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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운동장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홍영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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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전 고향 동창회에 다녀온 남동생 현준과 통화할 때였다. 올해는 초등학교 입학생이 아예 없어서 조만간 분교로 바뀔 수 있다는 입소문을 전했다. 개교 백 년이 넘은 면 소재지의 학교인데 전교생이 서른 명도 안 된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폐교 대상 학교 기준은 전교생 예순 명 이하인데 그것에도 한참 모자라서 지역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된다고 동생은 덧붙였다. 동생과 내가 다닐 때는 군에서 가장 학생 수가 많은 초등학교였던 사실이 꿈만 같았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굳건히 고향을 지키며 아름답고 그리운 시절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아졌다. 동시에 그동안 잊고 살았다 여겼던 지난 일들이 실타래 풀리듯 줄줄이 떠올랐다.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운동장까지도.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정부에서 가족계획 하라며 둘만 낳기 운동을 펼쳐 인구 증가를 막고 있었다. 그럼에도 농촌에서는 다자녀 가구가 많아 우리 집도 맏이인 내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까지 3남매였다. 조회 때는 천오백여 명에 달하는 학생이 운동장에 꽉 들어찼고 학급 당 예순두세 명씩 네 학급이던 우리 학년은 1,2반이 남학생 반이고 나머지는 여학생 반이었다.

5학년 때처럼 6학년 담임선생님도 여선생님이기를 바랐던 나의 희망과 달리 담임은 키가 큰 이형수 선생님이었다. 두 해 전 우리 학교로 전근 왔다는데 나는 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전해에도 나는 반장 역할 하느라 교무실을 들락거리며 담임선생님 심부름도 하고 많은 선생님 곁을 지나친 터였다.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웃음기 없는 얼굴로 교단 위에 서 있는 삼십대의 담임선생님을 보는 순간 종달새처럼 떠들던 나를 비롯한 우리 반 모두는 저절로 입을 다물고 자세를 똑바로 했다. 직사각형의 큰 얼굴과 몸집에 비해 담임은 목소리가 가늘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짜증이 묻어나던 말투만 생각 날 뿐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다 익히기도 전인 첫날 반장 선거를 실시했다. 나는 5학년 때 옆줄에 앉았던 명자의 추천으로 후보가 되었고 출마자 세 명 중에서 지난해에도 내게 손을 들어주었던 친구들의 응원으로 마흔두 표를 얻어 반장이 되었다. 선거는 지난해에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많은 내가 유리했다. 부반장은 당연히 차점자가 되었는데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 없었던 김윤미로 열다섯 표를 얻었다.

나는 등 떠밀려 출마할 때는 뽑히면 좋고 안 뽑혀도 그만이라는 마음이었는데 막상 뽑히고 나니 살짝 걱정이 앞섰다.

5학년 반장 때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미 경험한 바였다.

