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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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에 후고구려의 후신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관심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이용하여 사람을 통제 관리했다고 한다. 궁예는 스스로 이 능력이 있어서 역심을 품은 사람의 마음을 모두 꿰뚫어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실에는 있을 수 없지만 이는 정적 제거에 아주 유용하게 써먹기 위한 공포 정치의 한 방법에 불과하다. 하지만 감정이나 믿음, 마음, 사랑 등의 보이지 않는 실상들이 인간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보이지 않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모든 일상의 원천이 되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환경에 잘 적응해 살아가는 것을 보아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 한 방울 없는 높은 절벽 꼭대기의 바위 한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도 항상 푸른빛을 잃지 않는다. 이 소나무는 스스로 그 거대한 바위를 갈라 틈을 만들고 그 사이로 뿌리를 내려 땅속에 수분을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숙련된 석공 수십 명이 매달려도 할 수 없는 일을 여린 소나무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은 조물주의 힘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바위 위에 이 소나무는 뿌리에서 산성 물질을 분비하여 바위를 조금씩 부식시키면서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힘없이 갈라지게 되고 그 틈으로 길게 땅까지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마치 옛날, 여름에 얼음 화채를 만들기 위해 얼음덩어리를 쪼갤 때 사용하는 도구가 가느다란 바늘이었다. 바늘을 얼음 가운데 세우고 작은 힘으로 가격해도 단단한 얼음도 쉽게 반으로 갈라지는 원리와 같다고 한다.
오래 전 주말농장을 한다고 농장 한 귀퉁이에 농막을 짓고 앞에 시멘트 포장을 하려다가 나중에 땅의 활용도를 생각해서 잔디를 심었다. 그런데 봄이 되면 잔디 사이로 잡초들이 올라왔다. 직장 때문에 주말과 휴일에만 농장에 나갈 수 있기에 이것을 뽑는 게 일이 되었다. 특히 바랭이풀은 어릴 때는 잔디와 구별이 잘되지 않아서 그대로 두어 몇 주만 지나면 줄기를 길게 뻗어 잔디를 덮어 버리기에 잔디가 햇빛을 받지 못하여 자라질 못한다. 그래서 뽑아 버리려다가 시간이 없어서 궁리 끝에 1년생 잡초니까 씨앗을 맺기 전에 예초기로 베어버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별로 넓지 않아서 반나절이면 깨끗이 정리할 수 있어서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을이 깊어지고 온 산천이 단풍으로 물들고 가을걷이도 거의 마무리되었는데 잔디 사이에 파란 바랭이가 줄기는 자라지 못했으나 앙증맞게 짧은 꽃대에 여러 개의 꽃이 이삭 모양으로 피어 씨앗을 대롱대롱 달고 있었다. 차가운 날씨에 다른 잡초들은 모두 시들었는데 1년생이다 보니 지금 씨앗을 맺어야 하기에 추운 날씨를 모질게 견디며 씨앗을 품고 있어야 한다. 이런 차가운 날씨를 견디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어디서 온 것일까? 작지만 위대한 자연의 힘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것을 이용해 그 이듬해 입동이 지나고 쌀쌀한 겨울에 접어드는데도 앙증맞으리만큼 작은 화분에 채송화 꽃을 피워본 적이 있다. 주위 사람들은 늦게까지 싱싱하게 피어 있는 채송화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채송화는 가을이 되면 시든다. 그런데 꽃이 피었다가 지고 난 다음 꽃을 따버리고 씨앗을 맺는 씨방까지 잘라버렸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목적은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씨앗을 맺기 위해서다. 씨앗이 여물지 않으면 또다시 꽃을 피워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의 종족 보존의 본능이다. 또한 이를 이용하여 늦은 가을에 화분에 덩굴 식물인 나팔꽃 씨앗을 심으면 감고 올라가는 지지대를 만들어 줄 필요가 없다. 몇 개의 마디가 올라오고 마디마디에 서둘러 꽃을 피운다. 스스로 겨울이 가까이 옴을 깨닫고 빨리 씨앗을 맺기 위해서다. 지나치기 쉬운 이 같은 자연의 섭리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들도 환경이 바뀌면 신체가 적응하기 위해 반응을 한다. 오래 전 중국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성도에서 비행기로 구채구에 갔었는데 공항에 내리니 고도가 높아서 귀가 먹먹했다. 해발 3천 미터가 넘어 공기 밀도가 희박하여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약간의 두통과 함께 피로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헐떡거려졌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고도가 낮은 지역에 살던 사람도 일주일 정도만 있으면 적혈구 수가 증가하여 적은 양의 산소로도 적혈구의 헤모글로빈과 반응하는 양이 많아져서 적응된다고 하니 우리 인체도 그저 신비로울 따름이다. 이런 환경적응을 이용해서 나쁜 환경에 일부러 노출시켜 적응하도록 함으로써 면역력을 기르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각종 예방접종이다.
사람이 병에 걸리면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을 통해서 신체의 어느 부위의 상태가 나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빨리 병원에 가보라는 말 없는 신호다. 심한 병에 걸려도 통증이 없으면 자신이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 이 말 없는 아픔의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병원에서는 의사가 환자를 살피고 약을 처방해 준다. 심하면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팔다리가 골절되어서 병원을 찾기도 한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은 누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얻은 원료를 이용해서 조제한 것이다. 수술도 찢고, 잘라내고, 봉합하는 일은 의사가 하지만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은 우리의 신체가 스스로 알아서 한다. 팔다리가 골절되었을 때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부러진 뼈를 제자리에 맞추고 움직이지 않도록 석고붕대를 감아 고정시키는 일뿐이다. 그 뼈를 서로 붙게 하지는 못한다. 의사가 뼈를 고정시켜 놓기만 하면 진액이 나와 서로 연결이 되어 다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 이는 창조주의 세심하고 위대한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것 같다. 성서에서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라고 했다. 사람은 결국 실상이 보이지 않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