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4월 6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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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구는 사그라지고 있었다. 아편독이 쏠고 있어 누렇게 쇠인 얼굴이 푸석했다. 당당했던 풍채는 나의 옛 기억뿐, 아편연을 빨아 대는 종구는 몰골이 유령 같았다. 메마른 입술에 엄지와 검지 끝이 노랗게 절어 있고 동공도 풀려 있었다. 그러나 눈빛은 게슴츠레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에 잠겨 있었다.
“아편이 좋기는 좋아. 벌써 기분이 알알하다니까.”
종구는 느럭느럭 말하며 글그렁거리다가 입술을 비죽였다.
내 어릴 적, 지금은 수몰된 이웃 마을에 주포어른이 살고 있었다. 사십 줄에 들어선 그는 부자면서도 떵떵대는 지주도, 떠세하는 토호도 아닌 기품 있는 사인(士人)이었다. 어느 강씨 종문 종손인 그는 4대 독자였다. 게다가 그의 아들 종구도 외아들이었다.
종구가 태어난 1920년대만 해도 아들이 없는 집은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이거나 시앗을 들였다. 씨내리나 씨받이를 들이기도 했다. 종갓집은 더욱 그랬다. 주포어른 외아들 종구도 그런 곡절을 거쳐 태어났다.
종구는 어머니가 둘이었다. 한 분은 주포어른의 본처 윤 부인이고 다른 한 분은 자기를 낳아 준 분례였다.
인근 국민학교를 다닐 때의 종구는 무던하고 공부도 잘하는 미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서울 어느 중학에 입학하고는 아주 딴사람이 되었다. 소문이 이상하게 번져 동네 사람들은 종구가 바람났다고 쑥덕댔다. 행상 다니는 주포리의 어느 장사치가 서울 저잣거리 술집에서 종구와 맞닥뜨린 것이 사단이었다.
“이놈을 그냥!”
소문을 들은 주포어른은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종구가 술집 기녀와 눈이 맞아 아들이라도 낳는다? 그러면 종중 전체가 들고일어날 것이 뻔한 일,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주포어른은 종구를 끌고 와서 결혼시켰다. 종구 나이 열일곱 살 때였다.
혼례식 날 후사에 한이 맺힌 주포어른은 신랑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손이 뭐냐. 종문의 대통을 이을 사람 아니냐? 명심할 소임은 조상을 받들고 대를 잇는 일, 절사(絶嗣)보다 더 큰 불효는 없느니라!”
주포어른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덧붙였다.
“우리 가문이 두 사람 금슬에 달렸거늘, 씨 하나 못 남기는 불효는 하지 말랐다. 어흠!”
협박이나 다름없는 그 말은 주포어른도 선친에게서 여러 번 들은 가훈 같은 당부였다.
‘결혼이 자식을 낳기 위해서라면 동물의 짝짓기와 뭣이 달라. 종중의 대를 잇는 게 중하다고? 내가 씨내리란 말인가?’
종구가 속으로 반발했다.
종구는 심술이라도 부리듯 결혼하기 무섭게 쌍둥이 딸을 낳았다. 얼마 안 가 또 딸을 낳았다. 다음 해에도 딸을 낳았다. 네 번째 딸을 낳던 날, 종구 아내 녹전댁은 방바닥에 눌어붙어 울기만 했다. 그때 용기를 준 사람이 종구 생모 분례였다.
“어멈아, 걱정 말그라. 달포 전에 무당골 점바치한테 태점(胎占)을 안 봤나. 요번에는 딸이지마는 요담에는 아들이라 카드라. 딸을 맞추는 걸 보이 용한 갑다. 고만 일나라.”
귀둥이로 자란 종구는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는데도 얼러 키운 응석받이 같았다. 귀태 나는 얼굴과 비계처럼 번들거리는 턱살이 그런 느낌을 주었다. 눈빛은 불안해 보였고, 부루퉁한 표정은 어딘가 그늘져 있었다. 결혼에 대한 불만이 크고, 학교를 중퇴한 데다 딸만 연거푸 낳았으니 중압감을 못 견뎌하고 있는 게 뻔했다. 씨받이 몸에서 태어난 자괴감도 적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눈총도 따갑게 느낄 터였다.
