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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뿌리

한국문인협회 로고 송차식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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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의 세월이다. 지금의 기장군 장안읍 장안중학교에서 어렵사리 부산으로 유학하러 갔다. 시골에서 조금의 논마지기와 전답으로 여덟 식구가 아옹다옹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아버지께서는 배움이 딸려 답답함을 많이 가지고 살아오셨다. 딸들이 글을 깨치고 세상 물정을 알기 시작하면서 볼일을 보실 때는 도움으로 데리고 다니셨다.

아버지는 사촌들과 화합이 있는 날에는 본인은 여식들이 크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시내로 공부하러 보낼 것이라고 하셨다. 오촌 아저씨는 여식들 학교 보내면 굶어 죽을 것이라고 한사코 공부를 중단시켰다. 뒤에 육촌 언니를 만나니 그 부모를 원망하는 걸 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 살아가는 앞날에는 선견지명이 있으셨다.

위에 언니와 나는 일란성 자매이다. 우리는 항상 착하게만 살아와서 부모님 말씀에는 순종했다. 자주색 가방을 들고 장안읍 좌천에 있는 중학교, 왕복 20리 길의 거리를 걸어서 다녀야만 했다. 40리 길의 거리에서 버스 타는 학생이 많아서 20리 길의 거리에서 버스 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몸집이 약해서 교복 치마는 언제나 빙빙 돌아갔고, 다리가 새 다리처럼 약해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래도 결석 한번 없어 졸업식에서는 상품으로 옥편을 받았다. 그 옥편은 여고에 가서 한자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73년 3월, 좌천역에서 동래역에 내리는 기차를 타고 동래여고에 입학한다. 한동안은 시골의 티가 벗어나기는 정말 힘들었다. 가정 형편이 녹록지 못하여 시골 마을에서는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여식 둘 시내 학교 보내놓고 깡통 차고 나앉을 것이라고 뒷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위로 오빠가 두 분 계신다. 내가 시내로 학교에 나갈 때쯤에서는 오빠들은 군대에 가 있었다. 아무 힘이 될 수 없는 입지였다. 책상 하나도 구입할 수 없어 오빠가 썼던 것을 가지고 와야 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우리 어머니는 후에 많은 후회를 하는 것이 있어 내내 가슴 아팠다. 다른 집에서 여식들 시내 학교 보내어 공부는 않고 남자 학생들 만나 일찍 실패하는 것을 들으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파로 두 여식이 난방도 되지 않는 주인집 할머니의 구석진 방을 얻어 겨우 둘의 온기로 잠을 자면서 3년을 공부하게 한 것을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했다.

겨울이면 불도 들어가지 않는 골방에서 여식들을 묻어두고 희망을 바랐으니, 형편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의 자취방 환경이 다가구가 살아가는 곳이었고, 주인집 할머니와 네다섯 가구가 살아가는 집이었다. 금성사에 다니는 부부, 청과 조합에 다니는 아들 셋을 둔 가구와 엄마와 딸만 사는 가구 등등 네다섯 가구는 아침이면 화장실이 문제였고, 세수해야 하는 수돗가가 문제였다. 달동네의 흔한 풍경이었다.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낯설지 않은 일이기도 했지만, 그때도 윗집에 여중 교감 선생님 사모님은 시집살이 힘들면 주인집 할머니께 엄마라고 타령하고 울며 사는 가구도 있었다. 두 딸이 대학에 다니는데 아주 힘든가 싶기도 했다.

3월에 동래여학교에 입학하여 언덕 너머에 있는 자취방을 오가며 형설의 공 꿈을 키운다. 당시 동래재단의 학교가 복천동 500번지 언덕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엉덩이를 뒤로 내밀고 걸어가야만 빨리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학교 길가에는 군것질거리도 많았다. 떡볶이, 어묵 끓인 것, 꽈배기 과자 등등 그 어떤 것도 사 먹지를 못했다. 용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후에 군것질이라도 좀 했으면 체격이 좀 크지 않았을까 하는 애틋함도 있었다.

5월이 되어 학교에서 세계 민속 경연대회가 있었다. 3학년 언니들은 입시 준비로 참석은 하지 않고 주로 1∼2학년만 참가한 것 같다. 나는 아프리카 나라 반이었다. 알록달록 이불 문양인 옆이 터인 긴 원피스를 입고 얼굴과 살갗에는 검은색으로 칠했다. 당시 시골집에서는 초가지붕인 큰 채를 헐어내고 기와집으로 짓고 있었다. 아버지만 참석하셨다. 멀리서 똑같이 입은 아프리카 반을 보셨다고 한다. 유달리 작고 약했던 딸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딸의 왜소함에 마음이 아팠는지 집에 오셔서 우리 딸은 좀 더 잘 먹여야 하겠더라고 했다. 내색 없이 우리 아버지는 딸들을 매우 좋아하셨다.

동래재단이 1925년에 교사를 신축했으니 붉은 벽돌이었다. 여름이 되면 아름드리 등나무가 그늘을 주어 학생들이 즐거운 모습을 보이는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그늘에서 친구들과 <4월의 노래,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를 부르며 깔깔거렸던 회상도 뇌리를 스친다. 그 친구들은 다들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몇 친구들은 만나기도 하지만, 미국으로 다른 외지로 갔다는 친구도 있어 보고 싶은 날들로 새겨진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인문계 학교가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언니는 부산진여상을 다녔다. 후에 부산은행을 다니기도 했다. 당시 학교가 양정에 있어 10원짜리 입석 버스를 타기 위해 일찍 서둘러야 하는 날들이었다. 모자라는 도시락 반찬이지만 도시락을 싸고 보내는 것은 순전히 나의 몫이었다. 손이 시려 가까운 학교까지 가는 것도 일상이기도 했다. 어버이날이 되면 힘든 자취 생활에 노래도 못할 정도로 눈물을 흘린 일도 아련히 떠오른다.

학교의 부지가 1951년에 여고와 여중으로 분리 개편하고, 1987년 3월 금정구 부곡동으로 이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천동 500번지 부지는 요즈음 세간에 맞게 대형 아파트인 우성 건물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차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운동장에 조례를 하면 언덕바지에 머리 똬리를 한 사기 물동이를 이고 가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뇌리를 스친다. 개교기념일이 되면 행사와 더불어 참석한다. 시설이나 환경이 정말 잘 되어 있음에 감탄한다. 50년 전의 일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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