그때 부반장은 분식집 딸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제 세력을 넓혔다. 중간에 앉았던 부반장보다 키는 내가 더 커서 나는 뒤쪽 아이들과 친했고 부반장은 앞쪽 아이들과 놀았다. 그 애는 기회가 될 때마다 주변 아이들을 어머니의 분식집에 데리고 가서 떡볶이를 먹이며 환심을 샀다. 어차피 5학년 한 해는 뽑힌 대로 흘러가야 될 터인데 성적도 내게 뒤지는 부반장이 무엇 때문에 편을 가르고 맞섰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떡 한쪽이라도 더 얻어먹기 위해 또는 얻어먹은 값을 위해 부반장의 비위를 맞추고 청소시간에도 빗자루로 쓰는 시늉만 하며 구석에 모여 수군댔다. 어느 사이 우리 반은 반장 편과 부반장 편으로 나뉘어 냉기가 흘렀다. 나는 부반장에게 나쁜 말도 안했고 싫은 감정도 없었는데 옆에서 자꾸 말을 지어내니 쌓이는 것은 오해뿐이었다. 또래보다 키가 커서 한 살 모자라는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고지식한 성격에 상황판단도 부족했다. 정직을 가훈으로 가르친 아버지 덕분에 거짓말이 제일 나쁘다고 믿고 있던 터라 책임감 없이 거짓말을 일삼는 아이와 어른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짐작도 못했다. 전하는 말에 반응을 삼가고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반 분위기는 점점 악화되고 반장과 부반장이 서로 말을 안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한두 살 더 많은 아이가 대부분인 우리 반 통솔이 힘에 부쳐서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운동장을 힘없이 걸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가던 5월 어느 날, 학과 수업을 마친 담임선생님은 모두 운동장에 모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교실을 나갔다. 담임은 우리 동네에서 태어나 교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발령 받아온 스물세 살의 선배 언니이기도 했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웅성거리며 삼삼오오 운동장으로 향했다. 한쪽 실습지에 배추밭과 뽕나무밭이 있는 직사각형의 운동장은 면민체육대회가 열릴 정도로 넓었다. 운동장 안팎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 아카시아나무가 병풍처럼 이어져서 그늘진 곳도 많았는데 모자를 쓴 담임선생님은 싸늘한 표정으로 운동장 한가운데에 햇볕을 받으며서 있었다. 먼저 핀 교무실 앞 화단의 보라색 수수꽃다리 꽃과 붉은 찔 레꽃, 운동장 한쪽의 주렁주렁 매달린 연보라색 등꽃 외에도 실습지 울타리의 하얀 아카시아 꽃까지 운동장은 꽃대궐이 된 듯했다.

담임선생님은 손짓으로 나와 부반장을 불렀다. 나는 담임의 새하얀 모자가 눈부셔서 고개를 숙이고 담임 앞으로 걸어갔다. 나와 부반장을 나란히 세운 담임선생님은 각자 원하는 사람 뒤에 가서 줄을 서라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채 햇빛에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이 원하는 편에 가서 섰고 줄은 내가 조금 더 길었다. 담임선생님은 서로 마주 보게 한 후 이제 반대편 얼굴을 확실히 알았으니 서로 모함하지 말라며 차분한 목소리로 일렀다.

“선의의 경쟁만이 좋은 학급을 만들 수 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편싸움 대신 성적 향상을 위한 경쟁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무수히 떠돌던 발 없는 말도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가끔 답답한 일이 생길 때면 가슴 깊이 간직했던 그 말을 되새기며 마음을 달랬다.

3월 첫째 주도 거의 지난 토요일, 나는 종례를 마치자마자 5학년 1반 교실로 갔다. 그 반의 담임인 민경호 선생님이 환한 얼굴로 4학년 이상 각 반의 반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올해에는 내가 어린이회의를 지도하게 되었으니 한 해 동안 잘 지내 보자.”

중년의 민 선생님은 큰 눈과 높은 코가 이국적인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말을 마친 다음 즉시 전교 어린이회장 선거를 진행했다.

--------------------------------------------------------------------------------------------------------- 내용추가

큼 비가 내려도 다음날이면 물이 다 빠졌다. 점심시간에는 전교생이 다 나온 듯 운동장이 떠들썩했다. 주변의 아름드리나무에서는 물오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특활시간에 낼 글짓기 숙제를 하느라 나는 운동장에도 못 나가고 교실에 남아 있었다. 학과 공부에다 중학교 입시 준비까지 겹치다 보니 시간 여유도 없고 감정도 메마르는 것 같았다. 빨리 중학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던 내 어깨를 두드린 것은 시장 가까이 사는 경애였다. 경애는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집으로 와서 동생과 셋이 살고 있었다. 경애의 어머니는 도시에서 음식점을 하는데 많이 바빠서 달마다 오지 못했다. 경애는 도시의 초등학교에서 4학년 때 전학 왔다는데 같은 반이 된 것은 6학년이 처음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키가 비슷해서 뒤쪽에 앉다 보니 우리 집에도 놀러오고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늙은 할머니를 도와주면서 배웠는지 설거지도 나보다 잘하고 군불도 잘 땠다. 경애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너는과외안하니?”

