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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탯줄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상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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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유아용 욕조에 더운물을 받는 중이었다. 팔에 안겨 있던 아이가 힘없이 팔을 빠져나가 욕조 에 빠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정신을 차린 뒤 아이를 욕조 속에서 꺼냈지만 아이는 힘없이 축 늘어진 모습으로 눈빛을 잃고 있었다.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빛처럼 사라지는 환영에 놀라 잠을 쨌다.

그게 언제적 일인가. 아직도 여자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어린 생명에 대한 집착에 잠겨 있었다. 그 깊이는 바다 속을 살아생전에 들어가 보지 못할 깊이였지만 그 속보다 더 깊은 침묵이었다. 그 침잠은 어린 생명의 손을 잡으려, 닿으려는 안간힘이었다. 여자의 의식에서나 무의식에서는 언 땅위에 피어나려고 애쓰는 가냘픈 씨앗과도 같았다.

여자는 잠시 눈을 떴다가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어둠을 읽었다. 어둠속을 뚫고 가슴 저리게 스며드는 슬픔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잃었다는 공허가 눈을 흐리게 했다. 또다시 가녀린 딸아이의 팔목이 체온에 닿았다. 아직 온기가 따뜻하게 남아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이를 보낸 지 육 년이 지났고, 한 달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는 생일이다. 회전목마가 아주 천천히 돌아 원위치에 닿듯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의 빈 가슴에 새겨지는 일. 아이를 놓고 혼자 시름을 앓으며 커가는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비쳐진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돋아난 가시가 꺾이지 않을 태세로 세차게 심장에 치솟아 올랐다. 면도날에 벤 것 처럼 얇은 비닐 막에 핏빛으로 스며져 나오는 선명함. 그것은 마치 상처 난 아이의 얼굴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고, 피지 못한 핏기 없는 서러움이 역력하게 돋아나 있었다.

여자를 떠난 아이는 하늘 어디쯤에서 외로움을 안고 자라고 있을까.

자라기는 할까. 무엇을 먹고 자랄까. 젖 맛도 모를 아이의 입맛에 저 드높은 하늘은 푸르고 맑은 공허의 냄새에 익숙할 수 있을지. 그래도 그 곳에서 살아 숨 쉬며 자라고 있다면, 언제든지 하늘을 보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겠지. 하늘 어느 곳에서 쪽빛을 먹으며 더 푸르게 자라기를 바라. 그리고 조금만 참아준다면 다시 만나러 갈 거야. 만나서 다시한번 안아볼 수만 있다면. 사랑스러운 혓바닥의 몸짓을 받을 수 있다

면. 사랑한다고 말해 줄 수 있다면. 날이 가는 만큼 더 깊어지는 그리움을 어찌할까. 여자의 멍에는 검은 옻빛으로 굳어지고 있다.

사내와 여자는 같은 빌라에 살면서 문을 마주 보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현관 앞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다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던 사내와 여자는 같은 층수에서 들어가는 입구만 다를 뿐, 우연한 몇 번의 부딪침으로 얼굴을 익혀갔다. 서먹한 마주침은 불편하여 현관문을 열 때 조심스럽기도 했다. 전 같으면 이웃 간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이웃’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았다는 말이다. 이웃보다는 옆 동, 몇 층 몇 호라는 숫자가 훨씬 편했다. 간소화된 생활은 어느새 단절이라는 암흑에 가깝지만, 서서히 빛을 잃고 살아도 둔해지는 몸짓이었다. 빛이 그립지는 않았다. 언제나 조명 속에서 어둠을 죽이고 바퀴벌레 없애듯 빠르게 현대는 빛도 만들었고, 어둠도 없앨 수 있는 문명적 이기에 젖어 있으므로.

남자의 사랑을 얼마만큼 믿을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는 무엇인가에 벗겨지고 햇살에 습한 가슴이 뽀송해지는 가벼운 몸을 느꼈다. 그것이 아마도 사내에 대한 현실적 무게 때문일까. 만남은 과거의 기억에 대한 질척거리는 수면을 걷어내는 새로운 물갈이인지 모른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생명의 태어남으로 셋의 관계유지를 위한 연장이 가능하다고 믿어야 할까.

