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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쓰는 일기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혜식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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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세 사상가 리쭝우(李宗吾; 1879∼1944) 말이 인상 깊다.‘면후심흑(面厚心黑)’, 이 말은“낯가죽은 두꺼워야 하고 내면은 검다”를 이르는 말이다. 리쭝우는 당시 위대한 통치자들의 속성을 이 말로 정의했다. 그는 통치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의 영웅호걸들도 얼굴 거죽은 말할 수 없이 두텁고 속은 헤아릴 수 없이 시커멓다고 말했다. 이로보아 인간이 지닌 그릇된 욕망은 고금동서가 다를 바 없다.

리쭝우의‘면후심흑’을 떠올리노라니 문득 모 연예인이 생각난다. 유명한 탤런트인 그는 수년 전 성폭력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그런 그가 최근 알려진 바에 의하면 또다시 연예계에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낼 것이라고 한다. 물론 연예인이라 하여 성인군자처럼 완벽한 도덕성을 갖추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타인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는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라면 사안은 달라지지 않는가. 이게 아니어도 남의 권리 및 이익을 편취했다면 이 또한 엄중한 법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즉 타인 밥그릇을 부당하게 빼앗은 자도 이에 해당한다면 지나치려나.

이렇듯 사회적 공분을 살 만큼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다. 그럼에도 저네들 범행을 잊을 만하면 버젓이 대중 앞에 얼굴을 바짝 들고 나타나는 게 문제다. 이들을 대할 때마다 새삼‘면후심흑’, 이 단어가 떠오르곤 한다. 언론에 오를만큼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자라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적어도 자중하고 근신해야 할 것이다.

이로 보아 자기반성이 없는 자는 철판처럼 두꺼운 얼굴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이들을 대하노라니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어린 날 어머니 밥상머리 교육은 엄했다. 특히 자신이 저지른 잘못엔 관대해선 안 된다는 교육은 매우 철저했다. 돌이켜보니 딸일수록 국량(局量)을키우는 일도 강조했지 싶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 살 때 일이다. 마당가에 닭장을 만들고 닭을 키웠다. 어느 날 일이다. 닭 모이를 주다가 실수로 닭들이 닭장을 탈출했다. 그것들은 이웃집으로 침입, 텃밭에 심어 놓은 싱싱한 배춧잎을 부리로 쪼아대기 시작했다. 마침 그 집엔 아무도 없었다. 닭들이 그들이 애써 가꾼 채소 농사를 망치는 것을 목격하자 어린 마음에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닭들은 그 집 텃밭을 종횡무진하며 배추 잎을 쪼아대어 여러 포기를 망가뜨렸잖은가. 닭 간수를 잘못하여 이웃에게 해를 끼친 것을 어머니께서 알게 되면 심한 꾸중을 들을게 뻔했다. 그래 옆집 배추밭에

들어가서 닭들과 사투를 벌였다. 날개를 퍼덕거리며 사방으로 날아오르기도 하고 뛰어다니는 닭들을 잡으려고 애썼으나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한동안 닭들 뒤를 쫓아다니다가 가까스로 몰아서 닭장에 가뒀다.

그날 저녁 이 사실을 들은 어머닌 책상 위에 놓인 배가 불룩한 저금통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것을 들고 옆집을 찾아가 이 사실을 솔직히 말하라고 타일렀다. 어머니 말씀처럼 이웃집 아주머니께 낮의 일을 소상히 말하고 잘못을 빌었다. 이때 우리 집 닭들이 망가뜨린 배추 값을 치르러 왔노라고 하며 갖고 간 저금통을 아주머니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아주머닌, “괜찮다. 이웃에서 그만한 일로 어린 네가 애써 모은 돈을 어찌 받겠느냐”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난날 이런 어머니 가르침 덕분인가 보다. 요즘도 혹여 소소한 언행으로나마 타인에게 피해 및 상처를 안겨준 일은 없는지 매일 밤 가슴에 마음의 일기를 써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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