“무슨 과외? ”

나는 뜻밖의 말에 깜작 놀라서 경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 담임 집에서 몰래 한다는데 윤미랑 시장통 아이들은 거의 다한다고 들었어.”

경애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며 또 소곤댔다. 윤미 어머니가 담임선생님을 여러 번 찾아왔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당시 현직에 있는 교사가 과외를 하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워낙 박봉이다 보니 교육청에서도 모르는 척 눈 감아 준다는 풍문이 돌았다.

나는 형편이 어려워서 과외는 꿈도 못 꾸지만 과외 받는 아이들이 부럽지도 않았다. 학습서나 문제집을 참고하면 거의 다 이해할 수 있었고 모르는 것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도시에서 농업고등학교을 다닌 아버지는 피곤에 못 이겨 곯아떨어진 어머니 옆에서 농업 관련 책을 보며 윗방에서 공부하는 내 질문에 답을 하곤 했다. 아버지는 농과대학을 가서 농업 선생이 되고 싶었지만 고등학생 때 소년가장이 되는 바람에 할머니를 도와 농고를 졸업하고 농사꾼이 되었다. 그때는 땅값이 싸서 땅을 다 팔아도 도시에서 살 수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훗날 말했다.

며칠 후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반장을 한 사람이 계속 하면 너무 지겨우니 우리 반은 달마다 반장을 뽑기로 하자.”

나는 반이 안정되는 것 같아서 한숨 돌리려던 참인데 뜻밖의 말을 들으니 어안이 벙벙해서 찬성도 반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제외한 후보를 추천 받았으나 입후보자는 윤미가 유일했다. 과외 팀은 약속이나 한 듯 윤미를 응원했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내내 담임은 미소 띤 얼굴로 윤미에게 소감 발표를 시키고 반 아이들에게도 잘 협조할 것을 부탁했다. 나는 별로 유쾌할 것 없는 담임과의 맞대면이 끝나서 홀가분하기도 했지만 내 감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담임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어머니는 화가 치미는지 왼손으로 가슴을 쳤다.

“윤미 어머니가 국회의원하고 친척인데 군에 있는 학교로 영전시켜 달라고 부탁했대요.”

어머니는 윤미 어머니와 친정 동네가 같다는 부녀회원에게 들었다며 아버지에게 볼멘 소리를 했다.

“아무리 욕심이 앞서도 선생이 중심을 잡아야지, 달마다 반장을 뽑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구먼.”

아버지는 한숨 섞인 푸념을 내뱉었지만 이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누가 뭐래도 너는 네 할 일만 똑바로 하면 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담임의 행동에 윤미 어머니의 뜻이 반영되었다고 믿기 어려웠다. 어쩌다 길에서 만나면 활짝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주던 윤미 어머니가 같이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다른 아이에게 상처 주는 일을 원했을 것 같지 않았다.

4월 전교어린이회의가 열리는 날, 나는 조금 일찍 회의실에 도착해서 민 선생님에게 반장이 바뀐 사실을 보고했다.

“선생님, 다음부터는 회의에 참석 안 해도 되지요? ”

나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후배들 보기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현주야, 네 권리를 포기하지 마라. 각 반의 대표가 너를 뽑은 것은 네가 부회장에 적합하다고 보고 뽑은 것이지 3반 반장이어서가 아니란다.”

민 선생님은 우리 반 사태를 대충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앞으로도 누가 반장이 되든 전교부회장 자격으로 참석하라고 일렀다. 오래 전부터 우리 동네에서 살아온 민 선생님은 과외도 하지 않고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부양했는데 천주교의 사목회장도 맡고 있었다.

그렇게 4월이 지났건만 달마다 뽑기로 한 반장은 다음 달에도 그 다음 달에도 건너뛰어서 윤미가 반장인 채로 방학이 다가왔다.

방학을 한 주 앞둔 월요일. 나는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갔다. 6월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한 햇볕은 7월이 되면서 그 기세가 더 등등했다. 장마철이 왔는데도 마른장마가 열흘 넘게 계속되어서 운동장은 퍼석거리고 흙먼지가 날렸다. 나는 운동장 가득 퍼진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미간을 모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서 있었는데 글짓기반 한상진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나와 5학년 이준호의 이름을 불렀다. 나와 이준호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교단 위로 올라가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지난달 교육청에서 실시한 글짓기 작품 모집에 보낸 글이 나는 산문에 준호는 시부에서 최우수상에 뽑혔다고 한 선생님은 전교생에게 설명했다.

