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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부기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선화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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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발한 머리통 하나가 뚝 떨어졌다. 키를 넘는 옥수수 밭에서 익은 것들을 따던 내 심장도 그대로 철렁하다가 오그라들었다. 진짜 성인의 머리만 했다. 태어나 오십 년 넘게 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물체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재차 가슴을 쓸어내리며 실눈을 뜨고 바닥을 살폈다. 내 발등을 스쳐 튕겨나간 물체는 잿빛이다 못해 거무튀튀한 곰팡이다. 탐스런 수염까지 달고 있으니 일그러진 두상이 영락없다. 정신을 가다듬고 도열한 옥수수무리를 둘러보니 군데군데 비슷한 놈들이 귀신놀이 하듯 서서 나를 골려주고 있었다.

삼백 리 길을 내달려 전원에 들었을 때다. 차를 서너 번 갈아타고 도착한 작은 농지. 여덟 개의 산봉우리가 좋아 주변 토지를 장만했으나, 정작 농사일은 설렁설렁 경치 구경이나 하는 신선놀음이 아니었다. 최대한 흙과 친밀해지는 길이니 허투루 한눈 팔 새 없이 작물을 살피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십여 년 전의 우리 부부에겐 주말을 이용한 백육십 평 농사일이 신세계를 만난 듯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그날은 혼자서 그 먼 밭에 도달해 성큼성큼 고랑으로 들어갔다. 김을 매고 돌아선 지 며칠 안 되었는데도 풀이 또 발목을 걸어 챈다. 그러건 말건 하늘 향한 참깨송이는 층층이 늘어나고 상사화도 꽃대 우뚝 솟아 분홍다발을 달고 섰다. 옥수수도 실하게 자라 수염을 말려 붙이며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발길 뜸한 주인과 무관하게 쑥쑥 키워 올리는 땅의 저력에 절로 숙연해졌다. 그런데 한낱 깜부기란 놈에게 호되게 놀라다니…. 그 다음부터는 따고 난 옥수숫대의 밑동을 오른다리로 탁탁 걸어 자빠뜨렸다.

들판에서 혼자 그 해괴한 짓을 하다 보니 묘한 쾌감이 일었다. 약주 기운 거나하게 오른 아버지가 도깨비를 왼편으로 걸어 넘어뜨렸다는 이야기도 떠올라 웃음이 났다. 출타하시면 약주 한 잔 걸치고 거나하게 취하여 흥얼흥얼 산모롱이를 돌아 우리 산마을에 닿던 아버지. 그러기까지 도깨비 몇은 자빠뜨리고 왔노라 하셨다. 자식들이 믿건 말건 그 이야기는 전설처럼 변치 않았는데, 어머니는 이러한 아버지를 일러 아예‘김타깨비’라 하였다.

소작농이던 아버지는 아무리 일을 해도 재산이 불어나질 않았다. 자식 수가 늘어날수록 그나마 있던 너른 밭도 우리 것이 아니게 되었다. 장리쌀을 얻어 선도지 낸 논에서 그럭저럭 쌀을 수확했으나, 올망졸망한 자식들은 늘 쌀밥이 고팠다. 멧방석에 수북한 쌀을 보면서 쌀밥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던 동생 중 하나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 자루에 담아 장리 빚 갚을 요량으로 문턱을 넘는 아버지를 향해 몹쓸 말을 한 것이다.

“야 이눔아, 쌀밥 좀 줘라.”

내 셋째남동생인 그는 당시 호기로운 일곱 살이었다. 보리쌀이나 호밀쌀에서 맡아보지 못하던 그 하얀 결실의 냄새가 얼마나 구수했을까.수북한 쌀을 보며 곧 쌀밥 한 그릇 먹겠거니 하다가 실망스러움에 쏟아 낸 고약한 말 한 마디! 언행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종아리를 치시던 어머니는 그날따라 관대했다. 아버지도 헛기침 몇 번으로 넘기셨다.

그날 어린것으로부터 욕을 얻어 잡숫고도 화를 내지 않은 아버지는, 밤마실 오는 이웃 아저씨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여러 차례 풀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당한, 그 조그만 입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진 문장을 화두로 삼아 뇌이시는 게 분명했다. 아버지에게 있어 자식의 그 소리는 번쩍하도록 내리친 죽비소리가 아니었을까. 들일을 하거나 산길을 걸으면서도 얼마나 그 한 마디를 상기시켰을까. 세상의 어느 부모인들 자식 입에 좋은 것 넣어주고 싶지 않으랴. 아버지는 시시로 중요한 주문을 걸 듯“고놈 참, 잘 살 거다. 암, 사내가 그만한 기백이면 됐어”하셨다.

농사가 잘 되어야 식솔들의 배가 불렀던 시절 이야기다. 그러므로 보리깜부기나 벼깜부기가 생길 때면 농부들 낯빛이 흐렸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들도 함께 근심에 젖곤 했다. 오가며 누구네 논밭에 거뭇거뭇한 것이 있는지 알아채는 눈썰미도 일찍이 길러졌다. 그건 곧 궁핍과 떼어지지 않는 그림자이기도 했다.

이즈음에야 내 밭의 옥수수 몇 개쯤 곰팡이가 핀들 무슨 걱정이랴. 외려 잊고 있던 서정을 불러들인 괴물체에 절로 정감이 간다. 그래서 도깨비이야기 부풀리듯 옥수수깜부기도 서사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성실히 가정을 꾸려가는 가장들 마음자리엔 깜부기 따위의 색채는 얼씬도 못하도록 내가 단단히 주문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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