여자는 다시 팔년 전의 희미한 기억 속에 꿈을 꾸듯 흐르기 시작했다. 생명을 얻었을 때의 기쁨보다 잃고 난 후의 공허가 평생토록 차지한다는 사실이 그랬다. 놀랍도록 새겨지는 비밀을 남몰래 옹이를 만든다는 것. 이것을 숙명이라 부른다. 민우와 첫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는 뱃속에서 제대로 크지 못했다. 예정일보다 빨리 세상에 나오고 싶은 성질 급한 아이이었나 보다. 그렇게 첫아이는 성질 급한 아이답게 먼저 여자의 품속에서 떠나 하늘의 아기천사가 되었다. 그 아기천사는 여자에게 가끔 꿈에 나타나 고요한 가운데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그런 꿈을 꾼 아침이면, 상쾌하게 일어나기보다 하루 종일 그 잔상에 시달리며 무심코 이마에 손을 얹곤 했다. 여자는 민우에게 간곡한 애정을 가지고 아이를 원한다고 품에 안기듯 말했다.

여자의 말을 가벼이 받으며 무심한 듯 말을 받았다. 민우는 굳이 아이가 없어도, 둘만으로 행복한 시간을 가지는가 하면, 그 시간에서 얻은 에너지는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아주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 가며혀 짧은 빈 소리로 주억거렸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대꾸 한마디 안 했던것, ‘결혼하면 으레 생기는 아이도 못 낳는 주제에.’그 뒷말에는 잔인하게도 비아냥거리는 이중적 속셈을 등뒤에서 말없이 숨죽여 삼켰다.

그랬던가. 칼날의 복수는 아닐지라도 모성을 알고 싶었고 그 깊은 마음을 껴안고 싶었다. 여자는 아이에 대한 집착이 전부라는 이유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다. ‘남자의 자존심을 잔인하게 뭉개버려도 되는. 기쁨에 찬 승리의 깃발을 손에 쥐듯, 우세한 남자를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렇게 집착을 중심으로 하여 가끔은 진실이기도 한, 거짓된 이기심으로 남자의 잘남을 후비기도 했다.

아니었다. 열성에 사로잡힌 여자가 우성의 법칙을 우기고 싶은 피해의식의 똬리인지도 모른다. 아이의 잉태를 담보로 여자여야 가능한, 분만을 통해서 얻어지는 자애의 우성을 손에 넣어야 하는, 아이로 인한 모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여자로서 남자를 누르고 싶은 이기적 발상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그랬다. 아기가 뱃속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은 우주를 품은 여신이 되는 것이고,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조그만 우주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천지창조에 교감하면서 부드러움으로 아이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었다.

침묵한다는 것은 누구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 속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겨울 매섭게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 거들떠보지 않았던 화분 속에서 움트는 푸른 줄기가 보였다. 너무도 신기한 나머지 나가려던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다가가 연약하게 나오는 생명을 귀히 여기고 화분을 살살 들어 올려 현관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현관을 나서다가 멈춰, 병원에 가는 대신 꽃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못하는 모성애를 가지고 있다니. 꽃 이름도 잘 모르는 풀포기가 추운 겨울을 이기고 보듬고 있다니’하면서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여자의 마음이라면 어떤 생명이든 소홀히 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겸허하고 숭고해야 하는 생명 앞에서 자신의 이기심이 새어 나온다면 오만불손한 임산부의 태도는 정녕 아닐 것이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자세로 치자면 백일기도는 물론이고 몇 년이 지나도 그 소원을 빌어 얻어야 하건만,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못난 태도였는지 속살에 붙은 부끄럼을 긁어내야 하는 게 맞았다.