주포어른의 본처 윤 부인은 결혼 후 아이 셋을 사산하고는 사뭇 불임이었다. 초조해진 그네는 점도 보고 굿도 하고 절에 가서 비손도 했다. 수태에 좋다는 보신제도 이것저것 달여 먹었으나 십 년 넘게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규방을 차지한 아낙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보따리를 싸던 시대였다. 더구나 그네는 토반집 종부였다. 제 발로 떠나든가 쫓겨나든가 소첩을 받아 주든가 자결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무자는 칠거지악(아낙이 쫓겨나는 일곱 가지 이유)의 하나거늘.”
어느 날 그렇게 탄식한 윤 부인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어둠이 극에 달한 자정 어름이었다.
“핏줄을 끊을 수는 없지.”
중얼댄 윤 부인은 진작 구슬려 놓은 열아홉 살 부엌데기 분례를 남편 방에 밀어 넣었다.
자정을 택한 것은 당골네 천지보살의 점괘가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주포어른과 분례 사주를 넣고 일진을 짚어본 천지보살이 그 시각이 아들 뱃길시라고 괘를 풀어주었다.
몸집이 작은 분례는 예쁜 축은 아니어도 당차기가 이를 데 없는 처녀였다. 일솜씨와 말솜씨가 옹글고 행실이 조신했다. 사리도 밝았다. 성깔은 좀 있어도 지나치지 않았고 속이 깊었다. 윤 부인은 분례의 이런 됨됨이가 마음에 들어 남편의 씨받이 소실로 들였다.
“분례, 너도 적선하는 거다. 복 받을 거다.”
윤 부인이 분례를 남편 방에 밀어넣고 댓돌을 내려서며 덧댄 말이었다. 빈틈없는 윤 부인은 음지마을에 사는 분례 부모의 승낙을 미리 받아 두었다. 통 큰 그네가 옥답 네 마지기를 혼수 삼아 떼어주자 분례 부모는 오히려 고마워했다.
분례가 남편 방으로 들어간 뒤, 뒤꼍으로 나간 윤 부인은 거북바위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체수 좋은 어둠 속 그네 옆모습이 합장한 석불좌상 같았다.
종가의 혈손을 소원하는 것인지, 불임의 한을 달래는 것인지, 뒷방 마님으로 물러난 신세를 한탄하는 것인지, 하염없이 보리자염주만 짚어 넘기는 그네 볼에 두 줄기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달은 구름 속을 드나들고, 두어 식경 지나 첫닭이 홰를 치며 목청을 늘일 즈음 소반 위의 정화수 안에 커다란 달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윤 부인이 분례가 막 수태한 환각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소스라친 윤 부인은 기쁨인지 설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례, 니가 이 달 같은 아들만 낳는다면 내 어찌 공을 잊겠느냐.” 송암골의 백암사 인경이 소슬하게 울었다.
주포어른도 진작부터 내심 분례를 염두에 두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처실 윤 부인은 회임 가망이 없고, 자기 나이도 적은 게 아니고, 양자 감도 마땅치 않고, 대는 이어야겠고, 그런 초조감이 이유였다.
남편이 딴 여자를 넘보면 아내의 육감은 예민해진다. 윤 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네가 서둘러 분례를 사랑방에 밀어넣은 것은 남편의 꿈틀대는 속내를 읽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은 말을 안 듣고, 분례는 하루가 다르게 물이 오르고, 분례를 훔쳐보는 남편의 눈길은 심상찮고, 미욱하게 버틸 수만 없는 것을 직감하고 선수를 쳤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 년쯤 뒤, 분례는 투실투실한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게 종구였다.
분례가 주포어른 첩이 되자 우는 사람이 있었다. 분례와의 신접살림을 꿈꿔 온 강쇠였다. 강쇠는 주포어른네 머슴이었다. 스물두 살에 곁 머슴으로 들어온 그는 먼저 들어와 살던 다섯 살 아래의 분례를 보자마자 연심을 느꼈다. 눈만 마주쳐도 싱글거렸다. 분례도 겉으로는 쌀쌀맞게 대하면서도 입을 실룩 비쭉이고 눈을 핼끔거리며 좋아했다.
어느 여름날, 뒤꼍에서 앵두 따는 분례를 보고 불끈 단 강쇠가 못 참고 집적대었다. 그걸 본 윤 부인이 서릿발 질책을 했다.
“자네허구 분례는 지체가 다르네. 꿈도 꾸지 말게.”
지체라니, 배알이 꼴릴 만큼 고깝게 들렸지만 강쇠는 애써 삭였다. 강쇠는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소를 잡는 칼잡이 백정 성골 씨 아들이었다. 윤 부인이 지체 어쩌고 한 것은 이 점을 빗댄 것이었다.
