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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짚의 죽살이

한국문인협회 로고 장병선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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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만나는 대상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볏짚이 그렇다. 솔솔 부는 가을바람이 외출을 부추겨, 시흥 농장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목감(牧甘)을 지나 월미마을 정류장에 내린다. 눈앞에 펼쳐진 호조 들판이 삭발한 듯 썰렁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노랗게 익은 벼 이삭이 파도처럼 출렁이던 황금 들판이었는데….

어느새 고개 숙인 열매들을 콤바인이 탈곡해 가고 줄기만 잘린 채, 볏짚이 논바닥에 가지런히 누웠다. 내가 상식(常食)하는, 모든 이의 생명줄인 ‘쌀’을 키워준 몸이다. 제 몸이 잘린 벼 그루터기는 아침 이슬을 맞고 상주처럼 나란히 서 있다. 그 모습이 애처롭다. 그래선지 논둑에 우두커니 서서 ‘볏짚의 죽살이’를 생각한다.

살았을 때 벼의 줄기로, 기둥으로써 열매에 물과 양분을 공급하였을 뿐 아니라 세찬 비바람에 낟알이 드러눕지 않도록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여름과 가을, 그 짧은 기간에 몸 키우고 꽃 피워 결실을 보았다. 어느 한 줄기 가릴 것 없이 같은 키로 키워, 똑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벼는 ‘신의 한 수’를 터득한 게 아니었을까?

1년도 살지 못하는 짧은 생이라 다하지 못한 역할이 있어선지, 죽어서도 쓰임이 많다. 콤바인에 잘린 볏짚이 가을 햇살에 물기가 빠지면, 여기저기에서 손을 내민다. 짚신 삿갓 똬리 거적 광주리 삼태기 바구니 망태기 복조리 가마니 굴비 엮는 새끼줄 등의 재료로, 농촌 마당에 곡식을 저장하는 나락뒤주를 두르는 가림막으로, 초가집 지붕을 덮는 이엉으로, 소를 비롯한 가축의 겨울 양식으로 가져간다.

문득 쇠죽 생각이 난다. 학창 시절, 나는 우리 집의 쇠죽 담당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작두에 볏짚을 썰어 마구간에서 여물을 끓였다. ‘풋풋 풋’하며 솥뚜껑 사이로 내뿜는 여물 익는 냄새가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했다. 구수한 볏짚 내를 즐겨 마셨다. 쇠죽 쑤던 아궁이 앞에서 나뭇가지를 꺾어가며 불을 때던 그 시절이 그립다.

쇠죽이 다 끓어 구유에 퍼주면 소는 워낭 소리를 내며 잘도 먹었다. 맛이 있어선지 씹고 되씹으면서. 그럴 때면 ‘사그락사그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행랑방에서 새끼 꼬는 소리다.

문풍지 창살에 드리운 보름달이 기울도록 꼰 새끼는 가마니의 ‘묶음 줄’로, 정월대보름 때 위아래 마을의 힘을 겨루는 ‘줄다리기 밧줄’로, 새끼줄 중간에 잘 익은 고추와 숯을 달아 장독의 목에 둘리어서 벌레와 잡귀를 막는 ‘방패줄’로, 아기를 낳은 집에는 부정한 잡귀의 침범이나 접근을 막고자 사립문이나 대문에 처져 사람의 출입을 삼가도록 하는 ‘금줄’로 쓰이던 그 많은 새끼가 볏짚의 몸이 꼬여 가능했으니….

공헌하는 게 어디 그뿐이랴. 겨울철 귀한 나무의 방한복이 되어 설한풍을 막아준다. 또한, 소를 비롯한 가축의 먹이로 쓰인다. 오장육부를 거쳐 배설물로 나오면 또다시 벼를 비롯한 곡식을 키우는 땅심이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논에 남긴 제 뿌리도 쟁기에 갈리어 흙 속에서 지력(地力)을 높인다. 이처럼 볏짚은 살았을 땐 벼를 키워 우리에게 식량을 주고, 사후에도 여기저기에서 요긴하게 쓰이다가 끝내는 썩어서 우리 땅을 살찌운다.

이렇듯 볏짚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용한 식물이다. 쌀을 키워주는 기둥이며 풍우를 막아주는 지붕의 이엉이요, 나무의 방한복이며, 새끼로 꼬여서 각종의 묶음 줄로, 제가 자란 땅의 거름으로 수많은 역할을 한다. 아마도 이만치 쓸모 많은 사물이 또 있을까 싶다.

한데 반세기가 넘도록 간과하고 살았던 ‘볏짚의 죽살이’를 이제 인식한다. 그런 게 어디 볏짚만일까? 수많은 사물을, 사람을 대하면서 단면만 보고, 전생(前生)만 보고 살아온, 수박 겉핥기식 삶이었을 것이다. 때늦은 이제부터라도 전후생(前後生)을 아우르는 대상의 죽살이를, ‘나의 죽살이’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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