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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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터널을 통과하는 중앙선에 고속으로 달리는 KTX-이음(EMU) 열차가 생긴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기관사 조기철은 고속열차 조종간을 잡은 지 10년이 지났다. 중앙선 철길을 달린 10년의 광음도 지나고 보니 잠깐이었다. 기철은 고등학교 때 물리학에 관심이 있어 대학에 진학하여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상 취업이 잘되는 철도대학에 들어가 기관사가 되었다. 집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이 있고 아내는 아이들을 학교에 등교시키고 요양병원에서 시간제 간병인으로 일하며 돈을 벌어 보태어 지방 도시에 아담한 단독주택도 마련했다.
기철이 기관사가 된 것은 증조할아버지 영향이 컸다. 기철의 증조할아버지 조원석은 오래전 중앙선 철로를 건설할 때 노동자로 일했다. 기철은 아버지로부터 중앙선 죽령터널을 건설할 때 증조할아버지가 경험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때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으로 장비가 발달되지 않아 사람의 손으로 흙을 쌓고 다리를 놓아 철길을 만들었다. 굴을 뚫을 때는 폭약으로 암석을 깨고 삽으로 돌 부스러기와 흙을 수레에 퍼 올려 굴 밖으로 실어 내는 철로 공사는 무척 힘든 대공사였다. 중앙선 철로 건설 중 가장 난공사는 죽령터널 공사였다. 소백산을 통과하는 수십 리나 되는 굴을 뚫는 것도 문제이지만, 충청도 단양과 경상도 풍기 두 지역의 지형상 40미터 표고차가 문제였다. 표고차에 의한 경사도를 줄이기 위하여 두 지역의 경계인 소백산 밑 땅속을 원형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과 같이 굴 안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완만하게 경사진 철길을 만드는 공사는 세상에서 처음 시도하는 어려운 공사였다.
원석은 터널 굴착작업반장으로 투입되었다. 설계한 기사는 터널 공사 현장에서 설계도를 하나하나 대조하며 작업 인부들에게 지시했다. 굴의 중심부에서 암석을 폭파해 가며 굴착 하던 중, 작업을 지시하던 기사의 착오로 굴은 설계도 보다 수십 미터 벗어났다. 암석을 발파하여 흩어진 돌을 치우고 금이 난 암벽을 곡괭이로 찍어 내자 바위가 무너지면서 갑자기 커다란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작업은 중단되고 그날 일과는 끝났다.
원석은 작업반장이라 인부들을 먼저 굴 밖으로 보내고 혼자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지하 공간 저 너머로 울창한 숲이 펼쳐지고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웅장하면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숲속 폭포에서는 물이 쏟아져 내렸다. 말로만 듣던 커다란 공룡이 폭포 옆으로 지나갔다. 원석은 눈앞에 나타나는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먼저 굴에서 나온 인부들은 숙소로 돌아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작업반장이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작업반장인 원석이 굴 안에서 나오다가 천장의 떨어지는 낙석에 맞아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굴 안으로 들어갔다. 원석은 굴속 지하 공간을 발견했던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인부들은 의식이 없는 원석을 업고 굴 밖으로 나왔다. 원석은 다음날 작업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하루가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원석은 굴 안에서 듣고 보았던 것을 동료 인부들에게 이야기 했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으며 말했다.
“굴 뚫은 작업에 너무 지쳐 힘들고 또 며칠 전부터 몸살감기로 약을 먹어서 환각 현상으로 헛것을 본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 기차 굴이 완성되었다. 따비굴이라고도 불리는 소백산 밑 땅속, 죽령터널 속에서 기차는 원을 그리며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철길 위를 달렸다.
칠팔 년만에 완공한 중앙선 철길은 당시에는 경경선이라고 불렀다. 331.3킬로미터인 경경선은 사람의 손으로 흙을 쌓고 바위를 깨고 굴을 뚫고 강과 개울을 지나는 다리를 놓는 철길이라 복선으로 만들지 못하고 외길 철로였다.
원석은 죽령터널 공사 때 어느날 자기가 보았었던 공룡과 폭포와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우거진 숲이 수십 년 지나도 기억 속에서 생생했다. 원석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헛것을 보았다고 했고, 자신이 생각해도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황당한 일이라, 헛것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너무 지쳐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공룡의 웅장한 울음소리,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보라, 태어나고 처음 본 울창한 숲이 뚜렷이 생각났다.