강쇠는 상전 윤 부인이 격노하는 까닭을 그때는 몰랐다. 그러다 어느 새벽, 젖가슴을 감싸 안고 주포어른 방에서 나오는 분례를 본 강쇠는 낙심했다. 울분에 사무친 숫기 센 강쇠는 지게를 부수며 난리를 친 끝에 돌연 종적을 감추었다. 강쇠는 윤 부인네 집을 나가면서 이를 갈았다.
“내 기어코 다부 올끄다.”
윤 부인이 사매질하듯 강쇠를 모질게 꾸짖은 것은 다 생각이 있어서였다. 분례가 비록 부엌데기 반비지만 장차 주포어른 아이를 낳을 여자라는 것을 확실히 못 박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윤 부인은 분례 몸을 빌려 대를 이을 생각을 진작부터 품고 있었다.
종구를 밴 분례가 처음 진통을 느낀 것은 해산 전날의 초저녁이었다. 만삭의 분례가 진통을 호소하자 기미를 알아챈 윤 부인은 재 너머 음지 마을 용녀를 불렀다. 용녀는 영하다고 소문난 무당이기도 하지만 세 쌍둥이도 받아낸 산파였다.
분례는 자정쯤에 또 진통을 느꼈다. 첫 번째 것과는 다르게 참기 힘든 진통이었다. 분례는 본능적으로 샅문에 힘을 모으고 용을 썼다. 입에 수건을 물고서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사경 가까이 되어 세 번째 진통이 왔을 때도 용을 썼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산고에 시달리는 분례보다 지켜보는 윤 부인이 더 속이 탈 지경이었다.
먼동이 틀 즈음 분례 몸에 또 진통이 왔다. 이번에는 더욱 강렬했다. 분례는 용녀가 시키는 대로 샅문에 온 힘을 모으고 용을 있는 대로 썼다. 그제야 문이 열리면서 뭔가 철퍼덕 쏟아졌다. 시퍼런 핏물이었다.
윤 부인 얼굴이 하얘졌다. 용녀가 황급히 옆에 있는 빨랫줄을 시렁 횃대에 걸어감은 다음, 두 끝자락을 분례 손에 쥐어주며 소리쳤다.
“이걸 잡고 힘을 줘! 무릎은 세우고!”
분례가 빨랫줄에 매달리며 연거푸 용을 쓰자 배내 아이의 정수리가 보일 듯 말 듯 비치었다. 땀에 젖은 분례는 거의 빈사상태였다.
다급해진 윤 부인과 용녀가 아무리 다그쳐도 지친 분례는 힘을 쓰는 시늉만 했다. 윤 부인이 용녀에게 물었다.
“애기가 무사하겠는가?”
“아죽은 살아 있구만요.”
분례는 덜컹 겁이 났다.
‘이러다 아기가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분례는 죽기 살기로 아랫배에 힘을 모았다. 이윽고 분례가 비명을 삼키며 혼절하는 찰나, 갓난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침 해가 뜨는 시각이었고 지독한 난산이었다.
조금 뒤, 분례 귓속 아득한 곳에서 윤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이네. 아들! 이런 경사가 어디 숩겠는가. 자네 공이 크네.”
분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기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분례가 몸을 돌려 아기를 바라보는데 용녀가 말했다.
“큰 재목이여. 보통 아가 아니여. 긁지마는 나올 때 애를 멕이는 아는 고집이 센 법이여. 이런 아는 뭐든지 지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려. 속 깨나 썩을 거여.”
분례 귀에는 큰 재목이라는 말만 들렸다.
윤 부인은 복덩이 종구를 자기가 낳은 살붙이처럼 키웠다. 갓난아기 종구가 잠투정이라도 하면 강보에 싸안고 어르기도 하고, 말라 오그라진 자기 젖꼭지를 물리고는 했다.
종구가 홍역을 앓을 때는 밤새껏 살풀이굿을 하며 법석을 떨었다. 음지 마을 용녀를 불러, 바깥 솟을대문에는 청룡을, 안뜰 중문에는 백호를, 사랑채 툇마루 기둥에는 봉황을, 안채 대청마루 기둥에는 거북을 커다랗게 그려 붙이고, 등롱도 대낮같이 밝혔다.
용녀는 신들린 듯 무경을 외며 꽹과리와 장구를 쳤다. 곤댓짓으로 상 모를 돌리는가 하면 시나위를 지르며 무의 자락을 나부껴 대었다. 작두 날 위에서 맨발 춤사위 재주도 부렸다. 한마당 가득한 구경꾼과 하늘 높은 용마루가 종구의 존재성을 한껏 과시하는 밤이었다.