사거리에 커다란 화원이 문을 열었다. 길가에 축하하는 화환들이 몇 개 줄지어 있는 것을 여자는 여러 날 지나면서 무심코 흘렸다. 운전하다가 들르는 장소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과 별로 관계치 않을 거라 단정 짓고 하루에도 몇 번을 지나치건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다 남자가 무거운 화분을 차에 싣고 분주히 시동을 거는 모습을 보기도 했던가.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서로 원하는 공기만 뽑아 들이는 일종의 골라 먹기 호흡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요즘 세상이다.

재래시장 안으로 길 따라 들어가 우측으로 꺾으면 야생화원이 있었다. 평소에는 드나들지 않았던 여자가 무슨 속셈이 있었을까. 여자는 식물을 키워본 적이 없었으므로 무작정 주인에게 물어봐야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 식물들이 제법 잘 자라고 있었다. 큰 활엽수도 몇 그루 있었지만, 대개는 분재, 조그만 다육식물들이 제각기 이름을 달고 고만하게 자라고 있었다.

분재에 이름을 달고 있는 식물들은 모양도 전부 달랐고, 가격이 웬만한 것에 더욱 놀라 물었다. 몰상식한 태도였을 것이다. 굉장히 비싸요.

여자는 손가락으로 식물을 향해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들이 비싸다? 안 사도 되니 함부로 손가락질 하지 마쇼. 가게 주인은 여자에게 똑같은 말투로 응대했다. 아니, 나는 그냥 놀라서…. 여자는 누그러진 태도를 취했다. 여보쇼, 다른 사람이 공들인 애들한테 함부로 하는 버릇은 개도 안 물어가니 그만 나가쇼. 여자는 말 잘못 했다 가는 경을 치겠네.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게 안에서 지체했다가는 봉변을 당할까 싶어 슬그머니 가게를 나왔다.

잠을 설치고 늦잠을 자고 일어나 화분이 거실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퉁퉁거리는 남자의 말투가 둔중한 잠을 깨웠다. 그렇지. 남의 물건을 놓고 함부로 대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약간 화도 치밀어 올랐다. 어제 일이 생각난 여자는 다시금 슬리퍼를 신고 사내의 가게 쪽으로 향했다. 여자의 옷차림은 실내복에 얇은 니트 가디건을 걸친 게 전부였다. 문을 여니 잠겨있지 않아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서 나오는 소리를 따라 들어가자, 사내는 한가한 시간을 틈타 가게 안,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게 보였다. 여자는 슬리퍼에서 나는 소리가 딱딱거렸지만 무심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별 의도는 없었고 어떤 이끌림의 힘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햇빛이 들지 않아 거의 음습한 곳이어서 공기마저 축축하게 젖어 습기 냄새가 났다. 그런 곳에서 사내는 무엇인가를 작업하기 위해 연장통에서 연장을 꺼냈고, 그라인더에 전기를 넣었다. 사내는 사람이 들어오는 것에는 관심이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않을 태도였다. 오로지 상상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몰입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더욱 궁금해진 여자는 입을 열었다. 저, 여보세요. 사람이 아까부터 서 있었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사내는 여자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해 받기 싫으니 나가 달라는 말조차 하기 싫은 모양일까. 그냥 손가락으로 바깥쪽을 향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개 한 마리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와 사내 곁을 지키며 여자를 향해 노려보고 있었다.

“개가 무서운데요.”

여자가 말했다.

“왜, 혼자일 거라 생각합니까? ”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냥 궁금해서.”

“댁은 궁금하면 뭐든지 마음대로 하는 식이죠.”

“말을 고분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깡패 같아요.”

“내가 깡패면 댁은 무법자가 아닙니까? 무법자를 상대하기에 벼리가 아깝습니다. 걱정 마쇼. 댁이 무법자로 보이지 않나 봅니다. 운 좋은 줄 아쇼”하면서 사내는 건강해 보이는 개한테 애정을 쏟고 있었다. 움츠려있던 여자가 여유를 찾고는, 어쩐지 상당히 충성스러워 보여요. 한풀 꺾인 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두 사람이 이렇다 할 대화가 오가지 않은 상태가 얼마간 유지되었다.