반장을 그만둔 다음 나는 시간의 여유가 조금 생겨서 방과 후에는 글 짓기공부도 할 겸 한상진 선생님 반에 놀러 갔다. 4학년을 담임하고 있던 한 선생님은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빈 교실에서 우리가 써낸 작품을 읽고 있었다. 그곳에는 선생님 반이면서 글짓기반 후배인 여학생 옥희와 연화도 있었는데 그들은 집이 먼데도 한 선생님과 같이 남아 있다

가 나를 반겨주었다. 학년은 낮지만 나이는 동갑이어서 친구 같았던 그들은 어른스럽기도 해서 나를 깍듯이 선배 대접했다. 준호와 그들은 동시를 잘 써서 한 선생님에게 칭찬도 많이 듣고 어린이신문에도 글을 발표하던 소년문사였다. 한 선생님이 글짓기 지도를 잘한 덕분인지 군 대회의 상은 우리 학교가 거의 휩쓸다시피 하고 있었다. 나는 정성을 다해 글짓기반을 지도해주는 한 선생님 반에 가면 마음이 편하고 후배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재미있어서 중학교 입시생인 것도 잊고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한 선생님은 방학 동안에도 나와 준호를 글짓기 반으로 불렀다. 군 대표로 뽑혔으니 9월에는 도 대회에 나갈 준비를 위해서였다. 글짓기 선수가 된 나는 오전에는 집에서 방학숙제나 입시 공부를 하고 해가 기울어진 오후에는 학교 운동장의 등나무 밑으로 갔다. 그곳은 운동장에서 불어온 바람이 등나무 밑을 지나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언제나 시원했다. 하지만 늦게 시작된 장마로 비 오는 날이 계속 이어져서 며칠 나가지도 못하고 광복절을 맞았다.

장마도 잦아들던 비 갠 어느 날 한 선생님은 나와 준호를 데리고 마을 뒤편에 있는 산에 올랐다. 밑에서 볼 때와 달리 산은 가파른 구간이 많아서 우리는 더 올라가지 못하고 산 중턱에서 펑퍼짐한 돌을 찾아 걸터앉았다. 저 멀리 내가 살아온 우리 동네의 모습이 보자기를 펼쳐 놓은 듯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한 선생님은 산 위에서 보이는 풍경을 잘 기억했다가 글 쓸 때 참고하라고 일렀다. 나는 그때까지 야트막한 동네 뒷산은 가봤어도 높은 산은 처음이라 주위에 보이는 여러 종류의 나무와 풍경이 신기하고 아름다워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도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고 강을 가로지르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웅장한 다리도 가느다랗게 보였다. 문득 그 속에서 아웅다웅했던 지난날이 부질없다 여겨졌다.

“어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지? ”

선생님은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며 준호와 내게도 심호흡을 권했다.

“세상 모든 일이 나중에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때서야 나는 한 선생님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처 받은 제자를 위로하기 위해 여러 날 고민했을 그 마음이 헤아려졌다.

“멀리 보는 사람이 되어라.”

선생님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단호했다.

“멀리 보려면 높이 날아야겠네요.”

준호의 속사포 같은 대답에 한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높이 나는 방법도 있지만 지혜가 있으면 앉아서도 천 리를 볼 수 있단다.”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글짓기도 하는 거라고, 한 선생님은 덧붙였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 어머니는 청주에 사는 큰이모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우리 집은 전화를 놓기 전이었다. 어머니는 대회가 열리는 9월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오랜 궁리 끝에 얻은 방법은 큰이모의 도움이었다. 아무리 학교를 대표한 선수단이라도 학교에서는 교통비나 나오면 다행인 시절이었다. 학부모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셋이 여관을 가도 방 둘은 사용해야 하니 식비와 숙박료가 만만치 않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는 어머니에게는 그것도 큰 부담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낯모르는 남자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닌데 넉넉지 않은 도시 살림에도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큰이모가 고마웠다고 어머니는 두고두고 되풀이했다.