기철은 자라면서 증조할아버지 겪었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학교에서 배운 수천만 년 전 공룡시대 이야기로 동화처럼 들렸다. 오랫동안 중앙선 똬리굴인 죽령터널로 석탄 연기 푹푹 뿜어내는 기차가 다녔다. 해방되고 어느날 죽령터널 중간에서 기차가 고장나서 많은 사람이 깜깜한 굴 안에서 기차 연기에 질식해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세월 지나 외길 철로인 죽령 똬리굴은 폐쇄되고 상하행선 따로인 복선 열차 터널이 새로 뚫려져 유선형 고속열차가 공기를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기철은 중앙선 고속열차인 KTX-EMU 열차 조종간을 잡고 죽령터널을 지날 때마다 증조할아버지의 꿈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꿈이 아니고 실제 경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다면 죽령굴 어디엔가는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4차원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을지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기철은 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하는 과목인 물리와 수학을 공부하면서 4차원 세계에 관한 책을 읽었던 생각이 났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시간과 공간은 관측자에 의해 상대성을 가지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세 개의 공간차원과 한 개의 시간차원이 있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4차원 세계를 발견하고 이론적 체계를 세웠다. 그 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몇 광년 밖 우주공간을 순식간에 갈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수학적 수식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빛보다 100배나 빠른 기계를 만들어야 하니 이론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4차원의 세계에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타임머신을 상상하기도 했다. 기철은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와 미래 또는 먼 우주를 넘나드는 일들이 실제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학교에서 배우고 읽은 것을 하나하나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보았다.
‘점’의 일반적인 용어를 정의하면 길이도 높이도 부피도 없이 있는 곳의 위치만 나타낸다. 좀 더 사전적 의미는 “기하학으로 보면 눈에 보이지 않고, 위치만 있다. 점은 합목적으로 사용되는 기호이며, 비물질적 존재이고,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0과 같다. 점의 기능은 위치, 강조, 구분, 계획, 수량을 나타내며, 상징적인 면에서 모든 조형 예술의 최초 요소로 규정지을 수 있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선은 두 점 사이의 거리를 나타낸다. 선은 무수한 점의 집합체이고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선은 점으로 나누어진다. 면은 선으로 둘러싸인 것을 말하며 면은 선으로 나누어진다. 공간은 여러 개의 면으로 둘러싸여 있다. 공간은 면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한 공간이 면으로 나누어져 서로 다른 공간이 된다. 우리는 공간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이다. 다시 정리해 보면, 1차원인 선은 0차원인 점으로 나누어지고 2차원인 면은 1차원인 선으로 나누어지며 3차원 인 공간은 2차원인 면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 3차원인 공간으로 나누어지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4차원의 세계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5차원 6차원…은 인류 머리로는 이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저 별 속에서 인간을 닮은 우주인이 살고 있을 수도 있고, 우주공간 저 멀리 수백억 광년 밖은 또 무엇이 있을까? 지금 태양계 밖에서 우주공간을 향해 반세기가 넘게 달려가고 있는 인간이 만든 보이저 1, 2호가 그 비밀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별들도 태어나서 수천억 년을 살다가 소멸하고 때로는 폭발하여 블랙홀이 된다. 이 우주 속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4차원의 공간, 그보다 인류의 머리로는 상상도 할 수도 없는 5차원, 6차원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KTX-EMU 707 열차 조종간을 잡고 죽령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소백산 밑 영주에 있는 남서울예식장 주차장에는 차량이 넘쳐났다. 늦게 도착한 하객들을 차를 댈 곳이 없어 인근 교회에 주차하기도 했는데 예식이 일요일에 많아 교회 관리인과 마찰을 빗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도로 옆에 주차하여 놓아 불법주차 딱지가 붙인 차량도 여럿 있었지만, 차 주인은 그것도 모른 채 결혼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결혼식은 화려했다. 신랑 신부가 입장하고 퇴장하는 예식장 중앙통로 높은 단에는 붉은 카펫이 깔리고 양쪽으로는 화사한 글라디올러스와 갖가지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화려한 조명은 신랑 신부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하얀 결혼 드레스에 반짝이는 보석이 달린 왕관을 쓴 신부와 흰 와이셔츠에 검은 연미복을 입은 신랑의 모습이 조명을 받아 화려하게 빛났다. 신랑 신부 앞에는 날개 달린 천사 옷을 입은 어린 남녀 화동 두 명이 앙증맞은 바구니를 들고 꽃잎을 뿌리며 가고 있었다. 꽃잎은 인공으로 일으킨 바람을 타고 신랑 신부 앞을 소용돌이치듯 화려하게 수놓으며 흩날렸다.
