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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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서 필수품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내 경우엔 모자다. 사철 모자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백발을 가리는 것이다. 겨울에는 보온의 이유도 적지 않다. 뇌졸중의 가족력 때문에 겨울철에 딸에게서 떨어지는 ‘찬 공기 주의령’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노년의 패션으로 모자를 쓰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그런 것은 내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백발을 가리려는 것도 일종의 패션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나의 모자 이력은 그리 화려하지 못하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학생모, 대학 3∼4학년 ROTC 시절의 사각모와 농촌봉사활동 할 때의 작업모, 군 시절의 군모, 땅을 마련해 농사일을 할 때의 창이 넓은 밀짚모자나 또는 작업모, 그리고 지금 자주 쓰는 모자들, 그 정도다. 학회에 가서 참가 기념품으로 받아오는 모자가 더러 있기는 했으나 잘 쓰지 않았다.
아내와 해외여행을 가 쇼핑을 할 때도 아내는 더러 모자를 사기도 하는데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가 내 모자를 챙겨주지도 않았다. J선배와 Y후배는 해외여행을 가면 수집가 수준으로 꼭 현지의 모자를 산다고 했다. 소장한 모자를 바꿔가며 다 쓰고 다니는 걸 보지 못했으니 ‘수집벽’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도 같다. 그들이 가지고 있을 다양한 모자 종류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써 본 모자의 형태가 야구모자와 뉴스보이캡 정도였고, 요즘은 면으로 된 플랫캡을 주로 쓰고 다닌다. 모자를 쓰고 다니다 보니 어디 가서 두고 오거나 분실하는 경우도 많아 나이를 못 속이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자네, 오늘은 모자 안 썼네?”
“예 장모님, 차에 두고 내렸어요.”
“이거 한 번 써보게나. 저 양반이 안 쓰는 모자인데 자네가 쓰게.” 어느 날 처가에 갔을 때 장모님이 옷장에서 모자를 꺼내 주셨다. 쑥색 바탕에 갈색 줄무늬가 있는 면모자였다. 한동안 장인께서 쓰시던 것을 본 기억도 났다.
“아버님이 쓰시는 모자 아니에요?”
“아니네. 저 양반은 요즘 중절모를 쓰지, 이건 안 쓰네. 면이라 세탁도 해 둔 것이니 쓰다가 땀이 차면 또 세탁하면 되니 갖다가 쓰게.”
옆에 계시던 장인어른께서도 가지고 가 쓰라고 손짓을 하셨다. 그래서 받아오긴 했는데 한동안 쓰지는 않았다. 다른 모자도 많은 데다가 면이라 계절적으로 좀 이른 느낌도 들어서였다. 계절이 바뀌어 한기가 엄습하면서 장인께서 쓰시던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사이 불과 한 달여 기간 동안 평소 쓰던 모자를 세 개나 분실했다. 어디 두고 온 지 모를 때도 있었고 잠시 주차한 사이 차 지붕 위에 벗어 놓았다가 깜박 잊고 그대로 달려 모자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농장 입구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길에서 모자를 주운 동네 사람들이 내 모자인 줄 알고 모자를 농장 입구 나무에 걸어두어 찾은 적도 있었다.
모자를 안 쓰는 친구들과 만나면 내게 모자 벗기를 종용할 때도 있다. 백발 가림용이라면 내 얼굴은 팽팽해 백발노인네 같지 않으니 차라리 염색하고 모자는 쓰지 말라는 것이다. 전에도 염색하라는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환갑도 되기 전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검은 머리카락보다 백발이 더 많았다. 시골에서 작은 기관의 장(長)을 하셔서 기관장들 모임이나 대중 앞에서는 공식 석상에서 아버지도 백발이 신경이 쓰이셨던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염색하셨는데 자주 하시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염색이 빠진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3층인가, 4층인가 세어보기도 할 정도로 색이 다양했고 보기가 싫었다. 어머니도 잔소리하며 염색을 다그쳤으나 아버지는 그렇게 빠른 주기의 부지런한 염색은 이행하지 못하셨다. 그때 나는 염색을 하려면 무척 부지런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커서도 그렇게 부지런하지 못한 자신으로서는 아예 염색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주변에서 순백의 내 머리카락이 더 보기 좋다고 하는 지인들도 있어서 나는 그 말에 힘입어 아직 한번도 염색을 해본 적이 없다. 다행히 아내도 내 백발에 시비를 걸지 않아 ‘염색 불가’를 지금까지 고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백발 가림에는 모자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모자를 자주 쓰기는 하는데 색상이나 형태든 번갈아 골라 쓸 만큼 모자는 많지 않아 패션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성당과 같이 실내에서 반드시 벗어야 하는 상황에서 쉽게 접어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재질과 형태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 목적과 상황에 가장 적합한 것이 겨울철에는 장인께서 쓰시던 모자다. 그래서 요즘엔 가끔 세탁을 하며 이 모자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자를 쓰고 찍은 독사진과 그룹사진도 여러 장 있다. 사진으로 보는 모자 쓴 내 모습은 과거의 나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물론 늙은 신체 탓도 있겠으나 나 같지도 않고 비슷해 보이는 누구도 생각나지 않는다. 마스크까지 쓰고 나서면 아무도 몰라볼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그런 모습으로 한 미술전시회에 갔는데 화가인 후배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적도 있었다. 모자가 익명성을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경험했다. 또 백발을 가리는 것처럼 모자는 이미 위장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니 모자를 쓰기 전, 후의 자화상도 그 차이가 외관에만 있지 아니하고 내면적으로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아침에 빨겠다고 가져간 모자를 다 말랐다고 들고 왔다.