남자는‘벼리’라고 부르는 개한테 더할 나위 없이 애정을 쏟았고, 벼리 또한 충성스런 눈빛으로 남자에게 혀를 날름거리며 남자의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신체적 접촉이 그녀에게 서글프게 다가왔다. 신체적 접촉이 그리웠는데 잊고 있었다. 그랬던가. 메말라 간다는 것이 서로의 자극에서 멀어져 있다는 물리적 거리의 간격일 수 있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만지며 접촉한다는 것이 하찮은 힘일 거라 무시했지만 지금, 저들의 행위는 신선하게 다가오는 되살린 기억의 태동이었다.

남자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믹스커피를 타 여자에게 건네 주었다. 무뚝뚝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나마 애정의 태도라고 이해하고 싶었는지 여자는 가벼운 웃음으로 커피를 받아 들었다.

“저 놈이 나에게는 무척 살붙이 이상이죠.”

“애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은 왠지 잡념이 자꾸 들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네요”하면서 남자는 물끄러미 벼리를 향해 둘만의 시선으로 몸의 언어를 주고받고는 빈 마당의 허공을 향해 씁쓸한 신음을 토해냈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작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듯 말을 이어나갔다.

쓸데없는 소리 갔지만. 나한테도 한때는 꿈도, 낭만도 그리고 수다를 떨기도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이 그날이기도 합죠. 아내와 딸이 떠나간 날, 난 아직도 그날의 상처에서 머물러 있는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상처를 껴안은 채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분명, 문을 열기만 해도 나를 기다리는 다양한 미래가 선택되도록 화창하게 널려 있을 법도 하다는 것을 알지만요. 인간은 스스로 어리석음 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영특한 게으름이 존재하곤 하지요. 변명으로 육체를 무너뜨리고 마음의 근심을 부풀려 가면서 교묘하게 자신을 속이는 행위. 그렇게 시간을 축적해 놓으면 이상한 놈으로 보는 시선을 알면서도 벗을 수 없는 무거운 갑옷에 짓눌리는 거짓들의 시간. 내 말이 지루하게 들리겠지만, 결론은 아내와 딸이 아무런 준비도 안된 나를 남겨놓고 홀연히 떠난 겁니다. 이런 내 모습이 지겹다고 말하면서요.

그러면서 남자는 아직도 자신을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내 덧붙여 말하기를, 멋있는 미사여구를 쓰는 것이 왠지 넋두리를 내뱉는 혓바닥 안에는 커다란 알을 훔쳐 먹은 흉악한 뱀 모양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는 남자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언어 구사가 가슴 안 에서 빙빙 돌면서 나오지 못하는 것도 같았지만, 띄엄띄엄 세련된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가 더 궁금해서 물었다. 아내와 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들을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걸음 발전할 수 있을 때를 훼방이라도 하려는 듯 훤칠한 남자가 쿵쿵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야, 혼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이럴 줄 알았으면…. 훤칠한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눈치를 보고 말을 끊었다. 두 사람도 약간 겸언쩍은 낯빛을 숨기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돌아앉았다.

“야, 이눔아, 언제나 철부지냐? 모처럼 좋은 시간 갖겠다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 글렀다.”

의외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남자의 대범한 태도에 가늠할 수 없어 도리어 여자가 놀라 한숨을 몰래 쉬었다. 누가 미혼 아니라 할까 봐 꼭 총각티를 내냐. 그러고는 잠깐 습한 공기에 정적이 흘렀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노출된 신분에 당황스러웠는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헛기침을 연신해대며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어색하기는 세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훤칠한 남자가 아직 미혼이고, 거친 남자 역시 무언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진단했다. 여자는 자리가 불편하고 어색하다 싶어 그만 자리를 일어나겠다고 말하자, 이런 자리 만들기 처음이 어렵지만 이렇게라도 트고 지냅시다. 훤칠한 남자가 여자를 만류하고 같이 합석하자고 제안했다. 남자도 불편하지 않으면 작업하는 것을 보아도 된다고 허락했다.