신랑은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물리학을 연구하는 젊고 유능한 박사이고 신부는 서울의 유서 깊은 여자대학에서 오월의 여왕으로 선발된 재와 미를 겸비한 재원이었다. 사람들은 이 젊고 유능한 커플로 새로 출발하는 가정을 축복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폐백까지 마친 신랑 신부는 식사하는 하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일일이 감사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나고 뒷정리가 끝나자, 밤 열차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 남섬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만년설이 쌓여 있는 마운틴 쿡이 바라보이고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하늘을 품은 호숫가로 신혼여행을 가면서 설산과 짙푸른 호수와 200년 된 세상에서 제일 작은 교회가 있는 언덕 위 별장을 예약해 놓았다.
2035년 5월 24일 21시 43분 청량리로 가는 KTX-EMU 707 열차가 영주역을 출발했다. 열차에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랑 신부뿐만 아니라,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루돌프헤르츠 박사가 타고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서울대학과 부산대학에 이어 국립안동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는 양성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 같은 고전 물리학으로 설명이 안 되는 핵물리학과 우주의 생성 과정을 연구하는 세계에서 명성 있는 학자였다. 시속 25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달리는 KTX-EMU 707 열차는 밤 마지막 고속열차라 열차 안은 한산하여 승객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고속으로 달리는 달리지만, 열차 안은 편안하여 대부분 승객은 지정된 좌석에 앉아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열차 기관사 조기철은 천천히 조종간을 돌려 영주역을 출발했다. 출발한 지 일이 분만에 가속이 붙어 열차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10여 분이 지나자, 열차는 풍기역을 지나 죽령터널에 가까웠다. 기관사 조기철은 매일 한두 번씩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오늘따라 생소하게 느껴졌다. 선로 주위가 갑자기 짙은 안개로 덮이고 열차의 속도는 통제 불가능하게 빨라졌다. 앞에는 보여야 할 철길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로 지척을 구분할 수 없었다. 속도계에서는 계측 불능이라 빨간 경고등이 켜졌다. 10년을 넘게 열차를 조종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기철은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마약이라도 먹어 약에 취한 듯이 마음이 편안했다. 열차 조종을 자동장치로 고정하여 놓았다. 달려가는 열차 앞에 두 갈래로 나란히 뻗어 있어야 할 레일은 보이지 않았다. 객차 안 사람들은 모두 혼미한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밤 열시 5분 제천역 도착하여야 할 열차가 오지 않았다. 열차에서부터 오는 통신도 끊겼다. 역 상황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철로 위에는 있어야 할 열차가 보이지 않았다. 역장은 30년을 근무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열차가 오는 도중에 사고가 났나 싶어 코레일 상황 통제실로 보고했다. 하행선으로 가는 열차는 출발하여 죽령터널을 통과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하행열차가 가는 도중에 반대편 선로에서 운행하고 있어야 할 KTX-EMU 707 열차는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서 만나야 할 고속열차는 간곳없고 건너편 옆 선로는 횅하니 비어 있었다.
비상이다! 열차가 통째로 절벽 밑으로 굴러떨어졌는지도 모른다. 밤이라 유동 인구가 적어 열차의 객석이 많이 비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열차가 선로에서 탈선하는 일은 간혹 있어도 통째로 선로 밖으로 이탈하여 절벽 아래 계곡으로 떨어진 사고는 세상 어디에서도 없는 일이었다. 중앙선 죽령터널이 속해있는 구간의 모든 열차 운행이 중지되었다. 밤이지만 인근지역의 소방대가 출동해 긴급구조대를 편성하여 영주와 제천 사이의 철도 옆 절벽 구간을 샅샅이 살피고 가용할 수 있는 119구급차를 모두 대기시켰다.
