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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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침침한 방에 군복 같은 걸 입은 보좌관들이 쭉 서있고 뒤쪽에서 육중한 몸뚱이에 얼굴이 크고 넙데데한 상관이 앞으로 쓱 나섰다.
“일들 보시오. 동무는 거기 편히 앉으시고.”
딱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 자가 바로 전 세계 지도자들을 골치 아프게 만들고 너 죽고 나 죽자고 마음만 먹으면 지구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그 김정은이란 말인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위원장 동무.”
“보좌관 동무들이 꽤나 까다롭게 굴면서 확인하려 들었을 끼지만 다 우리 조국을 위한 행동이니 이해하시오.”
그러고는 책상 서랍에서 과자 하나를 꺼내 내 앞으로 쭉 밀었다. 통과의례의 약인 것을 단번에 알았다. 주춤거렸더니 먹을 만하다며 과자를 집어 건네준다. 내가 긴장된 낯으로 한입 베어 먹자, 이번에는 시커먼 사각 통 하나를 책상 중앙에 올려놓았다. 앞뒤가 뚫려 있고 속이 텅 비어 있는 통이다. 그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라며 시범을 보여줬다.
“이건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독심 창(窓)이오.”
나는 이번에도 하라는 대로 했다. 그러자 그도 반대편 쪽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콧바람이 부딪힐 정도로 가깝게 마주보다가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돈만 준다면 뭐든지 하겠다, 이거구만. 맞소? ”
벌떡 일어서 허리를 굽히고 그렇다고 하자 뚜벅뚜벅 걸어가 권총 한 자루를 가져왔다.
“이 안에는 총알이 장전되어 있소. 이걸로 엊그제 헛소릴 지껄이던 남조선 대통령의 주둥아리를 쏘아버리시오. 그러면 끝이오.”
나는 양손으로 총을 받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조금 전까지 까칠하기만 하던 보좌관들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마음속으로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며 지금의 모든 상황은 꿈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눈을 힘껏 떠봤다. 그러나 눈이 떠지지 않았다. 잠시 고민 끝에 총을 내던지고 죽어라 도망을 쳤다. 등 뒤에서 사격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다급한 마음에 뺨을 쳐가며 양 눈꺼풀을 마구 쓸어내렸다.
훤한 창문 밖 세상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꿈속에서 빠져 나왔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 있다. 집 안은 텅 비어 있는 듯 조용하고 멀리서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도시에서 무슨 똥개 소리람? ’
마음을 추스르면서 악몽을 꾸게 된 이유를 생각해봤다. 엊그제 일이다. 양 사장도 피할 겸 사무실에 혼자 남아 늦도록 주식시세를 들여다
보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데 골목 끝에서 서너놈의 패거리가 가로등 불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후문으로 들어갈 걸 그랬다는 생각은 때늦은 후회였다. 놈들은 다짜고짜로 나를 차에 태워 어딘지 모를 으슥한 창고로 끌고 갔다. 알 만한 놈들인지라 죽이지는 않으리라 여기고 애써 걱정을 덜었다. 두 손을 뒤로 묶더니 처음엔 사정없이 뺨을 몇 차례 갈기다가 이내 장작 패듯 온몸을 두들겨 팼다. 눈에서 별이 팽글팽글 돌고 몸뚱이가 부서지는 나무토막처럼 나뒹굴었다.
“야 새꺄! 그동안 양 사장님이 봐주실 만큼 봐줬는데, 이제는 슬슬 따 돌리기까지 해? ”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라, 자식들아! ”
“어쭈! 이 새끼 봐라. 어차피 감방이 코앞인데 이쯤 해서 막가자 이거구만.”
그러더니 동영상 하나를 틀어 눈앞에 들이밀었다. 내 사진으로 차마눈 뜨고는 볼 수가 없는 야동을 편집한 것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누나가 보게 될 거야. 그리고 이건 서막에 불과해, 새꺄! ”
이어서 놈들이 시키고 내가 협조해서 저질러진 회사에서의 비리, 불법으로 자행된 일 등을 늘어놓았다. 그 뿐만 아니라 내 휴대전화를 빼앗아 알아낸 가족들과 지인들의 이름과 직업 등을 줄줄이 읊어댔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지? 네가 깨달아야 할 가장 분명한 사실은 돈을 다 갚기 전에는 뒈질 수도, 사라질 수도 없다는 거야.”