“어? 너 안 하던 짓 한다.”

의외라고 훤칠한 남자가 비아냥대듯 말하면서도 거슬리지 않게 긁었다. 그 모습은 얌전한 암컷고양이를 뒤에 두고 누가 먼저 차지하는지 보자는 식으로 짐승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나가자. 술도 땡기고.”

남자가 작업하던 손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나도 술 마시자고 하던 참이지.”

훤칠한 남자가 맞장구쳤다.

여자도 엉겁결에 술자리에 끼게 되었고, 자리를 옮겨가며 2차, 3차에 이르러 새벽으로 넘어갔다. 두 남자는 혀가 꼬여 무슨 말을 하는지 핵심을 잃었다가도 가끔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는 듯했다. 여자가 억지로 눈치채 가며 상황을 꿰 맞추어 갔다. 이야기인즉슨 대충이랬다.

“그러니까 여자가 딴놈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 소식을 모른 채 팔 년이 됐지. 지금까지 안 오는 여자가 새삼 오겠냐? ”

이혼하라고 성화 부리는 쪽은 훤칠한 남자 쪽이었다.

“니는 별 수 있어 그렇게 산 게 그 모양이냐고. 사업한답시고 돈 끌어 쓴 것이 자랑이냐? 내 돈 언제 갚을래, 이 새꺄.”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술 취한 두 남자의 말싸움은 포차가 떠내려가 도록 고래고래 질러댔다.

어떤 정신으로 집에 들어와 있는지 늦은 아침에 눈을 떴다. 머리가 띵하게 아프고 속도 말이 아니게 쓰렸다. 여자는 소파를 딛고 간신히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병에 5분의 1도 못 되게 남아 있는 게 전부였다. 남이 알면 창피한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 가디건을 걸치고 현관을 나서려는데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지? 보이스피싱? 온갖 가설을 붙이고 번호를 보니 받아도 될 듯한 번호였다.

“여보세요.”

여자는 잠긴 목소리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어제같이술마신남자요.”

어투가 거친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번호를 알고 하신 거죠? ”

여자는 반갑다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다소 어조를 누그려 말했다.

“기억도 못하쇼? 지난번 내 가게에서 핸드폰 찾는다고 내 것으로 전화했잖수.”

“아, 그랬나요.”

여자는 얼버무리고 다음 말을 대꾸하지 못했다.

“이리로 나오쇼. 속이나 풉시다. 친구놈도 온다고 연락왔수다.”

여자는 대답 하지 않고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다시 챙겼다. 어제와는 다르게 이미지 관리를 하고 싶었다. 현관을 나서며 발걸음이 갑자기 바빠졌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애써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세 사람은 다시 가게 안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거친 남자는 라면을 끓여놓고 김치를 꺼내는 중이었다. 식탁이라고 해봐야 나무젓가락과 김치통을 통째로 내놓은 게 전부이었지만 그럭저럭 흥겨운 자리가 나쁘지 않아 여자는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어제는 혹시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키 큰 남자가 입을 먼저 열었다.

“얌마, 너는 있는 그대로가 실수다.”

거친 남자가 우스갯 소리로 약을 올렸다.

“술자리에서 대충 짜 맞추어 보니 한 남자는 집 나간 마누라 기다리다 지쳤고, 한 남자는 사업한답시고 돈 가지고 가서 적반하장으로 서로 큰소리 치던데요.”

여자는 야유하듯 비꼬며 말했다.

“우리 비밀을 알았으면 본인도 얘기 해야지요.”

키 큰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는 자고로 비밀이 있어야 신비스러운 거야. 그래야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거고.”

거친 남자는 오히려 감성이 짙은 말로 여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비밀이라고 해봐야 숨길 것도 없지만 오히려 거친 남자가 가로막아 말할 기회가 끊어졌다.