교통부장관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제2인자인 왕세자가 와서 새로 건설될 원자력발전소 수출 계약을 한 후 저녁 만찬을 끝낸 대통령은 관저로 가지 않고 바로 긴급국가재난 회의를 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들은 사고 현장의 소식이 들어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사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밤늦도록 철로 변을 수색해도 열차의 행방이 묘연했다. 트럭이나 조그마한 승용차도 아니고 100미터도 넘는 길이를 가진 거대한 열차가 운행 중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차 증발 사고 소식은 순식간에 국내 방송뿐만 아니라 외신을 타고 전 세계 방송들이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은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 이 거짓말 같은 사고를 뉴스로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한국은 물론 외국 방송들도 매시간 이 기괴한 열차 증발 사고를 긴급뉴스로 보도했다.
청량리역에는 지방에서 오는 가족과 친지를 마중 나와 있던 사람들이 밤을 새워 기다렸다. 전광판에는 23시 24분에 도착한다던 KTX-EMU 707 열차는 행방불명되어 수색 중이라는 글자가 몇 분마다 게시판에서 깜박거렸다. 마중 나와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 황당한 사건에 정신이 나가서 초조하게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날이 밝아 왔다. 헬리콥터 여러 대가 떠서 철길을 따라 하늘은 날며 수색하고 방송국 헬리콥터는 카메라로 하늘에서 철길을 비추며 사라진 KTX-EMU 707 고속열차를 추적 보도하고 있었다. 소방대원과 구조대원들은 제천과 영주 사이에 있는 모든 터널을 걸어서 들어가며 조사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열차의 흔적은 없었다. 조그만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열차 증발 사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말 그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과학자들이 속속 인천공항으로 들어와 현장 조사에 나섰다. 도대체 동화책에 나오는 낮도깨비 요술 같은 이 황당한 일을 21세기 최고의 석학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하루가 지나자, 미국의 유명 신문에서 불가사의한 이 사건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인도 과학자가 주장한 말이 신문에 실렸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우주공간의 힘이 작용하여 거대한 열차를 빨아들여 철로나 지상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인도의 과학자는 고도로 발달 된 외계문명이 지구에 접근하여 어떤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순식간에 열차의 쇠붙이와 그 안에 타고 있는 인간을 모두 분자 상태로 분해하여 자기들의 행성으로 돌아가서 다시 조립하여 연구하려고 끌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는 나라 브루나이 과학자는 4차원의 세계를 설명하며 인간이 알지 못하는 4차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한국의 죽령터널 안에 존재하여 고속열차가 그 4차원 세계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KTX-EMU 707 열차 정원 456명 중 밤이라 반은 넘게 객석이 비어 217명 승객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열차와 함께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다시는 지구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보낸 집에서는 이 황당하고 기막힌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열차에 가족들이 타고 있었던 사람들은 사고가 나서 시신이라도 찾으면 슬픔 속에 장례를 치렀겠지만, 그래도 어디엔가 살아있어 언젠가는 밤안개를 헤치고 사라졌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에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고속열차 여객 승무원 송미화와 약혼하여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서울 왕십리에 신혼집까지 마련한 장성철은 직장에서 퇴근하여 텅 빈 신혼집에서 웨딩 전 촬영해 걸어놓는 신부 미화의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니 기가 막혔다. 약혼자 미화가 방금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다. 결혼식 전이지만 매일 만나 신혼집을 꾸며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는데 약혼녀 미화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열차가 어떤 강력한 힘으로 넓은 우주공간 어디엔가 존재하는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어도 언젠가는 갔던 길을 되돌아 지구로 돌아와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신혼살림으로 사놓은 손때 묻지 않는 텅 빈 냉장고 문을 열어 보며 한숨짓고 있었다. 2주일이 흘러 결혼식 날짜가 지나자, 기다리는 희망이 점점 절망으로 변해 갔다. 약혼녀 미화가 인간이 상상하지 못할 어떤 힘에 의하여 우주공간을 끌려갔다가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때가 10년이 될지 50년이 될지 아니면 몇백, 몇천 년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는 서로가 호호백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거나, 백년 후가 되어 자기는 이 세상의 생을 다하고 저세상으로 갔을 때 돌아오면 내가 기다리다가 홀로 죽어 간 줄을 미화는 알기나 할까? 영화에 나오는 4차원의 세계는 시공을 초월해,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그때 돌아온 미화는 지금 벽 한쪽 면을 차지한 커다란 웨딩사진 속의 모습 그대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희망과 절망이 엇갈려 한숨짓고 있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열차 증발 사건은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과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우리의 일상생활 주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믿으면서 자기도 어느 날 그렇게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부 사람들은 호기심이 생겨 자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전 세계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던 사건도 시간이 지나자 차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자 미국 뉴욕의 한 신문이 이때까지 인류가 겪은 미스터리를 특집으로 실었다. 죽령의 KTX-EMU707 고속열차 증발 사건은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큰 미스터리 사건이지만, 이전에도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플로리다 인근 버뮤다 삼각지는 플로리다, 푸에르토리코, 버뮤다를 연결하는 삼각주로 이 지역을 지나던 비행기와 선박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불가사의 한 일이 가끔 일어나는 지역이었다.