용녀의 신기 덕분인지, 종구는 홍역을 이겨냈다.
종구를 얻은 뒤에도 윤 부인은 분례에게 남편 잠자리 시중을 계속 들게 했다. 실패했지만 씨 하나 더 얻으려는 욕심이 있어서였다. 윤 부인도 더러 투심이 성깔을 부릴 때면 남편 방을 찾았다. 늦은 저녁, 직접 자리끼를 받쳐 들고 사랑방 문턱을 넘어서고는 했다.
주포어른은 근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왜소하고 깡마른 체구에 해수병까지 앓던 그는 몇 년 골골하다가 세상을 떴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사람들이 기혈이 막혀서라느니 중풍을 맞아서라느니 하고 쑤군대는 중에 기동 어른이 한마디 했다.
“과색 탓이여. 새파란 처녀를 소실로 삼았으니 안 죽고 배기겠나? 그 사람 본래 약골 아인가. 심술 많은 본처도 시시로 보챘을 끼고.”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 심지어 침방 생활도 간섭하던 주포어른이 세상을 뜨자 종구는 이렇게 넋두리했다.
“내가 종손이라고? 종손은 종가를 지키는 게 도리라고? 나는 도시로 나가 사업할 거야. 도시에서는 내 출생을 아무도 몰라.”
아무리 혼잣말이어도 투덜대는 본새가 보통 삐딱한 게 아니었다. 종구가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주포어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종구, 너는 문중의 기둥이다. 종손은 종택을 지키며 대소사를 돌봐야 하는 법, 출향 생각은 허지도 마라. 종중 제향 때는 니가 초헌제주니라.”
‘제주? 아버님은 그렇게 생각하셔도 문중 어른들은 나를 꼴같잖은 서출이라고 업신여기잖나.’
종구가 딴생각을 하자 주포어른이 장죽으로 재떨이를 치며 한 마디 보탰다.
“부부는 한번 작배하면 해로하는 게 홍복이다. 한눈 팔지 말아야 헌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조강지처만한 여자 없느니라. 어흠!”
부친의 작고로 고삐가 풀린 종구는 강원도 태백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탄광사업을 한다고 했다. 토지를 처분해서 광산 하나를 통째로 매입한 것이다. 종구 나이 서른도 안 됐을 때였다.
영업상무만 믿고 경험 없이 덤벼든 사업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자연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종구는 땅을 팔아 땜질했다.
그 즈음, 아내 녹전댁이 또 딸을 낳았다. 구실을 얻은 종구는 안동에 딴살림을 차리고 향락의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종구 첩 옥희는 트레머리 밑으로 드러난 뒷목이 유난히 탐스러운 여자였다. 도톰한 입술과 오뚝한 콧마루, 잘쏙한 허리가 제법이었던 그녀는 한창 피어나는 이십대였다. 몸피는 가냘파도 가슴은 풍만했고, 볼품은 왠지 잔망스럽고 행동은 경망했으나 종구는 헤어날 줄 몰랐다.
옥희에 비하면 정실 녹전댁이 기품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적인 신비로움도 훨씬 나아 보였다. 강촌 여인답지 않은 살결과 다소곳한 자태가 특히 그랬다. 살림살이도 야무지고 알뜰해서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질투심 많은 앙증맞은 여편네도 아닌 그네는 볼멘소리 한 번 안 하고 아내의 도리만 다할 뿐이었다.
2
아들은 방탕하고, 가세는 무너지고, 화병을 얻은 윤 부인은 종구가 두 번째 첩살림을 차린 해에 세상을 떴다. 눈을 감기 전 윤 부인은 종구를 불러 유언 비슷한 말을 했다.
“어얘든동 한 달에 한 번은 종택을 들러라. 에미를 독방에만 가둬놓지 말고. 그래야 후사를 보지.”
종구는 윤 부인의 당부를 따르지 않았다. 녹전댁을 찾기는커녕 되레 시앗을 갈아치우며 해방감을 만끽하는 기세였다. 가장이 된 젊은 궁도령 종구는 거침이 없었다.
마작을 좋아한 종구는 주말마다 안동 첩집에서 노름판을 벌였다. 노름패에는 늑대 눈을 닮은 외팔이 형사도 있었고, 코끝이 딸기처럼 빨간 세무원도 있었다. 구레나룻이 얼굴을 덮은 잔나비 형상의 군청 직원도 있었다. 신분은 공무원이지만 외근을 핑계로 대낮에도 술집에서 느침을 흘리는 30대 사내들이었다.
