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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과 온국수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태종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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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미래보다 과거를 되새긴다고 한다. 문득 지난날 첫 직장을 다녔던 일이 생각난다. 나에게 군복무와 야학은 연관이 깊다. 나는 1966년 초복 중복 말복 시기에 훈련을 받았다. 더위와 싸운 일이라 기억이 생생하다. 3보 이상 구보, 아침저녁 심지어 야간에도 연병장을 수십 바퀴씩 달렸다. 군가를 얼마나 열심히 불렀는지 지금도 잠자리에 들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버릇까지 생겼다.

1968년 1월 21일 19시에 일어난 북한 무장공비 31명의 서울침투사건 때은 나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복무 연장이라는 강력한 동원발동을 맞았다. 8개월 연장 복무를 마치고 1969년 1월 31일에 제대하였다. 까만 제대복을 갖춰 입고 포항 오천 부대 정문을 나오는 순간 지난 군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훈련소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혼신을 다했던 일, 불침번서기, 모범적인 훈련생활, 교육시간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한 자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섰던 정신적 자세, 말년에는 전출명령을 받아 혹독한 시련을 당했다.

한겨울 연병장 보초를 위해 꽁꽁 언 군화를 끌어안고 침상에서 잠을 잤다. 사실은 밤 1시부터 당번을 설 때는 잠을 거의 잘 수 없는 날이었다. 제대명령을 받고 유격훈련 차출명령을 받았다. 휴학생이라 엘리트라고 우대해 주신 김 소대장에게“말년이라 다른 병사로 대체하면 안되겠습니까? ”라고 건의를 드렸는데 마땅한 후임자를 찾아 보라는 답변에 두 달 아래 기수였던 김승우 병장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여 그 고마움은 지금도 못 잊는다. 제대 전날 밤에는 매점으로 가서 탁주 한 사발을 나누어 마시면서 우정을 다졌다.

3년 만에 귀가했지만 경제는 더욱 어려웠다. 집안 걱정이 앞섰지만 복학문제가 급선무였다. 2월 15일 월요일은 제법 추웠다. 구덕산 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대학교 학과를 찾아가서 복학수속과 학점도 신청하면서 마무리되었다. 3월이면 새 기분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니 기분이 대단히 상쾌하였다. 귀갓길은 ‘범내골버스 정류소’에서 내려 부산철도공작창 정문을 지나 경부선 철로를 가로질러 잘 닦여진 가야로를 걸었다.

범천4동사무소 앞을 지나면서 건너편 대서소 유리창에 붙여진 하얀 쪽지를 발견했다. ‘범천(凡川)재건중학교강사모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문을 노크하였다.

“선생님, 유리창에 붙여 있는 안내문을 보고 염체 없이 들렀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렇군요. 잘 오셨습니다. 우리 학교가 신학기를 맞아 몇 분의 선생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요.”

“저는 방금 제대한 군인입니다. 혹시 저가 해당되는지 여쭈어 보려고 들렀습니다.”

“어떤 과목을 원하십니까? ”

“저는 기계공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수학과목을 희망합니다.”

“그럼 3월부터 무슨 계획은 없습니까? ”

“3월부터 복학을 할 학생입니다. 군복무 중에 단련한 몸과 마음으로 어떤 일이라도 돕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함께 학생교육에 노력해 보십시다. 학생들은 낮에는 직장을 다니지만 공부하겠다는 의지력을 불태웁니다. 동참하시겠다니 힘을 얻네요.”

“고맙습니다. 부족한 사람을 받아 주시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출근이 되겠습니까? ”라는 물음에 주저함도 없이 승낙했다. 면접이 끝나고 자리에 일어서는데 귀 밖으로 조 교장선생께서 들려주시는 한 마디는“매월 수당 3,000원을 지급하겠습니다”였다. 그 자리에서 한 달 수당은 얼마인지를 묻지를 않았는데 답을 주시니 쾌재를 불렀다. 시내 버스교통비(당시 5원)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1969년 2월 15일은 나에게 뜻깊은 날로 기록되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야간 일자리를 얻었으니 행운이었다.

고대하던 3월 2일이 밝았다. 놓았던 공부를 시작하는 날이다. 낯선 동급생과 친목을 나누었다. 저녁에는 재건학교에서 신입생, 재학생과 첫인사를 나누는 개학식이 있었다. 새로 부임한 교사 다섯 분이 단상에 올라 간단히 인사를 하였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제 한 배를 탔습니다. 서로가 합심하면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의욕을 가지길 바랍니다”는 인사말을 한 기억이 난다.

벌써 반세기도 더 된 옛 이야기가 되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희미한 외등 한 개가 그네를 타는 야간교실에서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였다.

“배ㅇ곤, 눈을 뜨세요.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주경야독의 어려움은 잠을 쫓는 일이다. 이 무렵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학교 진학률은 저조하였다. 요즈음과는 천양지차였다. 대략 초등학교 졸업생 중에는 40% 정도가 진학을 하지 않았다. 가난으로 진학을 포기한 학생이지만 나를 기다리는 초롱초롱한 눈빛 때문에 본업인 학업이나 교우관계가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았음을 이제야 밝힌다.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밤늦게 수업을 마치고 함께 걸으며 사제지간의 정을 쌓았다. ‘향진, 미진, 용화, 정곤’이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에게 어려움이 닥쳤다. 늦은 시간 20km 넘게 걸어서 집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으면서 소화가 어렵게 되었다.

“이 선생, 오늘부터 우리 국수 한 그릇씩 먹고 일과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모두 건널목 국숫집으로 가십시다”하는 교장선생의 제안에 박수를 쳤다. 얼마나 반가운 이야기인지 함께 찾아갔다. 식당주인께서는 초면이지만 반갑게 맞아 주셨다.

“저는 가정 과목을 가르치는 이 선생의 애미되는 사람입니다. 야간 학생을 위하여 고생한다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 뵈오니 반갑습니다.” 방금 삶아낸 국수에 정구지, 애호박, 홍당무, 갖가지 양념을 첨가한 쫄깃한 온국수는 두 사람이 먹어도 남도록 푸짐하게 차려 주시어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끼니를 해결하였으니 더욱 신나는 수업이 이뤄졌다.

나는 만 2년을 저녁밥은 온국수로 때웠다. 밀가루 음식은 몸에 부작용이 있다는 말이 행간에 떠돈다. 그때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돌이키니 사랑을 먹었던 셈이다. 이제 식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선생도 모친도 소식을 알 수 없으니 궁금할 뿐이다. 나는 그때 먹었던 온국수를 생각하면 백석 시인의「국수」라는 시 한 절을 덮씌우기 좋아한다.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음식이다”는 표현은 그때를 돌이키게 한다. 잊지 못할 추억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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