1945년도 마지막 달인 12월 5일 미국 해군 폭격기 다섯 대가 로더데일 공군기지를 이룩하여 훈련 비행에 나섰다. 데일러 중령이 인솔하는 이 비행 편대에는 14명의 미국 해군 소속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비행기에는 두 시간을 비행할 수 있는 연료와 모의 폭탄이 적재되어 있었다. 날씨는 쾌청하고 바람도 없어 비행하기 좋은 최적의 날씨였다. 플로리다 앞바다 위에서 한 시간 반 동안 비행 훈련을 마치고 기지로 돌아오려던 때였다. 갑자기 2번기에서 편대장 데일러 중령에게 보고했다.
“나침판 계기가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순간 데일러 중령은 자신이 조종하던 1번기 계기판을 보았다. 방향을 가리키는 계기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곧이어 3번기 4번기 5번기에도 방향 계기판이 고장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망망한 대해 위에서 방향 계기판이 고장이 나면 방향을 잡을 수 없다. 관제소로 긴급 무전을 보냈다.
“비행기 방향 계기판이 고장이 났습니다.”
“고장 나지 않는 비행기가 앞에서 선도하며 돌아오라.”
“훈련기 다섯 대가 모두 방향 계기판 고장입니다.”
데일러 중령은 10년 동안 전투기를 조종한 베테랑이었다.
“경험에 의해 항로를 잡아 기지로 돌아오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빨리 돌아오라.”
통신은 여기서 끊겼다.
이십 분을 기다려도 훈련 나간 비행기는 보이지 않고 통신도 되지 않았다. 관제소에서는 애가 탔다. 망원경으로 남쪽 하늘을 살피며 훈련 비행기 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데일러 중령은 경험을 바탕으로 육지 쪽으로 비행기를 조종했다. 가도 가도 비행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것은 바다뿐이었다. 비행 경력 10년, 그동안 2차 대전 때 독일군의 대공포에 맞아 꼬리날개가 부서지고 조종간 계량기가 모두 멈추어 빨간 신호가 들어오는 가운데에도 육감으로 방향을 잡아 30분이나 버티며 기지로 돌아왔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으로 비행기는 빨려 들어갔다. 같이 비행하는 대원들의 비행기도 보이지 않았다. 연료 계량기에는 앞으로 5분 분량만 남아 절망이었다.
관제소에서는 무전을 받은 지 30분이 지났다. 이제는 희망이 없다. 바다에 불시착했으면 대원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으니 살아 있을 것이었다. 구조비행기를 띄웠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갑자기 무전이 잡혔다. 훈련기들끼리 주고받는 무전이었다.
“편대장님,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신 차리고 바다 쪽으로 접근 하지 말고 비행기를 평행으로 유지하여 비행해라.”
관제탑에서 긴급하게 불렀다.
“훈련기! 훈련기! 들리면 대답하라. 지금 어디쯤이냐? 구조기가 출 발했다.”
더 이상 통신이 되지 않았다. 연료가 떨어져 한 시간도 더 전에 바다로 추락하였을 비행기에서 온 무전이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출발한 구조비행기에서 무전이 왔다.
“맑던 하늘에 갑자기 안개가 끼고 비행기는 통제 불능이라 조종할 수 없습니다.”
“구조를 그만두고 기지로 돌아오라.”
“돌아갈 수 없습니다. 조종 불능입니다.”