종구가 애초 그들과 어울린 의도는 장삿속이었다. 그러나 원체 노는 본새가 흐벅지고 헙헙한 그는 곧 그들과 한패가 되어 방탕한 삶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끝판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얼마 안 가 딸기코는 수뢰사건으로 구속되고, 외팔이는 어느 여인과의 간음 사건에 휘말려 고소당하고, 잔나비는 술에 절어 간암으로 죽었다.
종구도 응징을 피하지 못했다. 광부 매몰사고와 세금포탈 혐의가 겹쳐 허우적거리는 중에 탄광사업을 총괄하던 영업부장이 일을 저질렀다. 그가 여직원과 짜고 자금을 빼돌린 탓에 회사가 폭삭 망하고 말았다.
부잣집 외아들로 자란 종구는 각박한 세파와 부대껴 본 적이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허둥댈 필요가 없었던 그는 선친이 남겨준 재산이 있는 한 사업 자금으로든 노름 밑천으로든 마음 내키는 대로 쓰면 그만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자기 뜻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에 빠져 있던 종구는 탄광사업도 관권만 끼면 잘 될 것으로 믿고 술판과 노름판에 더 신경을 썼다.
종구는 망했다. 환락은 속절없이 깨지고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그는 종택과 몇 뙈기 비탈 밭과 텃밭만 남겨 놓고 나머지 토지는 다 처분했다. 백여 마지기 논밭이 거덜 나자 머슴이든 부엌데기든 드난살이하던 사람들은 다 제 발로 떠나갔다. 문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발을 끊었다.
일손이 달리어 안방만 지킬 수 없게 된 녹전댁은 호미를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몸뻬를 입고 수건을 두른 그네는 분례와 함께 거친 대지와 마주섰다. 대갓집 새댁이 하루아침에 억척 농부가 된 것이다.
그래도 그네는 큰시어머니 윤 부인의 유언을 떠올리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멈아, 꾹 참고 기다려야 한데이. 종구는 필시 돌아온다.”
종구가 파는 토지를 사들인 사람은 강쇠였다. 그는 이장을 내세워 종구가 내던지는 토지를 마구잡이로 줍다시피 했다. 좋아하던 분례를 주포어른에게 빼앗긴 한을 풀기라도 하듯 그는 굶주린 포식자와도 같은 맹렬한 기세였다. 형편 좀 펴졌다고 덩드럭거리는 꼴이 가관이긴 해도 상승세는 놀라웠다. 그동안 물 밑에 살던 괴물이 물살을 타고 급부상하는 형국이었다.
주포어른 댁에서 쫓겨난 강쇠는 안동역에서 지게꾼 노릇을 하는가 하면 노가다판에서 막노동도 했다. 허접한 잡화를 싸들고 이장 저장 다니며 보따리 장사도 했다. 그가 한밑천 잡게 된 계기는 떠돌이 약장 수를 하면서다. 밀가루로 만든 환약을 불로장수 약이라며 장날마다 떠벌린 게 대박을 쳤다.
하루는 난전에서 옷을 파는 뜨내기 보따리상이 강쇠에게 물었다.
“형씨는 무슨 수로 돈을 그리 잘 버는 거요?”
“입담으로 버는 거요. 약장사는 마캉 허풍으로 속여 먹는 사기꾼이요.”
넉살 좋고 몸집 좋은 강쇠는 뻥도 치고, 앉은뱅이 춤도 추고, 차력술도 부렸다. 그가 등에 바가지를 넣고 곱사춤을 출 때면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환약을 한 움큼 삼키고 각설이타령을 하며 약을 팔았다.
일본 형사 앞잡이 노릇을 하며 한몫 챙겼다느니, 해방 직후에는 적산 가옥도 한 채 거머쥐었다느니 하고 사람들이 쑤군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주 역전에서 여관업도 한 강쇠는 육이오 직전 주포리로 돌아와 음지마을에 정착했다. 그 무렵 강쇠는 환갑을 코앞에 둔 상처한 홀아비였다.