생각할수록 이가 갈리고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누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월세 아파트에 사는 누나의 꿈은 전세다. 금년 구월 계약 만기일에 반전세로, 이 년 후 전세로 바꾸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 중이다. 사람 좋은 매형과 하나밖에 없는 나의 누나는 전세 보증금에 쓸 돈을 아무 걱정 없이 나에게 빌려줬다. 팔월 말에 돌려주는 조건이었다. 만약 돈을 돌려줄 가망이 전혀 없는 지금의 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집에서 쫓겨나는 건 당연할뿐더러 아예 의절하려 들것이 뻔하다.
그나저나 지금 몇 시나 된 걸까?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작은 바늘이 왼쪽에 있고 큰 바늘은 오른쪽으로 건너가 V자를 그리고 있다. 최소한 한낮은 아니다. 지금 일어나봐야 특별히 할 일도 없다. 일요일 오전의 여유를 만끽하며 팔다리를 쭉 폈다. 종아리 뒷부분이 뻐근하기는 하지만 스트레칭의 맛이 느껴진다. 속이 비어서인지 배가 좀 홀쭉해진 것 같다. 뭔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데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은 채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런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은 가뿐히 바닥을 디뎠다.
이상하다 싶어 목을 구부려 다리를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나는 분명 살아있는데 내 몸이 아니다. 휘청거리며 나가 장롱 거울이 있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구와 조명 스탠드가 정물화처럼 비치고 그 사이로 줄무늬 잿빛 고양이가 거울에 비쳤다.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고양이란 놈도 앞발을 들어올려 제 얼굴을 감쌌다. 왼쪽으로 움직이니 그놈도 따라서 움직이고 오른쪽으로 움직이니 또 따라서 했다. 한 바퀴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꿈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아직도 김정은을 만난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나? 아니면 핵무기를 터뜨려 지구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되어버린 건가? 어쩜 메타버스의 세상?
다시 거실로 나갔다. 현관, TV, 소파, 커튼, 액자 등이 다 어제 본 그대로이고 주방이나 욕실 모습도 그대로였다. 베란다로 나가봤다. 누나집은 아파트 일층이라 베란다 바로 앞에 화단이 있다. 우윳빛처럼 새하얗던 목련 꽃잎이 시들어 추레하게 늘어져 있고 가지마다 연초록 이파리가 솟아 있는 것도 어제 본 그대로다. 이건 절대 꿈이 아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혹시나 해서 내 방에 다시 들어가 봤다. 책상, 침대, 옷장, 모든 게 다 똑같고 책꽂이에 있는 책들도 다 내 책이다. 거실로, 방으로, 주방으로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바뀐 게 없는데 나만 예전의 내가 아닌 것이다. 누나나 매형이 들어오면 어쩌지?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으나 앞집, 골목길, 아파트 건물 다 똑같다.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의 낮은 언덕배기 풀숲에 몸을 숨기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시 내 몸을 살펴봤으나 그저 길에서 자주 보던 고양이에 불과하다. 야! 하는 소리를 내봤더니 야옹! 소리만 튀어나왔다. 개띠인 내가 개도 아니고 고양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 나는 고양이를 무척 싫어했다. 강아지는 사람을 따르기라도 하지 적당히 거리를 두는 습성의 고양이는 애완동물도 야생동물도 아니지 않은가. 야옹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고 노려보는 듯한 그 눈빛도 싫었다. 눈을 마주치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할 퀼 것만 같았다.
회사 근처에서 커다란 고양이가 어슬렁거릴 때마다 짜증 났는데, 어느 여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매일 밥을 챙겨줘 꼴 보기 싫었었다. 고양이 밥그릇을 들고 양이야, 양이야! 하고 부르면 살이 통통한 고양이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와 천연덕스럽게 그릇을 비웠고, 여직원은 사람 대하듯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어쩌다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잘 먹죠? ”하면서 씩 웃었다. 그때마다 녀석의 엉덩짝을 걷어차고 싶었다.