통신이 끊겼다. 훈련기도 구조기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국 공군과 해군은 버뮤다해역을 비행기와 선박으로 대대적인 수색을 했다. 어디에도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떨어져 나온 부유물도 기름의 흔적도 없었다. 연료가 떨어지고 한 시간 후에도 비행하고 있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몇 달 동안 하늘에서는 비행기로 바다에서는 함정을 동원하여 수색해도 훈련기도 구조기도 흔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버뮤다해역이 마의 바다라고도 하고 4차원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고 믿기도 했다.
버뮤다해역에는 비행기뿐만 아니라 1918년 브라질에서 보릿모어로 향하던 306명의 승객을 태운 콜리어 USS 사이클롭스호가 조난 신호도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근처의 몇 개 나라에서 한 달을 수색하였으나 배에서 떨어져 나온 부유물도 기름띠도 발견할 수 없었다. 버뮤다 삼각지역은 근세뿐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많은 배가 실종되어 ‘마의 삼각지대(Devils Triangle)’라고 불려 와서 근대 과학자들은 과거의 미스터리를 과학적 근거로 접근하려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었다.
4차원의 세계이니 마의 힘이니 하던 미스터리 한 일들이 근세에서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1948년 6월 취리히에서 출발하여 알프스를 넘던 여객기가 갑자기 관제실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비행기에는 176명의 승객과 승무원 10명이 타고 있었다. 비행기가 사라지자, 헬리콥터와 정찰기를 띄워 사라진 근처를 샅샅이 찾아도 흔적이 없었다. 세계의 신문들은 비행기가 외계의 생명체에 의하여 납치되었다고도 하고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며 저마다 억측을 쏟아 내었다. 반세기가 지난 2000년 기후의 온난화로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 빙하의 끝자락에 여객기 타이어와 사람의 팔이 나타났다. 비행기는 알프스산맥을 넘다가 시계 불량으로 산 정상 부근을 들이받아 폭발하지 않고 두텁게 싸인 만년설 속으로 들어가고 주위에는 가벼운 눈사태를 일으켜 흔적이 지워졌던 것이었다. 만년설은 반세기 동안 밑으로 흘러내려 빙하가 되고 산 위에는 눈이 내려 쌓였다. 흘러내리던 빙하가 지구의 온난화로 녹아내리자, 비행기 동체 잔해와 승객들의 시신이 드러난 것이라고 세계 신문은 보도 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죽령터널의 열차 증발 사건은 이때까지 지구 위의 미스터리와는 차원의 다른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십 년이 지났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죽령터널 열차 증발 사고는 점점 잊혀갔다. 사라진 열차 기관사 조기철의 아내 임순희 여사는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 숱한 고생을 하며 살고 있었다. 철도회사에서 몇 년 동안 월급의 일부를 통장으로 보내 주더니 어느 해부터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국가에서도 철도회사에서도 사라진 직원의 월급을 더 이상 줄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기관사 조기철이 우주인과 통해서 열차를 몰고 만화 나오는 은하철도999처럼 우주로 갔을 거라는 망상을 하기도 했다. 어쩌던 기관차와 함께 217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의 행방을 모르는 상황에서 열차 기관사는 어떤 형태로든지 사건에 연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희대의 열차 증발 사건이라 잊을 수는 없지만, 몇 달이 지나자, 열차가 사라진 그 철로, 그 터널 속으로 다른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여 10여 년을 아무 사고 없이 운행하고 있었다. 열차가 사라지는 사고가 난 직후 사람들은 중앙선 열차를 타는 것을 꺼렸으나 세월이 지나니 누구도 열차를 타면서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다가 사라진 부부 양가에서도 아들딸이 없는 사돈으로 만나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두 사람이 잘 살도록 바랐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서 아들딸 낳고 이 세상처럼 살고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돈은 만나면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가 어느 날 다른 세상에서 낳은 손자와 손녀들을 데리고 사라졌을 때처럼 갑자기 나타날 것이 라고 말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장성칠은 약혼녀가 사라져도 사놓은 신혼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벽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웨딩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약혼녀 미화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직장에서 퇴근하여 현관문 앞에 설 때마다 문을 열면 약혼녀 미화가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쪽 벽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미화의 사진뿐, 집 안은 썰렁했다. 언제부터인지 성철은 사진 속 약혼자와 대화하고 있었다.