주포어른 집에서 쫓겨날 무렵, 강쇠는 윤 부인 위엄이 서릿발 같은데도 지게를 작살내며 난리를 쳤다. 원체 얼굴 가죽이 두꺼운데다 오지랖도 경치게 넓은 사내였다. 눈치도 빠르고 잔꾀도 예사가 아니었다. 이런 그에게는 해방 전후의 수라장 같은 혼란이 한몫 잡는 기회였고, 이번에는 옛 상전의 아들 종구가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치듯이 종구는 또 풍랑을 만났다. 살림이 군색해지자 첩이 다른 사내와 배가 맞아 달아나 버렸다. 종구에게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 무렵 종구는 하루 종일 소주잔을 기울이며 청승맞게 훌쩍였다. 입아귀를 실쭉거리며 질펀하게 우는 것이 자기 몸에 서린 씨 받이의 한을 표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간의 방탕을 회오하는 것 같기도 했다.
종구는 얼마 안 가 아편에 손을 댔다. 분례가 아무리 말려도 종구는 아편을 끊지 못했다. 아편을 끊으면 반미치광이가 되는 금단현상을 견디지 못한 종구가 말기 중독자가 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 앞가림은커녕 다른 사람의 수발 없이는 단 며칠의 일상도 누릴 수 없게 되자 그는 본가로 돌아왔다. 종구는 고향 집으로 돌아온 며칠 뒤 뜻밖의 방문객을 맞았다. 강쇠였다.
“어흠! 종구 있는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한마디 뱉은 강쇠는 곧장 사랑방으로 향했다. 자기 집을 드나드는 주인 같은 걸음이었다. 훤칠한 키대에 돈살이 붙어 풍채는 그럴 듯하나 몹시 거만했다. 따개비 모자를 눌러쓰고 지가다비를 신은 차림이 소작료를 받으러 다니는 마름 같았다.
헤어진 지 삼십여 년, 가슴 설레는 재회일 수도 있지만 그 모습을 안 마루에서 본 분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로 좋아했던 추억이 살아나서가 아니었다. 간밤에 꾼 꿈이 새삼 소름끼쳤기 때문이었다.
강쇠는 꿈속에서 종구네 기와집 용마루에 걸터앉아 술병을 들이키고 있었다. 술을 마시다 말고 분례를 녹일 듯이 노려보던 강쇠는 갑자기 늑대 형상이 되어 달려들었다.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배꼽도 드러낸 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흉몽이었다. 비록 꿈이어도 아가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덮치던 인간이 느닷없이 나타나다니, 분례는 몹시 불안했다.
강쇠가 윤 부인한테 야단맞고 떠나던 날, 분례는 눈물을 훔쳤다. 어떤 때는 그리움에 사무쳐 가슴을 죄기도 했다. 혹시나 되돌아올까 뒷산 고개를 쳐다보며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강씨 종가의 안방마님이 된 오늘의 분례는 강쇠가 원수 진 사람보다 미웠다.
강쇠가 찾아온 까닭은 종구네의 마지막 보루인 종택 때문이었다. 이 끼 낀 기왓골엔 잡풀이 성성하고 대들보는 썩고 있어도 강쇠는 그걸 삼켜야 원수풀이가 시원하게 될 것 같았다.
강쇠는 진작 이장을 통해 종구네 종택을 사겠다는 흥정을 두어 번 넣었다. 분례가 번번이 가로막자 참다못해 찾아온 것이다.
‘엉큼한 놈, 내가 늬놈 속을 모를 줄 알아? 늬놈 뱃속에는 구렁이가 따비를 틀고 있어. 니놈은 니 부모도 등칠 놈이여. 베락 맞아 죽을 놈!’
입속말을 한 분례는 뒤꼍을 가로질러 사랑방 쪽으로 서둘러 갔다. 방 안으로 들어간 강쇠가 분례 아들 종구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문안이 늦었네. 몸이 어떤가.”
분례가 문 밖 쪽마루에서 숨죽인 채 듣고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핏기 없는 분례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강쇠가 본론을 꺼냈다.
“종구, 집을 팔아서라도 몸을 나스야 하잖는가. 후하게 줄 테니 팔 게나.”
우렁우렁 울리는 능갈친 목소리였다. 종구가 머뭇대는데 분례가 곤두박질치듯이 뛰어들어 새된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종택은 몬 팔아. 내 눈에 흙이 들가도 안 팔아!”
악다구니와도 같은 악지 센 목소리였다. 그것은 거의 발작에 가까운 발악이었다.
“주제에 종택을 사겠다고? 넘볼 걸 넘봐, 이 사기꾼놈아. 종택은 아모나 몬 사. 종가는 종손이 사는 집이여. 분수도 모르고 돌매총이 맹구로 나대지 마러. 눈꼴 시러버!”