밥 챙겨주는 사람들을 미워하며 욕을 하기도 했다. 혹시 그 벌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날씨는 화창하고 사월의 하늘은 더없이 푸르기만 하다. 젊은 부부 한 쌍이 유모차를 밀고 다정하게 얘기하며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는 손을 내밀어 불러본다. 단지 안의 놀이터엔 꼬마 아이들이 신나게 그네를 타거나 영화에서 유행하던‘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놀이를 하고 있다.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이다. 한참을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데 바로 앞을 지나가던 학생들이 흘끔 바라보더니, “아이고 깜짝이야”하면서 옆으로 물러선다.
“저놈이 꼼짝도 안 하고 앉아 있네.”
한 녀석이 작은 돌멩이를 집어 던진다. 화들짝 놀라 피하긴 했지만 하마터면 눈을 정통으로 맞을 뻔했다.
“제기랄, 저것들이 미쳤나. 고양이이든 사람이든 가만히 있는데 왜 시비야? ”
냅다 소리 질렀으나 입에서는 이번에도 야옹, 야아옹 소리만 흘러나왔다. 녀석들은 다시 돌을 던지며 달아났고 나는 분하고 원통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먹을거리나 듬뿍 가지고 나올걸, 후회막급이다. 어린 시절 나의 엄마는 맛있는 게 있으면 감춰뒀다가 누나 몰래 나만 주곤 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단지 입구에 있는 상가로 가봤다. 미용실, 카페, 편의점 등 모두 다 평소에 보아오던 모습과 똑같다. 노란 조명으로 외관에서부터 따듯한 느낌이 드는 카페 실내는 더없이 여유롭고 아늑해 보였다. 한가할 때 들러서 마시곤 했던 커피 향의 기억이 둥둥 떠 멀어져간다. 카페를 지나 상가 입구로 들어서 살그머니 계단으로 내려갔다. 나무 도마 위에 생선을 올려놓고 큰 칼을 드럼 치듯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문밖에서 살그머니 들여다보자 인심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손질하고 남은 생선 토막 하나를 던져줬다. 입에 물자 역한 비린내가 입안 가득 퍼졌다. 순간 나도 몰래 욱! 하고 내동댕이쳤다. 엉금엉금 돌아 나와 힘없이 계단으로 올라섰다.
“이놈! 도둑고양이가 어딜 여기까지 돌아다녀! ”
바로 뒤에서 발을 구르며 호통치는 소리가 났다. 질겁하고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 밖으로 도망쳤다. 해는 중천을 지나 앞산 능선으로 넘어 가고 있었다. 다시 집에 가보니 창문이 그대로 닫혀 있다. 현관문으로 돌아가 보았지만 문을 열 수가 없다. 뒷다리에 힘을 주고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버튼키를 누르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다. 포기하고 나와 베란다 앞 풀숲에 들어갔다. 영산홍 꽃망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고 단풍나무 잎사귀는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하늘하늘 춤을 춘다. 평화롭고 생기 있는 풍경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내가 고양이로 다시 태어났다면 현재 아무런 할 일도, 걱정도 필요 없다. 평소에 그리던 가장 행복한 순간 아니던가. 그동안 사는 게 너무 지겨웠다. 사람들은 즐거운 용도로 쓰거나 미래를 위해 돈을 번다고들 하지만 나는 당장 고소당하지 않고 회사에서 파면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대인관계도 무척 힘들었다. 모든 사람이 돈을 빌린 사람이거나 앞으로 빌릴 대상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유빈 씨를 만난 건 행운이다. 그녀는 나를 정말 좋아한다. 그래도 조금은 행복했었구나, 생각하면서 잠깐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디선가 귀에 익숙한 말소리가 들려온다.