“건조기에 넣으니 금방 말랐어요. 당신, 이 모자는 절대 분실하면 안 돼요!”
아내는 친정아버지가 쓰시던 모자를 강조하며 오래 간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세탁해서 아버지의 땀이든 때든 수없이 차고 없어지고 했을 터이니 마치 아버지의 영적인 기운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아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다. 그런 내 생각도 모자를 쓰기 전과 후의 내면적 차이라면 차이다. 예전 같으면 아내에게 또 잔소리라고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아내가 내미는 모자를 받아들며 모자가 두피만 따뜻하게 보온하는 게 아니라 뇌 속의 ‘생각하는 세포’에까지 온기를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어디 안 나가지요? ”
“특별한 약속은 없는데 모자에서 세제 냄새도 뺄 겸 산책하고 와야겠소.”
“그래요.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후배와 약속이 있어서요. 잘 다녀오세요.”
“당신도 잘 다녀와요. 후배와 맛있는 것도 먹고….”
나는 모자를 쓰고 현관을 나서면서 ‘나홀로 산책’에 끼어들지 않은 아내에게 속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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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랜드를 바라보며 공지천 제방길을 열심히 걷고 있는데 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선배님! 허진수입니다. 통화 괜찮으세요?”
“어, 진수! 그래 괜찮네. 그런데 갑자기 웬일인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계속 통화를 했다.
“지금 춘천에 왔는데 시간이 좀 나서 선배님 뵙고 갈까 해서요.”
“시간 안 돼도 내야지, 진수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 지금 어디로 가면 되겠나?”
“감사합니다. 여기 춘천역 1층에 있는 카페입니다.”
“그래? 잘 됐네. 여기서 가까우니 금방 가겠네. 조금만 기다리게.”
나는 발길을 돌려 역으로 향했다. 반가운 마음에 빠른걸음으로 걸었더니 10분도 안 돼 카페에 도착했다. 야구모자를 쓴 진수가 문 앞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 안녕하셨어요?”
“야! 이거 얼마 만인가? 내가 조교할 때이니까. 그때 자네 1학년생이었지. 아마?”
“예, 맞습니다. 30년 만이네요.”
“반갑네, 아주 반가워. 자, 안으로 들어가지.”
“여전하시네요? 모자도 잘 어울리시구요.”
“여전하긴? 폭삭 늙었는데…. 자네야 말로 옛모습 그대로야!”
“저도 대머리에 중늙은이가 다 되었어요. 보세요?”
진수가 모자를 벗어 앞이 훤한 제 머리를 보여주며 나이듦을 과시(?)했다.
“자넨 1학년 때도 야구모자 계속 쓰고 다녔지?”
“예, 기억하시네요. 그때 야외에 자주 나가다 보니 모자 쓰는 습관이 몸에 배었었어요.”
“맞아! 생각나네. 자넨 농학 전공인데도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 늘 사방 돌아다니며 이상한 돌을 주워 돌도끼다 뭐다 하며 내게 보여주기도 했지. 그래서 나중에 전과할 줄 알았는데 안 했나?”
“예, 전과는 안 하고 대신 농업경제학을 부전공으로 하면서 농업사에 대해서도 공부를 좀 했습니다. 다 옛날 얘기지요.”