낯가릴 사이도 아니고, 오기가 뻗친 분례는 대놓고 성질을 부렸다. 분례가 그토록 야멸차고 본때 있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임종 때 윤 부인이 한 말이 생각나서다.
“어얘든동 종택은 지켜야 하네. 누가 뭐라 캐도 팔면 안 되네. 종택 없는 종손은 걸뱅이만도 못하네. 내 말 허수히 듣지 말고 명심하게. 자 네만 믿네.”
혼띔을 당한 강쇠는 군말 없이 가버리고, 분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이 사람아, 정신 좀 차려. 종손이 이래도 되나 말이다.”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실룩거리는 분례가 실성한 사람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큭, 큭 설움을 삼킨 분례는 돌연 핏기 없는 눈자위를 허옇게 뒤집으며 까무러쳤다. 그 길로 그네는 몸져 누웠다.
소식을 들은 강쇠가 화병에 좋다는 환약을 지어 이장 편에 보냈다. 이장이 약봉지를 내놓으며 분례에게 말했다.
“강쇠 어른이 보냈니더. 챙겨 잡수시고 얼렁 쾌차하시소.”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반몸을 벽에 기댄 분례는 듣는 둥 마는 둥 입속말을 했다.
‘늬놈이 어얘라도 종택을 뺏겠다는 수작을 부리지만 흥, 어림없다.’ 분례는 약봉지를 쇠죽솥에 던져 버렸다.
이장으로부터 분례 병세를 전해들은 강쇠는 이튿날 종구를 찾아갔다. 분례가 누워 있는 틈에 종택 건을 담판 짓기 위해서였다.
“종구, 전번에 내가 한 말 생각해 봤는가? 시세보다 곱절로 주겠네. 종택을 팔게.”
그때 종구 아내 녹전댁이 시모 분례에게 급히 사뢰었다.
“어맴요, 강쇠 그 사람이 다부 와서 종택을 팔라 카니더. 우짜마 좋니껴?”
“내 이 돌쌍놈을!”
벌떡 일어난 분례, 눈빛이 성난 암사자 같았다. 녹전댁 부축을 받으며 사랑방으로 들어선 분례가 다짜고짜 강쇠 멱살을 잡고 내질렀다.
“이놈아, 이 늑대 같은 놈아! 나를 이래 맨들어 놓고 머언 염치로 또 왔노? 우리 집이 망해야 원이 풀리겠나? 내가 죽는 꼴을 봐야 하겠나? 이 날도둑만도 못한 놈아, 돈 쪼매 있다고 종택까장 넘봐? 오늘 니캉 내캉 같이 죽자.”
분을 못 이긴 분례는 강쇠 손목을 물어뜯었다. 강쇠는 이번에도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났다. 병이 덧난 분례는 며칠 뒤 숨을 거두었다. 함박눈이 검게 내리는 이른 새벽, 그녀 나이 쉰 중반이었다.
분례가 숨을 거둔 그날, 진종일 술만 마시던 강쇠도 자정 무렵 급사했다. 사람들은 분례가 강쇠를 데려갔다고 했다.
분례가 죽고 한 달쯤 뒤, 종구 동생뻘 일가붙이 동구가 문상을 왔다. 동구가 영전에 분향 묵배하고 마주 앉자 종구는 인사말을 하다 말고 팔 자타령을 늘어놓았다.
“내가 이렇게 된 거는 팔자 탓이야. 씨받이로 태어난 것도, 종손의 멍에를 쓴 것도, 재산을 털어먹은 것도, 아편쟁이가 된 것도 다 팔자 때문이지.”
지난 일이 후회되는지 종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다.
“형님은 아편만 끊으면 일어섭니다. 생각을 바꿔보세요. 생각이 팔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동구 너, 고등학생이 어른 같구나.”
뜻 모를 냉소를 입가에 흘린 종구가 갑자기 그답지 않은 말을 덧댔다. “나는 인제 죽은 몸이야. 나야 죽어도 싸지만 한 가지가 걱정돼. 이대로 죽으면 종택 지킬 놈이 없다는 거지.”
종손 노릇을 나 몰라라 하던 그가 뒷일을 걱정하다니, 동구는 놀란 기색으로 눈만 껌벅였다.
“어젯밤 꿈에 아버님이 나타났어. ‘종구 이놈, 아죽도 후사가 없어! 고얀 놈’하시고는 구름 속으로 사라지시는 거야. 가위가 눌리고 말았어. 오죽했으면 꿈에 나오셨겠나. 원을 풀어드려야겠는데 자신이 없어.”
“형님, 한 말씀 해도 될까요?”