한 선생님과 나 그리고 준호는 어머니가 적어준 이모네 주소를 들고 시외버스를 탔다. 대회 전날 오후였다. 나는 초행길이었지만 청주에서 교대를 다닌 한 선생님은 그곳 지리에 밝아서 헤매지 않고 수월히 변두리에 있는 큰이모네 집을 찾았다. 초가을이라고 해도 한낮에는 뜨겁고 해가 져야 서늘한 바람이 불어서 나는 땀을 훔치며 선생님을 따라다녔다. 이모는 기다리고 있었다며 한 선생님과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다른 도시에서 출장 근무하는 이모부와 주말부부인 큰이모는 딸 둘과 아들 하나인데 이종사촌오빠는 군 복무 중이었다. 아주 작은 방은 이모부의 물건이 쌓여 있어 창고나 다름없고 도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큰언니와 중학생 둘째언니는 건넌방을, 이모는 안방을 쓰고 있었다. 이모는 뚝딱 저녁을 지어서 우리를 대접하고 안방에 모기장을 쳐서 한 선생님과 준호의 잠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이모와 언니들 사이에 끼여 건넌방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큰이모는 소고기뭇국을 끓여 아침상을 대령했다. 대회는 10 시부터 시작이라 우리는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대회장으로 출발했다.

언니들은 먼저 일터와 학교로 간 뒤였다. 백일장은 공원에서 열렸다.

나와 준호는 각각 공원의 한쪽 의자에 앉아서 글짓기를 했다. 산문 글제는 장마 등 서너 가지가 걸렸었는데 오후에 열린 시상식에서 나와 준호는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글짓기대회 참가 후, 나는 중학교 입시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책상 위의 동화책을 모두 현준의 방으로 보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2학기 둘째 주에 담임선생님은 새로운 반장을 뽑자고 말했다. 나는 누가 반장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던 결심과는 달리 경애를 추천했다.

다른 추천자는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도 윤미의 통솔력에 실망을 한 티가 역력했다. 윤미는 과외팀을 중심으로 학급 일을 의논했다. 먼 동네애들과 과외를 받지 않는 애들은 나를 중심으로 뭉쳤다. 한두 해씩 늦게 학교를 온 먼 동네 애들은 공부는 나보다 뒤처져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는 나보다 밝았다. 아침저녁 신작로와 산길을 오가며 보고 들은 것도 많았다. 윤미가 어떻게 반장이 되었는지 소문 들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 중 내 앞의 나정이는 여름방학 때 물 건너 제 집에 꼭 놀러오라고 성화였다.

경애는 우리 쪽뿐만 아니라 과외팀에서도 표를 얻어 간신히 서른다섯 표로 반장이 되었다. 내가 글짓기에 집중하는 동안 과외팀과 친해진 것이 행운으로 작용했다. 경애는 일급비밀이라며 1학기 종업식 때 윤미가 아닌 내가 일등을 해서 윤미 어머니가 담임선생님에게 항의했다

는 소식을 전했다. 과외 안 받는 애도 일등을 하는데 과외 받은 애는 성적도 안 오르니 어찌된 노릇이냐고 따졌다고 했다. 경애는 과외팀에서 다룬 내용이 시험에 반영된다는 것을 알고 월말고사 전날에도 과외 받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그것을 알아내느라 바빴다.

추석을 앞두고 아버지는 다시 비닐하우스를 완공했다. 밭 한쪽에는 딸기 농사에 쓸 퇴비가 산더미 같았다. 물려받은 밭 천여 평 중 절반의 땅을 비닐하우스가 차지했다. 아버지는 매일 쓰는 영농일지에‘다시 도전! ’이라고 적었다.

“나중에 고등학교는 서울로 보내 주세요.”

철없는 현준의 말에도 아버지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 보내주고 말고.”