“차차 알아져 가겠지요. 띄엄띄엄요.”

여자는 스스로 비밀로 방패막이를 만들어버렸다.

세 사람은 라면을 먹고 커피믹스를 마시면서 지난 밤에 가져다준 친밀한 관계를 적당한 거리에서 선을 넘지 않았다. 누가 먼저 내기를 해야 하는 걸까.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어떤 거래가 성사될 수 있을까. 묘한 관계를 갖거나 흐지부지 시들해지거나. 그렇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시간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면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인가 보다. 거친 남자는 아내를 기다리며 애태우는 시간을 가졌을 테고, 키 큰 남자는 돈 때문에 인간답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부당하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속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뱅뱅 돌았을 것이다.

짝을 이루며 살았던 사람은 외부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보호구역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거친 남자는 떠나버린 아내가 돌아오면 모든 것이 원활해지고 서로 기워 갚아가는 시간이 생긴다. 하지만 혼자는 상대가 없어 늘 허공에서 떠 언제나 과거나 미래가 없는 현재만 존재한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 가치로 인해 빛을 발하는 것이 맞다. 여자는 두 남자를 보면서 두 사람이 결함이 있다고 보았을 때, 그래도 거친 남자는 기다림이 주는 행복이 따라오지만 키 큰 남자는 원금을 까먹으면서 득 대신 손해를 보는 시간을 만들 뿐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술좌석 기억이 가시지 않은 어느 오후, 여자는 치과에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가게를 지나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의아해하면서 가게 앞으로 다가가 귀가 의심되는 소리를 들었다.

“아, 가게 주인 남자가 오늘 아침에 자살했다지? 별꼴이여. 조금 전에 경찰이 와서 친구를 데리고 갔다네. 조사할 게 있다나.”

동네 분이 맞장구쳤다.

“나도 들은 얘긴디. 아내가 와서는 당신과 이미 헤어진 지 오래니까 잊으라고 했댜. 그런 못된 년을 뭐가 그리 좋다고. 그랬으면 그냥 보내 주고 맘먹고 살면 그만 아닌가? ”

다른 동네 어른이 말을 거들었다.

“그런 소리 말어. 남 일이라고 막 하면 안 되지. 남자가 오죽했으면 죽었을까.”

경우 있는 동네 분이 말을 잘랐다. 왕왕 이말 저말 다 나왔지만 어디서 전후 사정을 들어야 정확한 건지 여자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런 경우에 그 말이 맞는 게 싫었다. 여자는 해장한다고 모여서 라면을 먹던 날이 되살아났다. 지난번에 차라리 시원하게 고백할걸. 나도 결함이 많은 여자에다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산다고 털어놓았더라면 오늘의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주저하고 뜸 들이다가 가까운 이웃을 놓쳤다는 안타까움이 속상하기만 했다. 거친 남자가 속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할 때마다 느낄 수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당한 일에 여자는 황당하여 경찰서에 가면 전후 사정을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경찰서로 향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

경관이 친절하게 물었다.

“오늘 사고로 여기 오신 분 계신지요.”

여자는 목소리를 떨었다.

“잠깐 이리 오시지요. 그렇잖아도 협조를 부탁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조서를 작성하던 손을 멈추고 여자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혹시 남자분도 있나요? ”

멋대로 살았지만 기관에 제발로 들어오기는 처음이라 낯설어했다.

“걱정 말고 들어오시지요.”

안에서 키 큰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안심이 된 듯 경관을 따라 들어갔다.

“조서는 거의 다 꾸몄고, 고인이 최근에 가까이하던 분과 사정을 들어보고 사건을 종결할 계획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고 하지요. 저희도 특별히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고인을 어떤 식으로 장례를 치를 것인지, 아니면 모시고 가셔도 됩니다.”

“제가 마지막을 지키고 보내야지요. 친구라고는 유일하게 하나뿐 인 데. 저도 아직 정신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씁쓸하고 답답합니다.”