매형과 누나가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반가움과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현관문 앞까지 뒤쫓아가 멀거니 쳐다봤더니 누나를 앞세운 매형이 흘끔 쳐다보다가 그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른 베란다 쪽 화단으로 다시 갔다. 거실 창문이 스르륵 열리고 있었다. 바로 앞 단풍나무 밑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얘는어디나갔나?”
“놀러 나갔겠지, 집에 있겠어? ”
누나는 주방과 내 방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당장에 급한 건 쓰러질 것 같은 허기를 메우는 일이다. 그런데 어디서 무얼 먹는단 말인가.
‘매형과 누나가 내 상황을 빨리 알아차려야 할 텐데 어떻게 알리지? ’
뚫어지게 거실을 지켜봤지만 한가롭게 TV만 볼 뿐 나를 걱정하는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보고 움찔움찔 놀란다. 잠시 시간을 벌 작정으로 난간 밑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다가 한참만에 화단으로 나왔다. 어스름한 하늘은 진한 회색빛을 띤 채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거실이 보이는 베란다 정면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불이 켜져 있어 아까보다 실내가 훨씬 잘 보였다.
“벨 소리가 얘 방에서 나는 거 같은데? ”
누나의 목소리다. 이제야 내가 없어진 걸 알았나 보다.
“누나, 나야. 나 여기 있어! ”
큰 소리로 외쳤으나 야옹, 야옹, 하는 소리만 더 높아졌다.
“가까운 데서 친구랑 한잔하는가 보지 뭐.”
“그래도 핸드폰도 안 들고…. 이놈의 자식, 들어오기만 해봐라.”
누나는 이를 빡빡 갈면서 투덜거렸다.
“모처럼 걸리적거리는 애 없으니까 좋다.”
매형이 키득거린다.
“누가 아니래. 지가 처먹은 그릇 설거지도 안 하는 놈인데.”
“와서 이거나 먹어. 이 집 빵 맛있네.”
두 사람의 말에 서운한 마음은 그렇다 치고 고소한 빵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잘 구운 빵을 쭉쭉 찢어서 윤기가 자르르한 딸기잼을 발라 먹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봤다. 할 수만 있다면 폴짝 뛰어올라 죽든 살든 거실로 들어가고 싶다. 다시“누나, 나야 나! ”하고 불러봤다. 누나가 베란다로 나와 빨래를 걷으며 이쪽을 쳐다본다.
“아까부터 웬 놈의 고양이가 얼쩡거려? 오빠, 이리 좀 나와 봐.”
나는 이때다 싶어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계속 소리쳤으나 고양이 소리만 요란하게 허공을 갈랐다. 매형도 베란다로 나오긴 했지만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빨래만 받아 들고 이내 거실로 다시 들어간다.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누나가 거실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핸드폰도 안 가지고 나갔는데 이렇게 연락이 없는 건 이상하잖아.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닐까? ”
“다 큰 놈을 하루 만에 실종되었다고 하면 미쳤다고 할 거야. 좀 기다려보자.”
밤이 이슥해지자 누나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댔다. 매형이 경찰서에 신고하는 소리도 들렸다. 변신한 첫날의 밤은 그렇게 현실이 되어 무심하게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경찰관이 집으로 찾아왔다가 되돌아갔다. 매형은 여느 때처럼 출근했고 누나는 다시 전화통에 매달렸다. 나는 뱃가죽이 등에 붙어 아등바등 베란다 난간 위로 올라섰다.
“누나, 나야. 나 배고파 죽겠어.”
애를 태우고 있던 누나는 벌떡 일어나 현관 신발장에 있는 긴 우산을 들고나와 휘둘렀다.
“이놈의 고양이가 여길 어디라고 와? 에이, 심란해 죽겠구만.”