“여보! 미화 씨. 나 왔어. 오늘도 온종일 빈집을 지키고 있느라고 심심했지? ”
대답 없는 약혼녀 사진을 눈물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미화도 우주공간으로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밤하늘에 빤짝이는 어느 별에서 떠나온 고향별 지구를 바라보며 나를 생각하면서 눈물짓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하여 온 집안 친척들이 사라진 약혼자를 10여 년이나 기다리고 있는 성철을 보고 말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언제까지 그렇게 궁상을 떨며 살아갈 거냐? 잊어버리고 다른 처녀와 결혼해라.”
사라진 사람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체념 속에서 잊혀 모든 사람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2045년 5월 24일 밤 열시 11분 제천역 상황실, 중앙선 선로 화면에 난데없는 열차가 나타나며 열차가 역으로 들어온다는 신호가 왔다. 방금 밤 마지막 열차가 지나가고 10분이 지난 이 시간에는 오는 열차가 없는데 갑자기 나타난 열차는 제천역을 향하여 들어오고 있었다. 열차는 서서히 속력을 늦추다가 정차했다. 역장과 역무원들은 너무 이례적인 일이라 모두 승강장으로 뛰어나가 바라보고 있었다. 열차는 강력한 열기에 그을린 듯 검은색에 가까워 도장 하지 않고 공장에서 방금 만들어 낸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공장에서 새로 만든 열차를 먼저 성능시험을 하는 것 같았다. 승강장에 있던 역무원들은 이 이상한 열차를 놀라며 바라보고 있는데, 금테 모자를 쓰고 단정한 복장을 한 열차 기관사는 아주 능숙하고 거리낌 없이 열차를 조종하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린 승객 한 명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철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어제 갈 때만 하여도 이 계단이 없었는데 낮 사이에 만들었나?”
제천역 신호기가 푸른색으로 바뀌고 열차는 원주역을 향해 출발했다. 원주역의 역무원들은 열차 도착 업무를 정상 처리하고 열차가 출발하면서 청량리역 상황실로 자동 연락되었다. 열차는 종착역인 청량리역에 멈추어 섰다. 역무원들도 임시열차 도착 업무를 정상 처리했다. 승객들은 열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개찰구로 나갔다. 열차가 들어오고 승객이 내리고 어느 것 하나 이상한 것 없이 매시간 도착하는 열차와 같이 진행되었다. 열차에서 내리는 승객들도 청량리역에서 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별 관심도 없이 지나쳤다. 신혼여 행을 떠나는 부부는 청량리역 앞에서 택시를 탔다.
“아저씨 인천공항으로 가요.”
“참, 좋을 때입니다. 신혼여행 가세요? 어디로 가요?”
“예, 뉴질랜드로 가요.”
“몇 시 비행기입니까? ”
“25일 두 시 비행기예요.”
운전석 앞 전자시계에는 2045. 05. 24. 23:30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저씨, 시계 날짜가 틀리는 것이 아니예요?”
“오늘 아침에 시간을 맞추어 맞을 건데…. 틀렸으면 손님을 태워드리고 다시 맞출께요.”
신혼부부는 연도를 10년이나 앞으로 표시하고 다니는 기사가 좀 멍청해 보였다.
업무를 마친 승무원 송미화는 열차에서 내려 왕십리에 마련해 둔 신혼집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약혼자 장성철은 잠옷 바람을 문을 열고 나오고 뒤에는 잠옷 입은 여인이 아기를 안고 나오며 말했다.
“여보, 누가 왔어? 이 밤중에 누구야?”
송미화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룻밤 사이에 약혼자는 자기보다 나이가 10년은 많아 늙어 보이는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데리고 나오니 기가 막혔다. 전부터 살림을 차린 여자가 있어 아이를 낳은 것을 숨겨온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신혼집까지 데리고 와서 자기가 올 줄 뻔히 알면서도 같이 자고 있다니, 이 남자가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유분수지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화가 난 미화는 약혼자 장성칠의 따귀를 힘껏 후려쳤다. 얼떨결에 따귀를 맞은 장성칠은 송미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장성칠은 내일 아침이면 전 세계가 개벽할 일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화난 약혼녀 앞에서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