“내가 유학 간다고 하니까 자네가 공항까지 배웅 나왔었지. 학부생으로는 자네가 유일하게.”
“예, 생각납니다.”
“그때 자네가 내게 준 선물도 기억하는가?”
“예, 흙과 모자였지요.”
“그래. 흙과 까만 중절모. 자네가 날 애국지사로 만들었지. 자네가 고국을 잊지 말라고 비닐봉지에 흙을 담아주었어. 그 뜻은 알겠는데 그때 모자는 왜 주었지?”
“지금 생각하면 저도 참 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 주변에 외국 가는 분들이 없어서 조교 선생님이 외국에 박사 공부하러 간다고 하니 정말 역사책에 나오는 애국지사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역사책에서 많이 본 지사들의 중절모를 가서 쓰시라고 드렸던 것 같아요.”
“그래, 나도 그렇게 짐작은 되었지. 그래서 아까 말했잖아, 자네가 나를 애국지사로 만들었다고. 아주 젊은 나이에 그런 모자를 쓰고 캐나다 땅을 누비라고 했던 것 아니야?”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박사도 지사 아닌가요. 박사학위 받아 국가와 사회에 몸 바치려고 큰 뜻을 품은 것이니. 지사도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요.”
“그렇긴 하지, 과학계 지사. 그렇다고 중절모는 아니지?”
“예, 그건 그런 것 같습니다. 선배님께는 지금 쓰고 계신 플랫캡이 더 잘 어울리십니다.”
나는 진수와 한바탕 크게 웃고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때 받은 흙은 내려서 세관 통과할 때 문제가 될 것 같아 기내 화장실에 가서 버렸다고 해서 또 한바탕 웃었다.
“30년 만에 만났는데 어디 가서 소주 한잔 할까?”
“아니, 제가 예매를 해 놓아서….”
진수는 오후 시간에 명문대를 나온 와이프가 운영하는 학원 일을 같이 돌봐야 해서 예매해 놓은 그 시간에 꼭 가야 한다고 했다. 친구 자녀 혼사가 있어서 왔다가 잠시 짬이 나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더는 붙들 수 없다고 생각돼 나는 매점에 들러 간식용 과자와 음료를 사서 진수 손에 들려주었다.
“반가웠는데 금방 또 헤어지니 참으로 아쉽네. 소주도 한잔 못 하고.”
“다음에 또 연락을 드리고, 집사람과 같이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그래, 나도 한번 자네 사는 데 가보겠네. 학원 구경도 하고.”
“예! 언제든지 오세요. 안녕히 계세요.”
진수와 악수를 하고 헤어져 나는 다시 산책하기 위해 제방길을 향해 걸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낮게 떠가는 구름 위로 중절모를 쓴 청년지사가 웃고 있었다. 마치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그제나 이제나 내게 중절모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남은 산책길을 마저 걷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와 저녁을 먹으면서 낮에 진수를 만나 나누었던 얘기를 하자 아내도 “참 재미있는 후배”라며 파안대소했다. 그리고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어울릴 것 같다고 중절모도 한번 써 보라고 했다. 유럽에 갔을 때 하나 사 올 걸 그랬다고 미처 챙기지 못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C후배도 파란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데 그 친구에겐 잘 어울리더만 난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난 지금 쓰는 이 모자가 좋아. 당신도 이 모자 잘 간직하라고 했잖소? 새 모자 생기면 안 쓰게 되니까. 그것도 그렇고. 안 쓸 것을 왜 사나?”