질겁해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여기저기 먹을거리를 찾아 둘러봤지만 별다른 게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놀이터 옆에 있는 큰 쓰레기봉투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아보니 참치 냄새가 난다. 코를 벌름거리며 참치캔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찾아내긴 했는데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해 창피하기도 하고, 맘 놓고 뒤지기가 쉽지 않다. 눈치껏 봉지를 헤집어보니캔의 골진 부분에 살이 조금 붙어 있고 기름기가 고여 있었다. 할짝거려봤더니 뜻밖에도 고소했다. 봉투를 더 뒤져 조금 남아 있는 바나나우유 통도 찾아냈다. 혀를 길게 집어넣고 감질나게 핥았다.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쓰러질 것 같은 허기를 면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며칠째 고심했으나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일도 걱정되고 유빈 씨도 보고 싶어 회사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그 먼 곳까지 어떻게 가느냐는 것이다.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는데, 역무원에게 붙잡혀 동물보호소 같은 곳으로 끌려가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이다. 말이 좋아 보호지 정해진 기간 내에 분양되지 않으면 안락사당 한 후 불구덩이로 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되고 말 것이다. 궁리 끝에 사람이 적은 한밤중을 이용하기로 했다.
조심조심 무악재역 플랫폼까지 내려가 음료수 자판기 뒤에 딱 붙어 있는데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눈치껏 사람이 없는 쪽으로 기어갔다. 곧바로 지하철이 도착했으나 선뜻 올라탈 용기가 나 지 않는다. 가슴만 졸이다가 한 대를 그냥 보내고, 다음 지하철에 사람이 거의 없는 칸으로 잽싸게 뛰어 들어갔다. 군데군데 사람이 있긴 하나 대부분 졸고 있거나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다. 텅 빈 의자 모서 리에 바짝 붙어 숨죽이고 있었다.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을지로3가역에서 내렸는데 다행히 사람 눈에 띄지 않았다. 조심스레 통로를 따라 움직이는 동안 움찔하며 놀라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지하철을 바꿔 타 성수역에서 내리려 할 때쯤 눈이 마주친 여자가“에구머니나! ”하고 소리 질러 냅다 줄행랑을 쳤다.
역을 빠져나와 익숙한 길을 가는 동안 다소 마음이 가벼워졌다. 엎드려서 올려다보는 듯 훌쩍 높아진 회사 건물이 어색하게 나를 내려다본다. 그래도 널찍한 마당과 잘 가꾸어진 정원은 여전히 포근한 느낌이다. 정문 경비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비원의 모습이 보인다. 가볍게 한쪽 길로 들어가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자재창고 처마 밑에 엎드려 밤을 보냈다.
어느새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정문을 지켜보고 있는데 얼핏 한쪽에서 서성대고 있는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끈덕져 보이는 인상, 작달막한 키에 곱슬머리, 볼품없이 휘어진 안짱다
리, 양 사장이 틀림없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여 튕기듯 달려가 양 사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렸을 적부터 가난에 한이 맺힌 나의 꿈은 애오라지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난한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만들어진 꿈이었다. 실현 방법도 구체화했다. 대학 시절, 주식으로 대박 난 기사를 유심히 본 후 나라고 못 하라는 법 있겠냐며 주식투자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주식에 관한 다양한 공부를 하며 실전경험도 쌓았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대박에 가까운 돈도 벌어보고 깡통이 되는 경험도 했다.
미국에서 돈을 벌려면 월가로 가고 한국에서는 여의도로 가야 한다는 소신으로 대학 졸업 후 증권회사에 들어갔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돈이 술술 벌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허구한 날 주식시세를 들여다보는 증권회사 직원 아니던가. 그렇게 강한 의욕과 자신감으로 일 년 동안 카드 대출까지 받아 투자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하루아침에 몇천만 원이 날아가기도 했다. 아차 싶어 증권회사를 그만두려던 찰나 선배가 다니는 지금의 제약회사에 이력서를 내게 되었다. 더는 주식투자를 안하리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새 직장에 들어가 이 년이 지난 후 대리로 승진까지 했다. 더욱이 같은 회사 다니는 유빈 씨를 여자친구로 사귀게 되는 행운까지 얻었다.