키 큰 남자는 얼굴에 근심이 역력하고 그늘이 가득 드리웠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고 장례식을 잘 치르시기 바랍니다.”

경관은 문을 열어주면 친절을 베풀었다. 두 사람이 밖에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얼마간 나란히 걷다가 키 큰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지요. 할 이야기도 있고. 적당한데 자리를 잡읍시다.”

“네. 저도 이대로 집에 갈 수 없어요. 그리고 할 말도….”

여자는 머뭇거리며 말을 끊었다.

지난번에 술 먹던 장소로 향했다. 어둑한 길거리가 착잡한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발걸음이 무거워 터벅터벅 구둣발 소리가 유별나게 들렸다. 목적지에 다다라 두 사람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홀은 비어 있었고, 비교적 조용하고 한산했다.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들어앉자, 종업원이 뒤따라 와 주문을 받았다. 소주와 오징어를 시키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뜨거운 물한잔 갖다 주실래요? ”

여자가 뒤돌아가는 종업원에게 부탁했다. 종업원이 곧바로 물컵에 뜨거운 물을 담아왔다. 여자는 몸이 으스스 한기를 느끼는 듯 두 손으로 물컵을 꽉 쥐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키 큰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친구가 외로움을 조금 타는 편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형, 아우 하면서 서로 의지했고 성년이 되면 고아원을 떠나게 됩니다. 고아원 생활이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철모르던 그때가 좋았습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냉대와 질시, 모순과 거짓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그놈은, 고아원이사장님이 영수, 그리고 나에게는 현수라고 이름을 주셨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처음으로 주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자부했습니다. 영수에게 이성을 눈뜨게 해준 은숙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면서 영수와 나는 사이가 벌어졌지요. 나는 은숙이를 반대했습니다. 어쩌면 은숙이는 착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영수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류할 수 없었고 번번이 당하는 영수를 옆에서 보기에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게 있었습니다.

나쁜 줄 알면서 영수의 돈을 일부러 갖다 쓰면 은숙이에게 당하지 않겠지, 했지만 영수 제 놈이 빚지면서까지 돈을 빌려다 은숙이에게 주었습니다. 사채와 은숙이의 배반을 견디지 못하고 바보짓을 했던가 봅니다.

이야기는 잠시 끊어지고 식당에 정적이 흘렀다. 현수는 목이 타는지 소주를 벌컥 들이마셨다. 여자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현수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면서도 가끔 잔기침을 했다.

“아까부터 기침을 하던데 몸이 안 좋습니까? ”

“벌써 감기 증상이 겨우내 달고 있어요. 그냥 그러니라 하고 지냅니다.”

“괜히 내가 사람을 붙들어 놓고 있는 거 같습니다. 미안하게.”

“힘들었으면 제가 벌써 일어났지요. 그냥 살았던 이야기도 듣고 싶구요.”

“어디까지 얘기 했더라.”

현수는 생각하닥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둘은 만나면 서로 욕을 했습니다. 돈으로 사랑을 산다 해서 외로움이 없어지냐 공략했고, 미친놈 없는 돈 갖다 쓰는 놈은 제정신이냐, 하면서 사업이 옆집 똥개 이름이냐, 라고 앙숙처럼 싸웠습니다. 물론, 나도 안되는 사업 한답시고 뜯긴 돈이 꽤 됩니다. 부모가 없다는 죄는 세상의 죄 중에 가장 무겁다는 것을 절감했지요. 매 맞으며 혼나고 굶주려 살아도 좋겠다. 우리는 서로 부모의 부재를 늘 그리워하며 희망이 뭔지 앞을 내다보는 힘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수와 나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영수의 죽음에는 그런 그늘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나만 아는 것이고, 은숙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이 필요할 때 찾아오는 은숙이에게 고마움의 대가로 있는 돈을 아낌없이 쓸어모아 내주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사는 이유를 빌미로 잡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영수는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아 은숙이에게 주는 재미로 살았겠지요. 아주 단순한 놈 입니다. 세상을 사는 게 복잡하기도 하지만 영수와 나는 그렇게 복잡하게 사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지요. 그것이 가슴 저리게 아픕니다.”