묵묵히 내 말을 듣기만 하던 아내가 체념한 듯 알았다고 하고는 더는 모자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모자는 본인이 쓰든 남편이 쓰든 멋이 쓰고 벗고의 최대의 기준이다. 모자가 많아도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구석에 처박혀 먼지만 뒤집어쓰기 일쑤다. 방 안에서 그렇게 버려지다시피한 모자를 보는 것은 아내의 낭비벽만 증거할 뿐 아무 소용이 없다. 내게도 그런 모자들이 꽤 여러 개 옷걸이에 걸려 있다. 유행에도 뒤처지고 빛깔도 퇴색해서 누구를 줄 수도 없다. 가끔 모자 앞부분에 쓰인 행사명으로 예전의 추억을 소환해주는 정도로만 존재감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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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상을 물리고 아내는 TV 드라마를 보며 식탁에서 멸치를 다듬었다. 나는 핸드폰을 켜 손으로는 인터넷을 뒤적이면서 머릿속으로는 마치 모자 연구라도 하듯 모자에 대한 상념을 이어갔다. 습관적으로 모자를 쓰는 경우라도 모자로 인해 단지 수십 그램의 무게만 머리 위에 더 얹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느낌이 강해진 것 같았다. 여자들의 경우에는 헤어건강, 미용, 패션, 생활편의 등 모자에 부여되는 의미가 더 다양할 것 같다. 머리감기(세발)와 머리빗기(정발)를 하지 않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도 많다. 그에 비하면 남자들의 모자쓰기는 단조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공적인 기념품 외에 개인적으로 모자를 선물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웬만한 미용이나 패션 제품처럼 본인의 취향에 따른 선택이 우선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녀 구분할 것 없이 단체행동에서는 통일된 모자가 소속감과 행동연대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녹색의 새마을운동 모자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다. 요즘도 농촌 마을에 가면 새마을지도자라는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예전만큼 녹색 바탕에 노란 마크가 새겨진 새마을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 같지는 않다. 내 경우는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대학생 농활팀의 일원으로 농촌봉사활동을 하면서 봉사활동 기간 내내 새마을운동 모자를 썼던 기억이 있다. 그때 어렴풋이 새마을지도자라면 그 모자로 인해 외부로 드러나는 직분에 대한 상징성과 함께 지도자의 의식에도 책임감이 더 공고해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렇게 모자는 백발을 포함해 감지 않거나 빗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리는 역할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마을운동과 같이 사명감 같은 것을 드러내는 역할도 하는 것 같다. 요즘 내가 쓰는 모자의 역할에도 가림과 보온 외에 그런 드러냄의 역할이 있을까 자문해 본다. 모자로 애국지사(?)를 강요받은 해프닝은 추억으로 웃어넘기면 되지만 내 모자에 웃어넘길 수 없는 어떤 무거운 함의(含意)가 들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유명한 화가들의 명화 가운데 밀짚모자와 펠트모자를 쓴 자화상이 몇 개 있다. 빈센트 반 고흐와 폴 세잔이 그린 그림이다. 두 화가 모두 두 종류의 모자를 쓴 자화상을 그림으로 남긴 것을 보면 모자를 즐겨썼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보통 화가들은 베레모를 많이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미술가들이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야간작업을 하기 때문에 머리나 수염 관리가 안 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머리와 수염이 정돈 안 된 상황에서 누가 찾아올 수도 있고 잦은 관리가 귀찮기도 하기 때문에 가림의 목적으로 모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챙이 없는 베레모를 선호하는 것은 모자 옆에 챙이 달려 있으면 작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레(Beret)는 프랑스어로 펠트로 만든 챙이 없는 둥근 모자를 뜻한다고 한다. 베레는 일찍이 크레타 시대부터 사람들이 착용했고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거쳐 각각 ‘필로스’와 ‘필레우스’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동물의 털을 이용한 둥그런 모자가 일정한 디자인을 유지한 것은 14세기경부터였으며 주 사용자층은 네덜란드, 벨기에의 농민이었단다. 이러한 펠트 모자는 돈이 없고 여유 없는 사람들이 쓰는 장식 없는 납작한 모자였는데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자신들의 직업적 상징으로 이 납작한 펠트모자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가 자신이 베레모를 쓰던, 쓰지 않던 화가가 그린 그림에 베레모가 등장하는 그림도 있는데 렘브란트는 베레와 고풍스러운 의상을 입은 모습을 초기 작품에서 자주 남겼다고 한다. 램브란트는 초기에 역사화를 그리는 화가로서 유명했는데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 인문학 지식이 많았던 장인의 이미지를 초상화로 남기고 싶어 그런 이미지를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베레를 그렸다고 한다. 이후 램브란트의 화풍을 닮고자 하는 많은 화가들이 유행처럼 따라 하면서 당시의 그림 속에 베레가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자가 화가들에게 직업적 상징으로 착용되었고 또 그림에서는 인문학 지식의 이미지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다.
내가 리모컨을 찾아 TV 볼륨을 줄이고 이런 얘기를 해주자 아내가 한마디 했다.
“당신도 이제부터 베레모를 써야 하는 것 아니에요?”
“난 화가가 아닌데….”
“베레모가 인문학 지식이 많은 램브란트 장인의 이미지로 차용되었다고 하니 하는 말이지요. 당신도 작가잖아요?”
“내가 쓰는 이 플랫캡도 베레모 사촌쯤 되기는 하지.”
“그 모자가 당신한테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우중충한 색이니 밝은 색상으로 바꿔 새로 베레모 한 개 더 사요.”