하지만 주식투자의 유혹은 끈질기게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한 종목만 빼고 다 정리했었는데 머지않아 다시 주식에 손을 댔다. 손실은 분노와 오기로 발전했으며 손해를 보면 볼수록 나는 점점 더 과감해졌다. 끊을 수 없는 마약 그 이상이었다. 친구뿐만 아니라 선배, 후배, 아는 사람들을 다 활용해 돈을 빌렸다. 현물뿐만 아니라 선물, 옵션, 엔젤종목에도 손을 댔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가상화폐에도 투자했다. 때로 큰 수익을 올릴 땐 조금만 잘하면 한방에 그동안의 손해를 만회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사채까지 손을 댔는데 양 사장은 사채업자 중 한 사람이다.
처음엔 친절하기가 이를 데 없었고 가난의 서러움도 잘 이해해주었다.
내가 어려움을 토로할 때마다 선뜻 돈도 잘 내주었다. 그런데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자 어느 날 갑자기 무자비한 사채업자로 돌변했다. 전화를 조금만 늦게 받아도 당장에 쫓아왔다. 결국, 하루하루 사채 이자를 돌려막기 위해 살아가야 했고 부장에게까지 거짓말을 해 돈을 빌렸다.
어느덧 빚의 규모는 평생 벌어도 갚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가족에게 털어놓을 자신도 없고 딱 죽어버리고 싶었으나 죽을 용기도 없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양 사장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대들었더니 말미를 주다가 며칠 전의 끔찍한 일까지 벌인 것이다.
“아악! 이놈이! ”
양 사장은 간신히 앞발톱을 피하고 한 손으로 나를 붙잡았다. 내가 사생결단하고 이빨까지 들이밀면서 할퀴려 들자 양 사장은 몸을 움츠렸다가 빙 돌며 나를 홱 뿌리쳤다. 저만큼 앞으로 팽개쳐진 나는 절뚝거리면서 풀숲에 숨었지만,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 양 사장의 노예가 되느니 고양이로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굳이 양 사장이 아니라도 돈을 벌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전쟁과도 같은 이 세상이 지겹도록 싫어졌다.
흐르는 눈물은 점점 많아져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무리 울어도 한번 밀 어닥친 슬픔은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한참을 울다 보니 유빈 씨 생각이 났다. 사랑스러운 그 모습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고양이 몸으로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화단 근처에 숨어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조금 기다리자 남자 직원들이 한 무더기 나와 담배를 피워 물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는 얼굴들이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잠수 탔거나 해외로 도피한 게 분명해.”
“그 주제에 무슨 해외? 어휴, 난 그놈 재수 없더라.”
슬픔을 넘어 배신감과 절망감이 몰아쳤다. 도저히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건물 모퉁이를 돌아 벤치가 있는 둥구나무 쪽으로 갔다.
‘앗! 유빈 씨가 언제 나왔지? ’
그녀가 구매부 최양호 과장과 함께 벤치에 앉아 있다. 수심에 가득차 있을 유빈 씨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녀는 연해 웃음을 흘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전혀 없고 즐겁고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얼굴이다.
“오 대리가 행방불명이라면서요? ”
“그렇다 해도 뭘 어쩌겠어요. 전 신경 안 써요.”
나랑 사귄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그녀가 저렇게 말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를 앙다물고 돌아섰다. 유빈 씨도 회사도 내가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다시 누나 집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또다시 지하철을 타고 갈 기력도 용기도 나지 않았다.
힘들지만 걸어가기로 했다. 허기가 진다. 맥없이 돌아다니다가 쓰레기 더미를 발견했다. 이것저것 다 뒤져 겨우 소시지 몇 조각을 찾아내 허기를 조금 달랬다. 다른 거 뭐 더 없나 기웃거리는데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어깨 근육을 실룩거리며 천천히 걸어온다. 헉, 하고 뒤로 물러섰으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버텨보았다. 놈은 발톱을 치켜들고 번개같이 달려들어 내 얼굴을 낚아챘다.
“이런 미친놈이!”하면서 대들어봤으나 어깻죽지만 물어뜯기고 도망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얼마나 잘 처먹었는지 힘이 장사였다.