아버지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해는 추석 전에 오던 태풍도 살짝 지나가서 고개 숙인 벼도 덜 쓰러지고 익기 시작한 감도 조금 떨어져서 어느 해보다 풍성하고 활기 넘치는 추석을 보낼 수 있었다.

매년 그랬듯 추석 이튿날은 운동회가 열렸다. 아버지를 닮아 평발인 나는 달리기를 못했다. 운동회에서 상품 타는 등수 안에 들기는커녕 간신히 꼴찌만 면할 정도였다. 6학년 때라도 달리기 상을 한번 타 보고 졸업하는 것이 어머니와 나의 소원이었다. 그 일은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6학년은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데 장애물이라기보다 주로 어른과 달리기였다. 출발선에서 3미터쯤 앞에 임무를 적은 종이를 흙으로 덮어두면 그것을 찾아서 모자 쓴 할아버지나 아기 업은 아주머니 등과 달리는 식이었다. 나는 같은 조의 아이들에게 밀려 늦게 종이를 찾았는데 청년과 손잡고 달리기였다. 청년! 내가 소리를 지르자 어떤 청년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더니 내 손을 잡고 뛰었다. 어찌 잘 달리는지 나는 헉헉거리며 청년에게 이끌려 일등을 했다. 어머니는 그동안 일등 못한 한을 풀었다며 박수를 쳤다. 경애는 치마 입은 아가씨와 달리기였지만 운동장에 나오는 아가씨가 없어서 상을 못 탔다.

10월이 되자 햇볕도 수그러들고 바람도 서늘했다. 운동장은 운동하는 아이들로 붐볐지만 나는 해가 짧아지는 만큼 입시가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초조했다.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보자기에 싸서 학교에 갔다가 돌아올 때는 책 보따리를 양손에 번갈아 들면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어둑어둑해진 운동장을 걸어 나오곤 했다. 집에 와도 시간이 빠듯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녁 먹고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새 쓰러져 잠들곤 했다.

10월 첫째 월요일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은 이틀 뒤에 도내 일제고사가 예정되어 있으니 모두 준비하라고 일렀다. 과외팀은 9월부터 대비했다고 경애가 귀띔했다. 두려움과는 달리 어려운 문제가 많지는 않아서 나는 시간 안에 답안지를 낼 수 있었다.

며칠 후 임원 어머니 모임에 다녀온 어머니는 모처럼 기분이 좋아보였다. 다른 날보다 일찍 온 내가 동생들과 노느라 대청마루를 어질러도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비닐하우스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제고사 결과를 들었는데 도시의 학교에 합격할 점수는 우리 현주밖에 없대요.”

어머니는 그것도 윤미 어머니 덕분이라며 웃었다. 담임은 공개를 안하려고 얼버무리는데 윤미 어머니가 하도 다그치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고 전했다. 아버지도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다른 말은 안 했지만 나는 표정이 일그러졌을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라서 섬뜩했다. 내가 윤미를 앞서는 일이 생길 때마다 담임은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떻게든 윤미의 성적을 올려서 윤미 어머니의 칭송을 듣고 싶었던가 보았다. 윤미도 나도 반장을 못해서 안달이 난 것도 아닌데 담임선생님은 그런 것으로라도 윤미 어머니의 환심을 사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반장이 되고부터 경애는 과외팀 하고만 어울리느라 우리 집에 놀러 오지도 않고 담임 앞에서는 내게 말도 걸지 않았다. 눈치 빠른 경애는 담임이 나를 구박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새 담임의 앞잡이가 되어 내 흉을 보고 다닌다는 소식이 아이들 사이에 떠돌았다. 나는 온갖 소식을 전해주던 경애와 소통이 안 되는 것이 불편했지만 내 할 일만 하라던 아버지의 말대로 중학교 입시 공부에 몰두했다.

중학교 입시 전날,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누가 대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나를 부르는 여자 음성이 들려서 얼른 대문을 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서 있었다. 그때 우리 반의 기이한 운영방식은 교무실에서도 화젯거리였던가 보았다.

“내일시험잘쳐야한다.”