나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는 않으나 아내가 하는 대로 따라갈 생각으로 말없이 다시 TV 볼륨을 높였다. 리모컨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데 아내가 다듬어 놓은 멸치 위로 떨어진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베레모는 당신이 써야겠는 걸?”
“왜요?”
“이것 봐!”
아내는 내 손에서 머리카락을 낚아채 쓰레기통에 버리고 황급히 멸치가 담긴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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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여름이 더웠던 만큼 겨울엔 눈이 많이 올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정말 극과 극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새해 들어 엄청난 대설이 쏟아졌다. 농장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눈이 쌓이는 대로 그대로 두면 금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우스에 쌓이는 눈을 쓸어내렸다. 쓸고 뒤돌아서면 또 금방 쌓였다. 그야말로 눈과의 전쟁이었다. 서너 시간을 정신없이 눈을 치웠다. 그나마 하우스가 작아서 혼자서 감당이 되었다. 그런데 제설작업을 어지간히 마치고 보니 머리가 허전한 것이 느껴졌다. 살펴보니 모자가 없어졌다. 분명히 집에서 쓰고 나왔는데 작업 중에 벗겨져 어딘가 떨어진 것 같았다. 작업장을 사방 둘러봐도 쌓인 눈 때문에 찾을 수가 없었다. 눈이 다 녹으면 어딘가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 같기는 한데 한겨울을 모자 없이 지내야 하는데다가 아내의 듣기 싫은 성화가 예상돼 귀갓길에 백화점에 들렀다. 점원과 같이 모자코너를 샅샅이 뒤졌으나 같은 것은 없고 비슷한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내는 친정아버지가 쓰시던 것이니 잘 간직하라고 했는데 분실을 했으니 이유가 어떻든 한소리 할 게 뻔했다. 백화점을 나와 인근 재래시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몇 군데 점포를 다 뒤진 끝에 겨우 비슷한 모자 하나를 발견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얼핏 봐서는 분실한 것과 같아 보이기도 했다. 눈 속의 분실한 모자를 찾기까지 대체품으로 쓸 만했다. 아내도 금방 알아보지 못해 추궁을 당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겨울이 지나고 기온이 오르면서 비닐하우스 주변의 눈도 다 녹았다. 그런데 눈 속에 있을 줄 알았던 모자는 보이지 않았다. 분실한 게 틀림없었다. 눈이 녹으면서 질펀해진 땅에 누군가의 발길에 의해 묻혔거나 아니면 하우스 옆에 쌓아둔 자재 사이로 떨어졌거나 둘 중 하나였다.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였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높이 쌓인 자재를 다 드러내기 전에는 확인할 수 없으므로 포기를 해야 했다.
구정에 처가에 갔을 때도 새로 산 모자를 쓰고 갔는데 장인, 장모 모두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셨다. 장모님은 “모자 잘 쓰고 있네” 하시며 새 것을 옛 것으로 인정해 주신 셈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들려주셨다.
“자네, 그 모자가 어떤 모자인 줄 아나?”
장모님은 모자에 특별한 사연이 얽혀 있는 것을 암시하시며 조곤조곤 말씀을 이어가셨다. 장모님의 모친, 그러니까 아내의 외조모께서 생전에 계실 때 장터에서 사다가 사위인 장인어른께 주셨다는 것이다. 사위가 쓰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수중에 가진 돈이 모자라 돈을 구하는 사이 다른 사람에게 팔릴까 봐 조바심이 크셨었다고 하셨다. 외조모님의 사위 사랑이 가득한 모자였던 것이다. 짝퉁 새 모자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속살이 예사롭지 않은 모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자를 장모님은 사위인 내게 주셨으니 사랑의 대물림으로 상징되는 귀한 모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 모자는 반드시 찾아야 하는 가보급 모자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빠른 시간 안에 하우스 주변을 크게 한번 정리하면서 모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5일에 한 번 서는 데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도 귀한 시골장에서 한눈에 그런 모자를 발견하고 돈을 빌려서 모자를 산 외조모님의 안목과 순발력이 놀라웠다. 그것은 시골에 사시는 노인네라고 무시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도 외조모님을 생전에 몇 차례 뵌 적이 있었는데 연세가 드셨는데도 총기가 좋으셨던 게 생각났다. 나의 외조모님에 대한 기억을 장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장모님도 맞다고 하시며 기분 좋아하셨다. 아내가 짝퉁모자를 알면 램브란트는 장인의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베레모를 그렸는데 나는 장인의 모자를 분실했다고 아내가 잔소리를 퍼부을 것만 같았다.
