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겨울호 2024년 12월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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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비가 내리더니 다시 후덥지근한 열대아가 지속되는 여름날이다.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부지런한 새댁은 예쁜 볼웃음을 짓는 기분 좋은 그녀다. 집 앞에 있는 대형마트의 생수가 비싸 500m 떨어진 슈퍼에서 사온다고,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들어온다. 문득 젊은 날의 내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계절이 두어 번 바뀐 주말 오후 엘리베이터에서 그녀의 가족을 다시 만났다. 나는 새댁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남편 아이들과 함께 외식을 하러 간다고 했다. 성장을 한 아름답고 우아한 그녀의 어깨엔 보기 어려운 고급 모피 코트가 걸쳐 있었다.
요즈음 많은 젊은이들이 직장에 도시락은 물론 텀블러에 커피를 싸가지고 가서 무지출을 시행한다. 화장품도 저가 브랜드를 쓰고 더 바를 수 없게 된 립스틱을 바닥까지 붓으로 긁어 바른다. 또 퇴근 후 알바를 하여 돈을 벌기도 한다. 아껴야 잘 살지만 아끼고만 살 수 없는 MG세대의 소비 트렌드다. 그들은 휴가 때가 되면 반드시 해외여행을 떠난다. 평소 동경하던 명품백을 서슴없이 지른다. 이를 양면성(bivalent)과 소비자(consumer)를 합쳐 앰비슈머(Ambi+sumer)라고 부른다. 우선순위에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후순위에는 최대한 아낀다. 고급 옷보다 고급 경험에 돈을 쓴다. 개처럼 모아 정승처럼 쓰는 젊음들이다.
그러나 직업은 세분화되고 그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는 AI 시대다. 몸을 움직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처럼 돈을 버는 시대는 지났다. 이 속담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사춘기의 나는 무채색의 검소한 어머니가 싫었다. 고운 미모였던 어머니는 퍼머는커녕 변변한 옷과 화장품조차 없었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 시대의 부모들은 절약이 몸에 뱄지만 자식들을 희생으로 키웠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내 어머닌 오직 자식들 교육에 힘을 썼다. 그러나 신은 엄마 편이 아니었다. 일찍 찾아온 병마는 강건했던 어머니를 무너뜨렸다. 교육자이신 아버지 슬하 오남매를 키운 어머니의 고단함을 철없는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자식들의 성공과 효도는커녕 어머니 평생 모은 재물에서 병원비만을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지불한 채 세상 떠난 어머니는 내게 늘 시린 통증이다.
사람은 저마다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다. 사람마다 그릇이 다르고 삶의 조건이 다르다. 돌아가실 적 어머니보다 지금 내 나이가 훨씬 많아졌다. 어머닌 부자 엄마였지만 필요할 때 쓰고 살아온 나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의 ‘앰비슈머’들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고향 마을의 면장님 아들로 태어났지만 청빈한 관리였던 아버지와 열 남매였던 집안은 늘 가난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 싶었다. 십 년을 훌쩍 넘기고 일하던 공기업에 사표를 내고 장사의 길로 떠났다. 승승장구하던 안락한 월급쟁이를 내던지고 예측할 수 없는 곳에 뛰어들었다. 험난하고 광활한 나라 정강이의 털이 닳아 없어질 만큼 대륙을 달렸다. ‘나는 무사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수없이 되뇌었다고 했다. 화장실조차 없는 동네, 보름을 넘게 샤워는커녕 세수조차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도 그는 자신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악전고투였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주민들에게 화장실을 지어주었다.
물질만능의 덫에 걸린 현대인들이다. 관심이 돈인 세상이다. 사람보다 돈의 가치를 중시하는 한탕주의 사회에서 그는 정직하게 사업을 하였다. ‘이것이 장사다’라는 장편 자서전을 펴낼 만큼 장사의 신이 되었다. 장사란 무엇인가? 장사란 자신의 이익을 먼저 덜어내는 인(仁)이다. 남을 믿는 행위는 지(知)며 그것을 과감히 실천하는 것은 용(勇)이라 했다. 그는 ‘논어’와 ‘중용’의 덕목을 장사의 근본 원리로 실천하여 큰 부를 이루었다.
그는 충실한 노년을 살아가고 있다. 열 남매의 여섯째로 몸이 불편한 형과 조카들을 돌보고, 부족한 친구와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는 인간냄새 나는 사람이다. 손에 쥐는 재물보다 가슴 가득 감성을 채우는 한시를 쓰는 시인이다. 또 뒤늦게 동양학을 전공한 문학박사이며 흔치 않은 군자의 덕을 지닌 친구다.
이 가을 살아온 길을 돌아보며 내 발부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문득, 앰비슈머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자’라는 말을 생각게 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