어느 건물 기둥 밑에 들어가 울분을 달랬다. 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 앉히고는 다시 기어 나와 사방을 살폈다. 방향을 정한 다음 걷고 또 걸어 도심을 벗어나 변두리 쪽으로 갔다. 배는 고파 쓰러질 지경인데 아무리 둘러봐도 생선 대가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축 처진 걸음을 옮기는데 개 몇 마리가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고양이보다는 한결 친밀감이 들었다.
‘요즘도 풀어놓는 개가 있나? 반려견이라고 다 집 안에서 귀염받으며살고있을텐데.’
혹시 뭐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하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너희들 뭐 하니? 혹시 나도 같이 놀 수 있을까? ”
용기를 내 말을 걸어보았다. 하얀 똥개 한 마리가 뭐냐는 눈빛으로 째려본다. 좀 더 가까이 가려는데 이빨을 드러내면서 으르렁댔다. 이어 나보다 훨씬 큰 덩치를 앞세워 우르르 달려들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도망쳐 간신히 녀석들의 경계선을 벗어났다.
“이런 젠장! 내가 강아지는 좋아했는데, 저 자식들은 또 뭐야? 내가 뭘 어쨌다고.”
위험에서 빠져나오자 참고 있던 서글픔이 다시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다못해 말이라도 통해야 할 텐데 나는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아무도 없는 논둑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개와 고양이, 들쥐들에게 쫓기면서 꼬박 사흘 만에 무악재 아파트에 도착했다. 산 밑에 자리 잡은 아파트 단지만 봐도 반가웠다. 입구에 있는 부동산 사무실의 아저씨도 그대로고 편의점 알바생도 미용실 아줌마도 다 그대로였다. 상가 앞에서 분주하게 짐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 슬리퍼를 끌며 편의점에 들렀다가 비닐봉지를 들고나오는 사람, 세탁물을 한아름 안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 등, 모두가 너무나 부러웠다. 나 빼고 다 행복해 보였다.
일단 베란다 앞으로 가보았다. 창문이 닫혀 있고 조용하기만 하다.
좀 쉬어야겠다 싶어 더듬더듬 난간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어둠 속에서 사나운 눈빛 두 개가 보이더니 크아앙, 하면서 사납게 달려들었다. 화들짝 놀라 물러서서 쳐다봤더니 희미한 윤곽이 드러났다. 까만 고양이 눈알이 경계의 빛을 풀지 않은 채 노려보고 있고 그 뒤로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들이 보인다. 아직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이었다. 그 새 여기다 새끼를 낳았다는 말이다. 할 수 없이 누나 집 아랫자리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 외로움과 배고픔을 달래야만 했다.
아침 일찍 어미 고양이와 거리를 두고 누나 집을 살펴봤더니 거실 창문이 열려 있고 가끔 누나와 매형이 왔다 갔다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식사를 하고 매형이 출근하자 누나는 여유 있게 소파에 앉아 TV 를 켰다. 편안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걱정스러운 표정도 아니다. 난간 모서리로 살짝 올라가 눈에 띄지 않게 지켜봤다. 누나는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한 시간이 다 되도록 전화를 끊지 않았다. 동생이라는 말이 연거푸 나오고 돈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양 사장인 듯했다. 이후 누나는 꼼짝하지 않고 식탁 의자에 앉아만 있었다. 온종일 지켜봐도 주방과 거실을 서성이며 전화만 몇 차례 받았다.
그러다가 다 저녁이 되어 장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기회다 싶어 옆에 바짝 붙어 누나를 따라갔다. 꽤 먼 거리인데도 걸어서 시장으로 가려는 것 같았다. 한동안 나를 의식하지 못하던 누나는 뭔가 약을 사러 약국에 들어가다가 나를 처음으로 바라봤다. 심장이 팡팡 뛰었다. 그 자리에서 앞발을 세우고 앉아 누나와 눈을 마주쳤다.
“누나 나야. 나 준수라고.”