작년에 장모님으로부터 장인어른의 모자를 받고부터 모자로 인해 내 안에 어떤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모자 하나 쓴다고 내면에까지 무슨 변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모자에 어떤 함의가 분명히 있을 것만 같았다. 내겐 ‘백발 가림’이 모자 쓰는 첫 번째 이유이나 모자가 가리는 것은 결국 그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생각의 나약함, 유치함, 옹졸함 따위도 가려서 배려가 깊고 포용력이 큰 마음으로의 변화, 즉 모자가 두피의 보온만이 아니라 정신에도 온기를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모자를 쓰기 전과 후의 ‘차이나는 자화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마디로 모자 하나로 더 어른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모자로 가려지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에 아무리 많은 것을 뒤집어써도 인간적인 원숙함은 내면에서 길러진 만큼만 표면으로 배어 나오게 마련인 것 같았다.
5
계곡에 쌓인 얼음도 다 녹고 땅에도 서서히 풀빛이 돌 무렵 나는 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주말에 한번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진수는 괜찮다고 했다. 전철이 닿는 서울 근교라 찾아가기도 쉬워 약속한 날 나는 진수 처가 운영하는 학원으로 가 진수 내외를 만났다. 학원은 제법 규모가 크고 학생들도 많았다. 진수 처의 이력으로 그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명문 학원의 반열에 오른 학원이었다. 진수는 학원의 경영실장이었다. 진수 처는 교육 담당이고 경영은 처음부터 진수가 맡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춘천에서 30년 만에 나를 만나고 간 진수에게도 그동안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야구모자가 나와 같은 플랫캡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진수에게도 모자는 직업적 상징이고 아내에 대한 사랑의 징표였는데 이제는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적 원숙함으로 삶의 초점이 달라졌다고 했다. 내가 ‘모자 쓴 자화상’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더니 진수도 평생 모자를 쓰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크게 공감한다고 했다. 나는 진수에게 분실한 모자에 얽힌 얘기도 했다. 진수는 자기 일처럼 애석해하며 꼭 찾아야 한다고, 하루 시간을 내어 내 모자 찾는 작업을 와서 돕겠다고 했다.
진수에게 다녀온 그다음 주 일요일, 이번엔 진수가 내가 알려준 주소를 찍어 내 농장을 찾아왔다. 둘이서 하우스 옆으로 쌓아 놓은 자재를 들어내는 데도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여기 있네요. 선배님!”
눈을 치우면서 벗겨진 모자가 자재 사이의 틈새를 타고 내려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젖은 것만 빼고는 그대로였다. 진수가 집어준 모자를 받아들자 마치 감전된 듯 가슴 한가운데로 전율이 흘렀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흥이었다.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찾지 못했을 거야.”
“귀중한 가보를 잘 찾아서 다행입니다.”
“맞네. 가보로 잘 쓰고 잘 간직해야지.”
진수는 내 기분을 헤아려 먼저 소주를 반주로 하는 오찬을 제안했다.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는 나는 진수를 따라오게 해 시내 유명한 막국수 맛집으로 갔다. 전병과 수육을 안주로 시켜 소주 서너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진수는 운전해 돌아가야 해서 반 잔만 마시고 막국수로 식사를 했다.
“진수, 미안하네! 그때 중절모의 뜻을 미처 깨닫지 못해서.”
“무슨 말씀이세요? 모자만 바뀌었지 지사적(志士的) 삶은 여전히 사시고 계시잖아요? ”
“이제라도 중절모로 바꿔 쓸까?”
“안됩니다, 선배님! 장인어른께서 주신 형수님 외조모님의 대물림 사랑을 지키셔야지요?”
“그래야겠지? 하지만 30년 전 자네가 준 중절모도 마음에 쓰겠네. 지사가 아니면 어떤가? 모자처럼 덥히고(보온) 덮고(가림) 하며 차갑지 않게 보기 싫은 것은 가리면서 살다 보면 어른다운 부끄럽지 않은 자화상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예! 모자는 다 똑같은 모자가 아니고 또 그냥 쓰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쓰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쓰느냐에 따라 쓰임새도, 의미도 다른 것 같습니다.”
나는 진수와 함께 쓰임새의 속살이 예사롭지 않은 각자의 ‘모자’를 다시 쓰고 식당을 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쏜살같이 달려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진수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