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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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연시에 우리 부부는 베트남에서 36박 37일을 보내고 왔다.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를 한 셈인데, 그 시작은 2024년 초 다시 들른 홍콩에서 비롯되었다. 화려한 옛 명성에 기대어 늙어가는 홍콩은 마치 노년에 접어든 내 삶과 비슷했다. 일본이나 유럽을 다니면 편안하고 익숙했지만, 신이 나지 않던 이유도 비로소 알았다. 활기였다. 사회 전체의 활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젊음이 넘치는 나라로 가서 그 기운을 듬뿍 받고 싶었다. 제일 젊은 대륙은 물론 아프리카지만 그보다 가까운 베트남 달랏을 골랐다.
베트남은 1억 인구에 평균연령이 30대 초반이어서 20대 이하가 많은 나라다. 치안도 확실하고 비행편도 많아 여행하기 좋다. 특히 중남부 고원지대에 있는 달랏은 사시사철 20도 전후인 봄 같은 기후에 베트남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알려지기도 했다. 6개월 전부터 항공편을 예약하고 인터넷을 뒤져 숙소도 예약했다. 드디어 겨울이 막 시작되는 12월 초에 달랏으로 출발하였다.
달랏은 가까운 호치민에서 버스나 국내선 비행기로 접근하기 편하다. 1900년대 초 프랑스인들에 의해 인공적으로 지어진 휴양 도시이다. 인구 30만 정도의 작은 도시에 한 해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온다. 도시 한가운데 둘레가 5킬로미터가 넘고 면적은 7∼8만 평 되는 쑤언흐엉 호수가 있다. 호수를 바라보는 남쪽 언덕에 프랑스풍 호텔, 성당, 관공서, 기차역 등이 있다. 북쪽 언덕에는 야시장과 현지인 거주지, 골프장과 달랏 대학교가 있다. 호수가 가운데 있는 소도시로 어디든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호수 이름 쑤언흐엉은 19세기 초에 활약한 여성 시인 호쑤언흐엉(湖春香)에서 유래되었다. 호춘향은 한시도 많이 지었으나 우리 이두나 향찰 비슷한 ‘쯔놈’을 사용한 당률시(唐律詩)를 많이 남겼다. 베트남에서 그녀는 ‘쯔놈시의 여왕’으로 불리고 베트남 문학사에서 ‘여성 작가로 여성의 심정을 담아낸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 시인은 달랏 호수 이름뿐 아니라 호치민 시내 거리 이름에도 쓰일 정도로 베트남 국민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사시사철 꽃이 피는 달랏 호수에 어울리는 봄 향기라는 멋진 이름에는 이 같은 문학의 향기도 덧붙여 있다.
달랏은 관광지보다는 휴양지에 가깝다. 특별한 문화유적이 많거나 특이한 자연경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열대지방이지만 고지대로 온도가 서늘해 나무들도 소나무가 많고 야자수 등 열대 나무는 거의 없다. 산세도 수더분해 한국과 자연경관이 비슷하다. 최근 국내 유명 방송에서 소개되어 한국 관광객이 많이 오기는 하지만 2박 3일 정도 둘러보면 더는 가 볼 곳도 없다. 오히려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야시장 주변만 벗어나면 인파도 적고 공기는 신선하고 햇빛도 맑았다. 오래 머물며 살아보기에 적합한 곳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못해 본 한가한 달랏 생활을 즐겼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호숫가로 걸어 나간다. 호수 둘레를 마음이 내키는 만큼 걷는다. 걷다 싫증 나면 가까운 카페에 들어간다. 달랏은 커피 산지이기도 해서 카페에 다양한 베트남 커피가 있다. 기분에 따라 코코넛 밀크가 가득한 달콤한 커피, 아니면 쓰디쓴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카페에는 물결이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보기 좋은 곳이 있다. 그곳에 앉아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다가 출출해지면 근처 쌀국숫집이나 베트남 혹은 타이 음식점을 찾아 나선다. 점심 먹은 후 잠깐 다시 호텔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뒹군다.
오후에는 가 보지 않은 골목길을 찾아 나선다. 저녁은 가능한 호사스러운 레스토랑을 찾아서 멋진 정찬을 즐긴다. 의외로 옛 프랑스 영향인지 달랏에는 멋진 서양 음식점이 더러 있다. 물가가 싸서 한국에서 못해 본 호사도 누릴 수 있다. 서울이나 홍콩에서라면 십만 원 가까울 최고급 호텔 애프터눈 티도 1∼2만 원으로 즐길 수 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베트남 말은 인사말 빼고 한마디도 모른다. 영어도 잘하지 못하지만 의외로 영어는 거의 안 통한다, 아주 아쉬울 때는 번역기의 힘을 빌려 간신히 의사소통할 수는 있다. 치안이 확실하지만 어쨌거나 외국이고 모든 게 낯설다 보니 부부가 하루 24시간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신기하게도 서울에서는 저녁이나 밤에만 보는데도 가끔 얼굴 붉힐 경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거의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내 편’이라 생각하니 믿고 의지하고 존중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우리 같은 은퇴한 노부부가 해외 한 달 살이를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우리도 그런 것에 자극받아 베트남 한 달 살이를 하게 되었다. 달랏이라는 지역이 한 달 살이에 적합한 곳이라서 좋은 경험을 하고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37일, 888시간 동안, 한시도 빠짐없이 붙어 다니면서 한 번도 얼굴 붉힐 일이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인 거 같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세월, 내 곁에 있는 ‘유일한 내 편’을 존중하지 않고 어찌 살겠는가! 일편단심 춘향(春香)과 이도령의 사랑이 달랏에 있는 쑤언흐엉(春香) 호수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