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겨울호 2024년 12월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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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의 첫 번째 친구이자, 나의 가장 큰 지지자입니다. 고달프고 힘겨워도 절대 절망하지 않으시며 제아무리 탕아처럼 떠돈 자식이라도 품에 안습니다. 그리고 믿어줍니다.’
이처럼 어머니, 엄마는 늘 우리를 따듯하게 맞이해주시고 안아주신다. 또한 ‘고향’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엄마, 어머니이다. 하지만 이젠 엄마는 고향을 떠나 우리 집에 계신다.
조그마한 키에 왜소한 체격으로 깔끔한 성격인 우리 엄마는 부엌살림을 도맡으셨고 세간이 반짝반짝 윤이 나게 살림을 잘 꾸리셨다. 오십여 년 전의 노란 양은 술주전자가 윤이 나며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시골집엔 살림살이만 있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평생 고향 땅만을 지키면서 살아가신 엄마는 한이 많으셨다. 그러기에 눈물도 많으셨다. 방 귀퉁이에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올망졸망한 애들이 솥단지를 들썩일 때면 마음 아파하며 먹을거리를 만들어 주셨던 우리 엄마.
명랑한 성격이신데, 고단한 삶이 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새벽녘까지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부지런하셨던 엄마는 유독 초록색을 좋아하셨다. 또한, 유모 감각과 사교성이 많으셨으며 활달하셨다. 하지만 무서움도 많이 타셨다. 바람 소리에 대문이 흔들리면 놀란 가슴을 쓸어안았다고 한다.
5남매를 키우기 위해 고생을 많이 한 엄마는 십오 년 전에 아버지의 돌아가심으로 고향을 등지고 외삼촌이 사시는 빌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몇 해 사이에 외삼촌, 외숙모가 연달아 돌아가셔 마음 둘 곳도 없고 외로움이 커져만 갔다. 당신 혼자 우두커니 창밖의 풍경들을 보시는가 하면, 오일장과 노래 교실을 다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걷는 것조차 힘드니 외출조차 하기가 힘들어지고 파킨슨, 치매 등 노인성 질환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셨다. 가끔 엄마 집에 가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버릴 음식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전화를 걸면 주무시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다 졸려 누워 계시는 모양이다. 고향에 가 엄마를 만나고 헤어질 시간이면 마음이 아팠다. 엄마는 버스가 지나갈 때까지 베란다로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셨다.
난 결심했다. 5년여 전에 더는 엄마를 혼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애틋함에 내가 엄마를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 오셔 주간 보호센터에 다니시고 난 그 틈을 이용해 시간제 근무를 하였다. 하지만 올해 봄부턴 건강 악화로 집에 계신다.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고 고개 숙인 채 뽁뽁이를 하시는 엄마를 볼 때면 안타까울 뿐이다. 재밌고 유모다운 엄마의 마스코트는 어디로 갔다는 건가.
게다가 걱정은 우리 집이 주택이라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데 언제까지 엄마가 계단을 오르내리실 수 있을까이다. 학생 둘에, 좁은 주거 공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엄마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요즘 엄마 돌봐드리면서 가장 힘든 일이 생겼다. 매일 아침이 되면 대소변이 기저귀에 흠뻑 젖어 빨랫감이 수북이 쌓인다. 그럼 난, 순간 악녀로 변한다. 어느 땐 언성을 높이며 엄마한테 퍼붓는다.
“아휴, 못 살아. 엄마가 아기야? 잘난 자식네 가.”
나의 레퍼토리는 다시 시작된다. 내가 심하게 말할 때는 엄마도 소리를 높였었다.
“늙어봐라, 내 나이 돼봐라.”
난 상처주는 말을 한 뒤 후회하는 일상이 거듭되고 있다. 셋째딸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는데 상처 주는 말을 자주 내뱉고 있으니, 엄마는 나를 키울 때 모질게 하셨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엄마를 잘 돌봐드리련다.
시간이 갈수록 야위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식사도 몇 숟가락이 다고 그것마저 눈칫밥을 드시는 것 같다. 난 엄마 옆에 앉아 생선도 발라 드리고 두부도, 멸치볶음도 밥 위에 얹어 드린다. 가끔 휠체어를 끌고 집 앞 산책로에 간다. 중랑천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잠시나마 물고기랑 비둘기랑 장미꽃이랑 친구가 되어 본다. 엄마는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보시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신다. 엄마는 밖에 나가기를 좋아하셨지.
요즘 또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얼마 전부터 집 안에서 걷는 것까지 힘들어하신다. 화장실까지 가까운 거리인데도 보조기에 의지해 간신히 가신다. 그것도 부축 없이는 안 된다. 구순의 연세에 기억력마저 희미해지고 말씀도 없으시고 웃음도 사라지고 앉아 계실 때도 고개를 조아리며 손발을 떠신다.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젊었을 적의 엄마로 착각할 때가 많다. 그것은 오래도록 사셨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리라.
오줌싸개에 유난히 배추김치를 좋아하시는 엄마, 내가 간혹 서운한 말을 해도 속상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엄마가 마음 편하게 안정을 취하면서 딸, 사위 눈치 안 보고 여생을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득 여고 시절이 떠오른다. 엄마가 자취방에 오셔 따끈한 밥에, 김치를 담가주시고 빨래와 방 청소까지 해주셨다. 이젠 역할이 바뀌어 엄마를 위해 애쓰고 있다. 앞으로 엄마와 얼마만큼의 추억을 쌓을지는 몰라도 웃을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지막 소원은 엄마가 하늘나라로 소풍 가기 전까지 보조기를 이용해서라도 걸으셨으면 하고 시설에 안 가시고 우리 집에서 편안히 눈을 감으셨으면 좋겠다. 혹 병원에 가시더라도 일주일 정도만 고생하시다 가기를 기도드릴 뿐이다.
난 오늘도 엄마가 좋아하는 배추 겉절이를 담기 위해 배추를 다듬기에 바쁘다. 엄마가 나와 함께 계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엄마를 매일 볼 수 있지 않은가. 힘이 들지만, 엄마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토탈 매니저로서 열과 성을 다하련다. 평생 1등 매니저로서 말이다.
“엄마, 셋째딸과 오래오래 건강하게 재밌게, 웃으면서 살아가기로 해요. 엄마는 말씀 안 하셔도 존재만으로 위안을 얻어요. 사랑해요, 엄마”라고 말하며 손 하트를 수백 개 보낸다. 엄마는 어느새 환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