“뭔데?”
“종(種)은 씨를 퍼뜨리도록 운명 지워져 있습니다. 그게 자연의 섭리라는 건데요, 연어가 죽기 전에 모천을 찾는 것도 이 섭리를 좇는 겁니다.”
“너 날 가르치는 거야!”
종구가 나무라듯 소리쳤다.
“형님은 가능합니다. 젊으니까요. 형님, 섭리를 따르세요.”
“가능? 짜식, 싱겁기는.”
종구는 수긍하는 투였다.
“섭리를 따르라? 너 나를 떠미는구나.”
종구 목소리가 갑자기 눅어 있었다.
“형님, 대를 잇는 것은 생명을 잇는 겁니다. 육신은 사라져도 생명은 영원히 남지요.”
“너, 제법이구나. 그래, 죽기 전에 나도 씨 하나 퍼뜨려 봐야겠다. 사 내가 씨도 못 남기고 죽어서는 안 되지. 명색이 종손인데.”
말을 마친 종구는 쑥스러운 듯 멋쩍게 웃었다. 그것도 잠시, 이어진 뒷말은 결연하다 못해 비장했다.
“동구, 니 말이 옳아. 뼈에 가죽만 남았어도 나는 아직 가능해.”
음울하게 그늘졌던 종구 눈동자가 갑자기 야릇한 욕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지는 해가 마지막으로 쏟아내는 광채 같았다. 죽음이 임박하면 그렇게도 변할 수 있는지, 벌써 불이 지피는 모양이었다.
종구가 씨를 심던 밤, 아내 녹전댁이 꿈을 꾸었다.
물비늘이 나붓대는 집 앞 개천가에서 녹전댁이 빨래를 하는데 연어 떼가 몰려들었다. 녹전댁이 신기하게 여기며 옷가지를 함지에 담는데 한 놈이 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녹전댁이 급히 일어서는 바람에 툭 떨어진 놈은 구물구물 힘없이 떠내려갔다. 거반 죽은 채였다.
소스라쳐 잠을 깬 녹전댁은 흉몽인지 길몽인지 종잡을 수 없어 용녀를 찾아갔다.
“태몽이여, 분멩 아들이여. 씨가 싹을 텄어.”
남편이 갑작스레 덮친 까닭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용녀 말을 듣고 보니 그 뜻이 더없이 숭고해 보였다. 녹전댁은 아랫배에 손을 얹고 뱃속 아이가 곧 남편의 생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꿈 풀이도 해보고 점괘도 뽑아본 용녀는 한마디 보탰다.
“남편 명이 다 됐어. 채비하고 있어.”
‘분멩 아들이여. 씨가 싹을 텄어.’
용녀 말을 되새긴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정색했다. 남편 명이 다 되었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녹전댁이 비실대는 남편 종구를 거부하지 않은 것은 작은시모 분례의 유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대가 끊어질까 애가 탄 분례는 때만 되면 용녀를 찾아가서 치성을 드렸다. 반지까지 복채로 바치며 신령에게도 빌고, 천신에게도 빌고, 지신에게도 빌었다. 자기네 집 대청 마룻대에 모신 성주님께도, 샛방 시렁에 모신 삼신할멈께도, 부뚜막 살강에 모신 조왕님께도, 안방 단지에 모신 조상신께도, 씨 하나 점지해 달라고 때마다 빌었다.
치성이 통했던 것일까, 종구가 덮칠 때 작은시모 분례의 유언이 녹전댁 귓전을 때렸다.
“어멈아, 우얘라도 아들을 놔야 한데이. 지성이면 감천이데이. 내 말 잊아불지 말그레이.”
용기를 낸 녹전댁은 허우적거리는 남편을 지그시 끌어당겼다. 남편의 거친 숨소리가 아들을 원하는 사투 같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힘을 다하고 전신을 떨며 신음한 종구는 몇 달 버티지 못했다. 서른아홉의 서러운 나이, 종구는 새까만 아편 꽁초를 입에 문 채 눈을 감았다. 죽어가는 종구 귓속 멀리서 아내의 말이 들려왔다.
“보살이 카대요. 지가 아들을 뱄다고요. 보살이 아들 이름도 지어 줬어요. 연우(佑)라고요. 연우가 조상님 제사도 지내고, 종택도 지킬까 네 페안이 가시이소.”
“나도 씨를 심었어. 부모님 원도 풀어 드렸어.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어.”
종구가 알아듣고 응얼댔다.
부엉이가 한겨울 깊은 밤을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