현수는 오열하듯 한탄하면서 지나온 과거의 삶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게 좋은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고 마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람에게 희망이 없다는 건 부모가 없는 죄보다 더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양부모를 모시거나 의지하는 분을 만나 서로 부모 자식으로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잖아요.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희망이 없이 사는 건 절망에 이르는 지름길이지요. 저에게도 숨기고 싶은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 특수교사로 일했었지요. 장애아동을 돌보며 인격 형성에 힘을 썼고 가르쳤지요. 하지만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어도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성격을 정상적인 인격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가르쳤던 그 아이가 부모를 살해하여 방송에서 한동안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아이를 가르친 사회적, 물리적 죄로 얼마 동안 외부와 격리된 채 혼자 폐인으로 살았지요. 지금도 그 습관이 남아 있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 어두운 시간을 지탱하기 위해 남자를 사랑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집착이었고, 사람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는 집요함이었지요. 내게 질식한 남자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바보랑은 살아도 정신병자와는 살지 못한다. 였습니다. 아마도 내가 장애아이를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 집착했던 모습이 결국,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와 살인마를 길러낸 내 모습의 현실을 그 남자가 떠난 뒤에 알았습니다. 남녀 사이는 이상하리만치 신비하기도 합니다. 사랑이 없이도 아이가 생기더군요. 그 남자와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를 목욕시킨다고 물을 받아 놓고 잠깐 전화를 받는 사이에 사고가 났지요. 아이가 물에 빠진 줄도 모르고 전화를 했던 겁니다. 불과 삼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그만 내 품을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떠나가고 나니까 아이를 보고 싶다고 오던 남자도 발걸음이 뜸하다가 남자도 떠났고, 지금은 저도 볼품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요.”

여자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깊은 한숨을 토해내는 듯했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나 봅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을 채우려고 하다 사고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무능하다 손가락질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현수도 말없이 술을 따라 마시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는 거 같아요. 지지리도 못나기도 했고, 밖으로 나오려는 용기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요.”

여자도 무엇인가를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까보다 많이 진정된 듯한 차분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오실 거죠? ”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태도를 취하자 여자도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말하고 일어났다.

“그럼요. 그래도 우리는 영수를 마지막에 만난 사람들이잖아요.”

여자는 현수에게 다음을 약속하고 자리를 떠났다.

영수라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려 했다. 적극적인 태도로 접근했더라면 그 사람이 저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온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게 안타까웠다. 여자에게서 떠난 사람이 과거의 남자, 영수, 그리고 현수. 잘못하면 현수도 떠나는 것일까.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하자 자리에 누워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돌아누웠다. 현수는 다음에 미루고, 침대 협탁에 놓여 있는 아이의 사진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립고 보고 싶었지만 그만 인연의 끈을 아이에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저쪽의 나라에서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왜, 진즉에 아이의 행복을 빌어주지 못했는지 아쉬움과 미련함으로 둔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리고는 한없이 생각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집착하면 할수록 슬퍼지도록 소중한 것이 더 멀리 사라져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생명의 환호를 깨뜨리게 되는 어리석음뿐이리라. 생명으로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여자의 뱃속에서 탯줄에 감겨 산다. 세 상에 나와서는 뱃속의 탯줄을 울면서 끊는다. 그때부터 이별의 슬픔과 고통의 눈물을 알기 시작한다. 죽을 것 같았던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다시 새로운 끈으로 희망이라는 모험과 인연을 맺으며 앞으로 나아 가는 것이리라. 누군가는 죽지만 그 죽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낸다면, 죽음은 또다른 생명을 잉태하여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게 되는 것이리라. 세상을 잘살아도 손해 보는 장사고, 아무렇게나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히는 삶도 이익이 되는 삶이고 보면 세상의 공존에는 알아서 모르는 것, 몰라서 알아가는 것. 이 탯줄의 비밀을 누가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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