누나는 다소 이상한 듯 한 번 쳐다만 볼 뿐 별다른 내색 없이 약국으로 들어갔다. 나는 누나가 나올 때까지 그대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약을 사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다시 나온 누나는 나를 흘깃 본 후 몇 발자국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짜증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너 왜 자꾸만 나를 따라다녀? ”
누나 치마라도 붙들며 매달리고 싶었으나 자칫 경계심만 키우는 꼴이 될까 봐 읍소하는 자세로 조심스럽게 야옹 소리를 냈다. 정면으로 바라본 누나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다. 누나는 내게 뭔가 더 말하려 하다가 그냥 가던 길을 갔다. 더는 귀찮게 할 수가 없어 어슬렁 어슬렁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시장에 도착한 누나는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노점에서 푸성귀 몇 가지와 좌판 두부 한 모만 사고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도 누나도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누나도 내가 싫은 건 아닌 듯 보였다.
이렇게 누나의 반려묘로만 살아간다 해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내 존재를 알리는 일만 남은 셈이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모른다 한들 그게 대수겠는가.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현관문을 연 누나는 발로 나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 재빨리 들어가 쾅! 하고 문을 닫았다. 내가 동작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 자리에서 머리가 깨져 죽었을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 한참을 그대로 서 있는데 다시 문을 여는 소리가 나더니 누나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다짜고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너 빨리 못 나가! ”
누나는 우산을 들어 겁을 주며 나를 마구 내쫓으려 들었다. 내가 이리저리 피해 다니자 곧바로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우리 집에 도둑고양이가 들어왔습니다. 빨리 좀 내쫓아 주세요.”
나는 하는 수 없이 반쯤 열린 현관문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갔다. 이후 누나 집으로 돌아가려는 미련을 버리고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처음보다 요령도 생겨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먹을 것도 찾아 먹었다. 가끔은 길에 빵이나 과자가 통째로 떨어져 있기도 했고 쓰레기통 안에는 먹다 남은 음식이 의외로 많았다. 처음에는 구역질이 나 먹을 수 없었지만 며칠을 굶다 보니 없어서 못 먹을 만큼 맛도 괜찮았다. 그러면서도 누나 집에는 하루 한 번 이상 들렀다. 어느 날인가는,“저게 배가 고파서 그러나? ”하면서 생선 한 토막을 던져주기도 했다. 코끝이 찡해져 그 어느 때보다 맛있게, 대가리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변신한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전보다 시간도 많고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어딘가 나와 같은 부류가 있나 싶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와 비슷하거나 하다못해 말이라도 통하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데 나 같은 누군가를 찾아보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집을 지켜보던 중 양 사장이 왔다 가는 모습도 보았다. 그자가 돌아가고 난 후 누나의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다 포기하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이제 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일 때가 너무나 그립다.
‘그래, 사람이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불법으로 사람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파산신청을 하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이 세상에 먼지만도 못한 존재였다. 아니, 있어서는 안되는 악이었다. 이제 와서 누굴 탓하겠는가?
나는 풀리지 않는 숙제를 끝마친 듯 묵묵히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산바람이 나를 따라 휘청거린다. 모든 생명의 기운이 솟아나는 봄이라 천만다행이다. 내 몸뚱이도 무엇이든 저 생명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꽃비가 내리고 물오른 나무의 잎사귀들이 초록빛을 흩뿌린다. 정말 죽기 좋은 계절이다. 딱 하나, 엄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뻐근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인데 효도 한번 못하고 사라지는 게 너무나 한스럽지만, 이 길이 그나마 불효를 덜하는 것이리라. 온 세상이 짙어가는 녹음으로 가득하지만, 바닥에는 가랑잎이 수북하다.
큰 나무 하나를 골라 바닥의 낙엽을 헤치고 누울 만한 공간만큼 흙을 파냈다. 넓을 필요도 없고 깊을 필요도 없다. 그 안에 들어가 반듯하게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토록 힘들었던 이제까지의 삶이 오래된 기억처럼 까마득하다. 나의 존재가 꿈속의 고양이이든 사람이든 아무 의미가 없다. 소곤대는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밀려가는 하얀 구름 위에서 신이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낙엽을 끌어와 몸을 덮었다. 바라지도 않지만 죽으면 혹여 다시 꿈에서 깨어나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