선생님은 내 손에 잘 깎은 연필 두 자루를 손에 쥐어주고 등을 두어번 토닥였다. 나는 황망히 연필을 받긴 했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꾸벅 인사만 했다. 선생님은 부모님 찾기 전에 그만 들어가라며 급히 돌아서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선생님이 고마워서 가슴이 울컥했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여학생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에 합격했다. 경애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사는 도시로 갈 예정이라며 시험을 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동안의 만행을 교장선생님도 아는지 모르겠다며 부녀회원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윤미 어머니는 윤미의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과외한 것을 후회한다는 입소문이 돌았다.

졸업식을 한 주 앞둔 토요일, 6학년 1반 담임인 학년주임 선생님이 어머니를 만나러 우리 집으로 왔다. 학년주임은 잠깐 안방에 들어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후 돌아갔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학년주임을 배웅하면서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을 했다. 아버지는 비닐하우스에 일하러 간 사이였다. 지난 가을 모종을 낸 딸기는 비닐하우스에서 살다시피 했던 아버지의 정성으로 순탄히 자랐다. 그 즈음 막 익기 시작해서 매일 새벽 조금씩 수확하는 중이었다. 맨 처음 딴 딸기 한 소쿠리는 집에 가져와서 식구들과 먹었는데 나는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딸기가 너무 달고 향기로워서 다 먹고 나서도 그 맛을 잊지 못했다. 어머니는 저녁에 아버지에게 담임 대신 학년주임이 사과하러 왔었다는 말을 했다.

강당에서 열린 졸업식 날, 나는 글짓기반 후배 옥희가 달아준 황금색 종이 꽃을 달고 입장했다. 상장 수여식에서 남학생 일등이 교육감상을 타고 나는 여학생 일등이라 교육장상을 타는 줄 알았는데 사회 보는 선생님은 경애를 호명했다. 나는 의아했지만 한상진 선생님이 써준 답사를 졸업생 대표로 낭독했다. ‘잘 있어라 아우들아’로 시작되는 답사를 읽는데 졸업한다는 사실이 실감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콧물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나도 이런 저런 서러웠던 일이 떠올라 나중에는 울먹이며 답사를 마쳤다.

집에 오니 어머니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상을 바꿔치기해 놓고 미안하다고 왔던 거라고요.”

아버지는 우등상을 탔으니 되었다고 하면서도 표정은 침통했다. 내게는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중학교 가서도 잘 하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졸업 후 나는 오랜만에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동생들과 집 앞 개울에서 썰매도 타고 친구들도 만나면서 오직 다가오는 일만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해질녁, 대문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가자 그때까지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던 경애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미안해, 너한테 사과하러 왔어.”

경애 어머니가 경애를 데려가려고 도시에서 왔는데 그동안 이야기를 듣더니 빨리 현주한테 가서 담임 앞잡이 노릇한 것을 사과하라고 했다 는 것이었다.

“엄마는 상도 네가 타야 하는데 내가 탔다고 그러더라고. 윤미 어머니가 무서워서 나를 줬나 봐.”

경애는 담임이 군으로 갈 것 같다는 말도 전했다. 나는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지만 어쩌다 만나게 되더라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살아가면서 한번이라도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까 의심스러웠다.

“지금은 운동장 한쪽이 주차장으로 변했어요. 학교 도서관도 면민 도서관으로 바뀌었고.”

학교 건물은 그대로지만 학생이 적어서 많이 쓸쓸하더라고 현준은 말했다.

“언제 누나도 가 봐요.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내 친구 경애 있잖아, 죽기 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은데 남동생이 너와 같은 학년이었잖아. 소식 들은 적 있어? ”

“아니 한 번도 없어요. 걔는 어머니 따라 초등학교 때 도시 어딘가로 전학 가서 소식을 몰라요.”

“살아 보니 다 그게 그거던데 그때는 그런 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몰라. 이제는 그저 학생만 많이 왔으면 좋겠어.”

나는 운동장 가득 학생이 넘치던 그때가 그리웠다. 별난 담임을 또 만난다 해도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비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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