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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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은 모든 존재를 의인화한다. 게다가 사람 중심이다. 더 나아가 관계의 틀 안에 모두 귀속된다. 동물이 등장해도 나무가 서 있어도 별들이 나타나도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존재들은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서로의 관계라는 설정 안에 얽혀 있다. 특히 현재라는 강력한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반전이라는 무기는 희곡문학의 핵심요소이다. 귀납보다 연역적 사고방식이 기본이고 희곡은 인간관계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문학이다. 이것이 희곡문학의 본질이다.
그 본질적 의미에서 희곡작가는 미래의 인간관계를 조율하고 설정해야 되는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제28대 한국문인협회 슬로건인‘문학을 존중하고 문인을 존경하는’시대적 사명이 있는 것도 위와 같은 본질적 맥락과 같다고 본다. 문학과 문인은 이 시대의 등불이고 앞서가는 수행자이기에 존중과 존경이 뒤따라야 한다. 문인들의 뼈 깎는 고통이 문학을 사랑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원초적 계기가 되고 있다고 믿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거운 바윗덩어리를 들고 태평양을 건너야하는것과같다.
희곡은 사람 중심의 문학이므로 인간에 대한 연구와 성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바탕 위에 인간관계의 설정에 따라 시대를 조명하며 그 이야기의 행동 양식에 따라 일부의 관객들은 생활의 양태까지 모방하며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막장드라마가 이 세상을 망치고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희곡문학은 대중적인 인간관계의 변화와 미래의 인간상까지 제시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회적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
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은 생계의 중력에 짓눌려 하루하루 연명하기조차 힘이 든다. 전업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상태에서 희곡문학의 본질적 부담감을 안고 살아간다는 건 고통의 축제를 계속 즐기는 것과 같다. 이 세상 고민을 다 껴안고 혼자 지구의 무게를 버티는 우스운 꼴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본질적 고민을 해야 문학의 힘이 세상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문학이 사치품으로 전락해 버린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문학이 끼치는 삶의 본질적인 의무에 비해 작가의 창작환경은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편이 아니다. 생존율조차 높지 않다. 특히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희곡작가들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도 척박해지고 인간관계 또한 위험한 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는 뜻이다. 굳이 희곡 문학의 본질을 꺼낸 이유는 갈수록 희곡에 대한 개념이 상업적이고 시대적인 사고에 부닥쳐 원초적인 요소가 사라진 듯하여 아쉬워서 던진 이야기다. 희곡을 바라보는 무지와 시선, 그리고 왜곡된 인지를 만날 때 가끔 소외감까지 느낀다. 대중에게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희곡문학. 시대에 맞춰 변해야 한다. 희곡작가로서 무기력해지기 전에 서둘러야 된다고 본다.
희곡문학은 텍스트를 통해 연결된다. 무대가 사라져도 텍스트는 남는다. 무대를 지키는 분들의 열정은 어느 시대라도 초월한다. 그 덕분에 이나마 버틴다고 생각한다.
희곡은 메커니즘의 발전에 의해 여러 생태계의 변화를 거치게 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무대보다 방송과 영화의 비율이 점점 확대된 상태다. 굴뚝산업의 연극보다 산업적인 영상을 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경제논리에 해당될 수밖에 없다.
드라마의 전달방식 또한 무대를 떠나 스크린에서 손바닥 안에 스마트폰이라는 기구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드라마는 무대언어, 영상언어, 방송언어로 특성화되고 전문화되고 있다. 하지만 창작이라는 본질도 점점 ChatGTP 빅데이터 안에서 생성될 확률이 높다. 이 부분은 문학의 본질적인 고민 속으로 빠지게 만든다. 이제 배우도 예견한 순서대로 AI 기술에 의해 사라질 위기에 놓여진 상태다. 가속화되는 상업예술의 발전은 빛의 속도다. 그에 비해 순수예술로서의 극문학은 속도감조차 없다. 마치 반대급부적으로 스스로 위안하며 체념상태에 놓인 경우처럼 보인다. 순수하고 기초적인 예술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람이 하는 일은 결코 AI에게 뺏기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강하다. 위험한 생각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을 통해 짧은 영상으로 길들여진 세대들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분절된 단어와 알 수 없는 기호의 남발 그리고 정서의 혼돈으로 양상된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니 기성세대 작가로서의 불안감은 미래의 위기감으로 이어진다.
이런 물질적 환경을 맞아 희곡문학은 이 시대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가. 희곡문학의 본질적 거대담론을 차치하고 극문학의 생명력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져본다. 창작의 자유라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 발표의 자유. 무대에 올라가지 않은 희곡은 미완의 작품으로 사라진다. 또한 출간되지 않은 희곡은 미완성된 상태에서 흔적조차 없다. 희곡문학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자본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출판의 예를 들자면 종합문예지는 늘 지면에 대한 압박감으로 장막을 실지 못한다. 단막극만 집필하는 희곡작가가 몇 명이나 될까. 그 상황이 결국 희곡문학의 제한적 틀을 만들게 되고 극문학을 숙성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창작에 대한 지면의 제한이 없어져야 희곡도 본질적 저력이 생길 것이다. 출판부터 제한적 사고에 물꼬를 터야 한다는 생각으로 필자가 발행하는 계간지는 매번 희곡 장막을 실은 편이다. 하지만 지면의 한계성과 독자의 선호도에 영향을 많이 준다. 문학의 통섭이라는 차원에서 타 장르와 함께 생존해야 한다. 희곡은 시극과 수필극 안에서도 숨을 쉬고 있다. 시각화 되어있는 현대인에게 문학인으로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시대적 상황에 맞춰야 한다. 종이책과 전자책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기록화라는 차원에서 데이터 베이스는 필수이고 손 안에 쥔 스마트폰의 정보매개체는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이다. 문학이 외면당하기 전에 스스로 다가가야 한다. 무대는 사라지지만 텍스트는 남아 있는 것과 같기에….
희곡문학의 발표도 제한적 요소를 파기함으로써 침체한 희곡문학의 숨통을 터주고 극문학의 미래 방향까지도 제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희곡문학의 본질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