓰게 했다. 소설을 뽑아준 홍성원·송영 선생님과 시를 뽑아준 서정주·황동규 선생님은 그런 시국에 그런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었으니 그 은혜가 백골난망이다. 공교롭게도 그 두 작품으로 등단하게 되어 나는 문인은 시대의 아픔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어머니는 2007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4년 뒤에 돌아가셨다. 두 분 다 한이 많은 분이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해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중에 다닌 어머니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데 웬걸, 일본 유학을 약속했던 외할아버지가 국회의원이 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한국전쟁이 발발, 북으로 강제납북이 되셨다. 국군이 잘 대처하고 있다는 방송만 믿고 있다가 붙잡혀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맨발로 절뚝이며 미아리 고개를 넘어갔다. 서울대 공대와 서울대 미대에 다니던 두 남동생이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중퇴하는데, 어머니가 그때 도움을 못 준 것을 두고 평생 한탄하셨다. 여선생 월급으로는 어머니와 여섯 동생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아버지는 자신이 출세 못한 한을 장남이 풀어줄 줄 알았다. 서울대 법대 법학과에 입학해 사법고시 1차시험을 2학년 때 붙었으니 말이다. 이런저런 사연을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공포와 전율의 나날』 『뼈아픈 별을 찾아서』 『예수·폭력』등에서 펼쳐보았다. 앞으로는 소설 쓰기에 매진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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